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6)화 (76/130)

#76

“짐의 신관이여. 짐의 자랑스러운 둘째 아들에게 술을 따르도록 하여라.”

그가 싱글싱글 미소를 띤 얼굴로 명령했다.

아리안은 그제야 사색에서 빠져나와 식탁을 둘러보았다. 요한은 웃고 있었고 맞은편에 아덴이 술병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가 술을 따르려던 것 같았다.

아리안은 딱히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일어났다. 그는 아덴에게로 다가가 술병을 받아들었다. 아덴이 도로 자리에 앉았고, 아리안이 그의 술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금빛 액체가 묵직한 은 고블릿으로 떨어졌다.

음악이 길게 이어지는 크레센도로 접어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아리안은 멈칫했다. 아덴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 아리안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밤에 찾아뵙죠. 문을 잠그지 마십시오.”

왈칵, 잔에서 술이 넘쳤다. 넘쳐흐른 술이 이왕자의 소매를 적셨다. 아덴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아리안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묵직한 황금 술병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것을 대신 받았다. 그의 젖은 소매에서 술이 뚝뚝 밑으로 흘러 떨어졌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신관이 그리 놀라느냐?”

요한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국왕의 거죽 너머로 이전 신이 짓궂은 눈을 빛냈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뻣뻣하게 굳은 혀를 달싹였다. 그가 무어라고 변명을 하려던 순간 아덴이 움직였다.

아덴은 침착한 동작으로 황금 술병을 탁자에 다시 세웠다. 시종이 다급하게 다가와 그의 젖은 소매를 닦으려고 했다. 아덴이 손을 내밀어 시종을 물렸다.

“신관의 아름다움에 제가 놀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신관께선 찬사에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가 대답했다. 잠시 후 요한이 피식 웃었고,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나일이 킬킬댔다.

“부왕께서 총애하시는 신관을 너무 놀리면 안 되지.”

“신관이 찬사에 익숙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 도르센 것들은 파살리아 사람들하곤 다르게 혓바닥에 못을 박아 넣은 인종들이니 말이다. 아무튼 앉거라.”

갑작스러운 도르센 얘기에 아리안은 더욱 굳어졌다. 아덴이 무표정하게 도로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처럼 영원히 서 있었을 것이다.

“일왕자에게도 술을 따라 주거라. 짐은 언제든 신관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실 수 있지만 왕자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요한이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나일의 얼굴이 기묘하게 잠잠해졌다.

아리안은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것은 철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긴 식탁을 빙 돌아 나일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가 나일 앞에 섰을 때 오만한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안을 핥듯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몸을 떨면서 술을 따랐다.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는 광대처럼 이곳에서 왕자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동시에 안도감도 함께했다. 적어도 요한이 그에게 더 심한 짓을 시키지 않아서.

인형극 같은 만찬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광대가 들어와 입에서 불을 뿜었고 원숭이와 곰이 뒷발로 서서 공을 타며 악기를 연주했다. 무용수들은 끈에 매달려서 춤을 췄다. 그사이에도 몸종들은 쉴 새 없이 음식과 술을 가져왔다. 대부분은 한 입, 또는 그보다 적은 양만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접시 채로 들려 도로 나갔다.

국왕의 몸에 들어앉은 요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맞았다. 그는 광대의 익살에 껄껄댔고 공을 타는 짐승들을 향해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으며 무용수들에게 금 단추 같은 것을 떼서 던졌다. 이전 국왕이 간신히 연회의 시작을 지키거나 나타나지조차 않았던 것과 딴판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만찬이 파했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퇴장했다. 즐거웠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만찬장을 떠나는 그의 뒤로 시종들이 따라 나갔다. 그때서야 만찬은 완전히 끝이 났다.

이 모든 짓거리를 즐긴 것은 국왕뿐이었다.

나일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아덴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고 아리안은 단 한 순간도 몸에 긴장을 풀지 못했던 탓에 팔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아리안은 초주검이 된 몸을 애써 독려하여 일으켰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발을 재촉하던 아리안의 눈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나일이 들어온 것은 넓은 만찬장을 빠져나오려던 차였다.

나일은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헐떡헐떡 콧김을 뿜고 있었다. 아리안의 숨도 거칠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두운 복도 끝으로 달음박질했다. 나일이 그를 따라왔다. 아리안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그때 어디론가 이어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안은 무작정 계단을 올랐다. 멀리서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가 아리안이 오른 계단 밑에 도달하는 순간, 계단 위쪽에서 스윽 하고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아리안이 악! 하고 비명을 올렸다.

“후우, 후우, 여기 있었….”

계단을 오르던 나일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가 흠칫 멈춰 섰다.

계단 중간에서 불쑥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궁정 마법사였다. 로브를 입고 두건은 쓰지 않았다. 가느다란 눈과 히죽거리는 입매가 어둠 속에서 둥둥 떠 있었다.

나일이 인상을 썼다.

“궁정 마법사가 여긴 무슨 일인가?”

“일왕자 전하.”

궁정 마법사는, 그러니까 요한은, 히죽거리는 채로 허리를 구부렸다.

“국왕 폐하께서 신관님을 안내해 드리라 하셔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일왕자 전하께선 신관님께 무슨 볼일이라도?”

그 질문에 나일이 아리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리안은 뱀 앞의 울새처럼 작게 움츠러들었다.

그때 요한이 아리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신관님. 밤이 늦었으니 성에서 묵고 가시라는 국왕 폐하의 배려십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죠.”

그가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나일에게도 인사했다.

“일왕자 전하께서도 편안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일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얼굴색은 조금씩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 남자는 색을 밝혔으나 그것 때문에 이성을 잃기에는 지나치게 교활했고 그 점이 바로 가장 나쁜 점이었다.

“신관에게 기도를 청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늦은 모양이군.”

그가 숨을 고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끈끈하게 아리안을 핥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부디 시간을 내주시게.”

나일이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안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잡아 길게 입술을 눌렀다. 파충류가 닿은 것 같았다. 아리안은 비명을 참으며 그 긴 몇 초를 버텨 냈다.

간신히 나일이 떨어졌다. 그가 몸을 돌려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그의 시종이 허둥지둥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아리안은 삐걱거리는 목을 겨우 돌렸다. 그림자 같은 요한이 거기 서 있었다. 이번에는 궁정 마법사의 껍질을 뒤집어쓴.

어두운 계단참 위에 둥둥 뜬 창백한 얼굴이 아리안을 향해 씩 웃었다.

“가시지요, 신관님.”

그가 조롱조로 말했다. 아리안은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성에 머물 때면 지내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은 국왕의 방에서 멀지 않았고 손님방 중에서는 다섯 번째로 훌륭한 방이었다. 당연히 아리안은 이 방을 싫어했다. 파살리아 사람들은 그가 성에서 다섯 번째로 좋은 손님방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지고도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냥 아리안은 이 성의 모든 곳이 싫었다.

이번에는 요한의 얼굴을 한 몸종이 램프에 불을 켜고 잠옷을 가져왔다.

“이런 연회도 제법 재미있어. 응? 그렇지 않나?”

요한이 친근한 척 말을 걸면서 깨끗하게 개켜진 잠옷을 침대 곁에 놓았다. 그 손길은 몸종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성의했다. 그가 침대를 대충 정리하는 사이에 또 다른 요한이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그것들은 모두 요한이었다.

이는 단 하나의 뇌를 가진 군집 생명체나 또는 여러 개의 머리에 하나의 몸통만을 가진 케르베로스나 히드라를 연상시켰다.

“아. 오랜만에 즐거웠어. 이왕자가 참으로 효자야.”

“이왕자 덕분에 당분간은 풍족할 거야. 다음번에는 귀족들을 다 초대해서 더 큰 연회를 열어야겠는걸.”

“뭐, 봄이 되면 어차피 비스키우스에서 조세가 도착할 텐데.”

“새 사냥터를 지어야겠어. 동물을 더 풀고. 지금 파살리아의 사냥터는 심심하단 말이지.”

“사냥 대회도 좋고. 호수에서 뱃놀이도 좋지. 더 추워지기 전에.”

아리안이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수다스럽게 떠들어 댔다. 아리안은 동시에 지껄여 대는 두 명의 요한에게서 몸을 돌리고 창밖만 고집스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가 고요해졌다. 아리안은 갑작스레 적막을 느끼고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두 요한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정지한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둑한 방에 시종 차림의 남자 둘이 같은 얼굴로 정지해 있는 모습은 어딘지 괴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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