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7)화 (77/130)

#77

아리안은 숨이 거칠어지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왕자한테 술을 엎지른 걸 사과하고 싶어. 어디 머무는지 알려 줘.”

그러자 둘이 동시에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갑작스레 하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멍해진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스르르 방에서 떠나갔다. 남은 하나가 입을 열어 지껄였다.

“네가 그런 걸 신경 썼어? 이상한걸.”

“신경 쓸 수도 있지.”

“흐음.”

요한이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면서 침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그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초조한 기다림 자체가 수치스러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이 궁전은 이제 요한의 영역이었다. 이곳의 어디에서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의 아리안으로서는.

“아하!”

갑자기 요한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가 아리안을 향해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리안은 애써  표정을 태연하게 가다듬었다. 적어도 그런 노력은 했다. 요한이 히죽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왕자는… 흠. 맞아. 삼 년 전에 죽은 아슬랭 소백작. 그 발칙한 신전 기사….”

그가 아리안을 떠보듯이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아리안은 발에 굳건하게 힘을 주고 버텼다.

한참을 기이한 눈치 싸움이 이어지다가 요한이 휘유우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물렸다.

“흥.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그 신전 기사가 이미 죽은 아슬랭 소백작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 말야. 이봐. 날 봐. 그런 건 내 전문이야.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아리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자와 말을 섞어 봤자 휘말릴 뿐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이 계속해서 지껄였다.

“이왕자에게 그자에 대해 물어보려는 모양이지? 그런 게 의미가 있겠어? 이왕자는 여기 인간이야. 신전 기사에 대해 알 리가 없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오해였지만 이런 오해를 해 준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리안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알지도 모르잖아. 만약 이, 이왕자가, 그 신전 기사를 어떻게 불러냈는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불러냈는지 알고 있다면? 흐흥.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있을까 봐?”

“부르는 의식과 돌려보내는 의식은 하, 한 쌍이니까 알고 있을 수도 있지.”

그는 요한 앞에서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도 거짓말을 하느라 저절로 말이 더듬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요한의 의심을 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깊게 허리를 구부렸다.

“굳이 이 야심한 시각에 이왕자 전하를 뵙겠다면야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어찌 신관님의 부탁을 거절할까.”

벌레가 기어가는 듯이 기분 나쁜 목소리. 그것을 끝으로 그가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이왕자의 거처는 멀리 떨어진 성탑에 있었다. 그 구조는 이전 칼릴이 머물던 뱀의 탑과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만일 이 성에 대해 잘 모르는 자라면 단번에 길을 잃고 헤맸을 것이다.

요한은 아리안을 그 앞까지 안내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 신전 기사가 여기 왔던 이유는 너일까 아니면 차원 마수일까?”

그 뒤에 그는 흐흐흣 하고 불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즐거운 대화 되라구. 얻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리안은 떨리는 온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을 어둠 속에 서 있은 후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아덴의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요정족 기사 두 명이 앉아 무료하게 카드를 치고 있었다. 아리안이 나타나자 그들이 자연스럽게 검을 잡았다. 그들 중 하나가 인상을 쓰며 나머지 하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신관이야.”

“어떻게 알아?”

“아까 봤어.”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복도가 고요해서 아리안의 귀에 들릴 만큼 크게 울렸다. 아무튼 그들이 아리안의 신분을 알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기사 한 명이 일어서며 물었다. 그는 검에서 손을 뗐지만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허리에는 묵직한 철검이 매달려 있었고 그것은 실전용처럼 보였다. 한밤중인데도 가죽 완갑을 꼈으며 부츠에는 박차까지 매달려 있었다.

“이왕자 전하를 만나러 왔어.”

아리안의 선선한 대답에 그들이 서로 짧게 눈짓을 했다.

아리안은 그들이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아덴에게 자신의 느닷없는 방문을 고하러 다녀오는 동안 잠시 기다려야 하거나.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따라오시죠.”

이는 의외였다. 아리안은 요정 기사 한 명을 따라 안쪽으로 손쉽게 안내되었다.

아덴의 내실에는 갖춰질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긴 소파와 탁자, 진줏빛으로 칠해진 콘솔 위에는 이국적인 도자기 화병이 놓여 있었으며 한 아름 꽂힌 장미 다발에서 신선한 향기가 풍겼다.

거기에는 이미 아덴이 있었다. 아덴이 기사를 향해 눈짓하자마자 기사가 빠르게 내실을 떠나가며 문을 닫았다.

아리안은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앉으시죠.”

아덴이 무표정하게 권했다. 아리안은 떨떠름히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아덴은 아까의 술로 젖은 옷은 갈아입었지만 잠옷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당장 떠날 사람처럼 신발을 신고 튜닉에 허리띠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차를 좀 드릴까요?”

“차?”

“네.”

그가 아리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탁자에 놓인 차 통을 집어 들었다.

“아슬랭에서는 차가 나지요. 몇 종류 되지는 않지만…. 파살리아 사람들이 아슬랭 차를 좋아한다기에 가져와 봤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여유로운 동작으로 거름망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리안은 그 여상한 동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파살리아 사람이 아니에요.”

“압니다.”

아덴이 대답했다. 그는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손잡이가 달린 작은 찻잔에 옮겨 담아 아리안에게로 밀었다.

찻잔은 투박했다. 그것은 유리로 된 것이었으며 별다른 색이나 무늬는 입히지 않았다. 금박을 입힌 본차이나에는 당연히 비할 바도 못 되었다.

아리안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는 어딘지 매콤한 맛이 났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차 한잔할 정도는 되겠죠.”

아덴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의 혼잣말 같았다.

“생각해 보니 제가 찾아가는 것보단 이쪽이 낫군요. 부왕께선 당신이 여기 온 걸 알고 계시겠죠?”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만찬 한중간에서와 똑같은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속내를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는 국왕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형제인 나일과도 완전히 다른 인종처럼 보였다. 절반이나마 요정의 피가 섞였기 때문일까?

“할 얘기라는 건 뭔가요?”

아리안의 물음에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없으니 말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전 당신을 도우려고 여기 왔습니다. 파살리아를 빠져나가고 싶으시죠?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덴은 평온한 목소리로 폭탄을 던졌다.

찻잔을 든 아리안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기어이 그것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는 아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덴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날 도, 돕, 돕겠다고요?”

“네.”

“당신이 왜?”

아리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왕녀, 왕자들의 후계 다툼. 권력 싸움. 전쟁. 올굽 평원의 도르센 군대, 엘테아, 코르키라와 남부 연합…. 이제는 아리안도 이곳 상황에 대해 알 만큼은 알았다. 갑작스레 내밀어진 손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아슬랭은 오랫동안 중립을 지켜 왔다. 요정 일족들은 북부의 수정 호수에서 나오지 않고 침묵했으며 인간들의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였다. 이왕자가 직접 그 중립을 깨트리면서까지 무기와 식량을 싸 들고 파살리아까지 온 이유가 고작 아리안을 돕기 위해서라니?

“나, 날 도우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덴이 대답했다.

“그건 당신 선택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러겠다고 하면 저는 당신이 파살리아를 빠져나가는 걸 도울 겁니다.”

“당신은 일왕자와 동맹을….”

“아닙니다.”

그때서야 아덴의 얼굴에 약간의 표정이랄 만한 것이 드러났다. 그는 그제야 약간이나마 인간 같아졌다.

“하아.”

그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슬랭은 중립을 지켜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테죠….”

“하지만 당신이 식량과 무기를….”

“그건 일종의 미끼입니다. 파살리아에 들어오기 위한 미끼요.”

“미끼라고?”

아리안의 숨이 가빠졌다. 아덴은 조용히 아리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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