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5)화 (75/130)

#75

“제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그냥 흙을 쌓은 토성이라더군요. 임시 요새입니다. 겨울을 제대로 나기는 힘들 테니 이번  극야가 지나면 기세가 꺾일 겁니다.”

나일이 흠, 하고 턱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아르바 누님이 아니라 날 찾아온 건….”

“형님. 파살리아는 왕국의 천년 수도입니다. 당연히 이곳으로 와야지요.”

나일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엘테아를 빼앗기고 아르바에게 간신히 목숨을 구명받았다. 그의 재능은 전쟁에 있지 않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아르바를 배신하고 누구보다 빨리 군대를 물려 파살리아를 차지한 것이다.

엘테아에서의 패배는 그저 작은 후퇴에 불과하다. 결국 그는 파살리아를 얻지 않았던가. 파살리아에 남은 것은 노쇠한 국왕뿐….

“그래.”

나일이 빙긋 웃으면서 양손을 마주 잡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게다. 그리고 우리 누이께서는 전장에서는 그야말로 불패가 아니신가? 나는 그저 누이를 믿고 있을 뿐이지.”

그가 뻔뻔스럽게도 와해된 동맹에 대해 지껄여 댔다. 아덴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아리안은 그들을 힐끔거리다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촛불이 크게 일렁이는 틈을 타서 의자를 약간 더 나일에게서 먼 쪽으로 끌었다. 아주 약간만… 왜냐면 너무 많이 옮겼다가는 그만큼 요한에게 가까워질 터이니 말이다.

악사가 잠시 음악을 멈추고 현을 골랐다.

그때 문밖에서 시종이 발을 한 번 구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국왕 폐하 드십니다!”

만찬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아리안은 시선을 바닥으로 숙였다. 나일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딱딱거렸으며 아덴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이 활기찬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왕홀도 지팡이도 들고 있지 않았으며 부축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가볍고 짧은 튜닉을 입고 있었으며 망토는 없었다. 신발은 가벼운 가죽 부츠였으며 보석 벨트 대신 튼튼하게 엮은 벨트를 하고 있었다. 소매는 치렁거리지 않도록 손목에서 묶었다. 평소의 크고 무거운 보석 왕관 대신 가벼운 금관을 썼다. 그것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는 사냥꾼처럼 입었다. 그는 고작 마흔 살 언저리처럼 보였다. 아주 건강한 마흔 살.

아덴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보인 것 중에 가장 격렬한 감정변화였다.

“짐의 아들들.”

요한이 식탁을 둘러보며 박수를 한 번 쳤다.

“아덴. 우리 둘째. 오랜만이구나.”

그가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그가 나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짐의 장남. 오늘도 믿음직스럽군.”

마지막으로 그는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이 자리에서 없어지고 싶었다. 물론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신관! 오늘따라 유달리 아름다운걸.”

그가 가장 크게 웃었다. 그는 마치 활기차고 친근한 왕처럼 굴었다.

“모두 자리에 앉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나이가 드니 다리가 아파서 말이야.”

요한이 뻔뻔스레 그렇게 지껄이자 시종이 재빨리 다가와 의자를 당겨 주었다. 요한은 자리에 앉았다.

아덴의 시선이 젊어진 국왕의 얼굴 언저리를 맴돌다가 스윽 돌아가 나일에게로 향했다. 나일은 그 시선을 받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뒤에 아덴이 입을 열었다.

“전하. 건강해 보이십니다. 아들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오, 그래.”

요한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 말을 기꺼이 받았다.

“신관이 최근 짐의 마음을 아주 기껍게 해 주고 있거든. 정화술도 그렇고… 아니 그러느냐?”

그러면서 그가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함께 아리안을 응시했다. 아리안은 목을 움츠리고 간신히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쯧. 우리 신관이 부끄러움이 많아. 항상 저 말뿐이거든. 영광이든 송구하든… 뭐. 재잘재잘 말만 잘하는 것들보다는 낫다만.”

요한이 인자한 척 웃었다.

분위기가 기이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악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음악을 연주하거라. 밝은 걸로. 너무 시끄러운 건 말고.”

악사가 곧장 발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만찬장으로 들어와 음식을 식탁에 하나씩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모든 음식은 화려하고 섬세했으며 사치스러웠다. 전시에 먹을 만한 음식은 결단코 아니었다.

“주방장에게 신경 좀 쓰라 일렀지.”

요한이 자신의 앞에 놓인 철갑상어 꼬치를 뜯어 먹으면서 말했다.

“짐의 둘째 아들이 온 덕에 모처럼 식탁이 호사스럽구나.”

“맞습니다. 아덴이 아주 신경을 써서 물건들을 가져오지 않았겠습니까?”

나일이 맞장구를 쳤다. 요한이 하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맞다. 여기에 짐의 효자 둘이 모두 있구나. 물론 올굽에서 고생하고 있을 너희들 누이도 빼놓을 수는 없지.”

그 뒤에 요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은 꼬치를 뒤쪽으로 내던지면서 지껄였다.

“불효막심한 막내아들 놈과는 다르지. 아무렴. 그놈은 그럴 줄 알았다. 태생이 그렇지 않느냐? 너희와는 다르지. 저주받은 태에서….”

아리안은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였다. 나일이 광대처럼 요한의 말에 쉴 새 없이 맞장구를 쳤다.

음식은 쉼 없이 나왔다. 종류가 적어도 백 가지는 되었다.

“겨울이 지나면 도르센의 병력도 꺾일 겁니다. 벽돌 한 장 없는 평야 한가운데에서 극야를 맞을 테니까요.”

나일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까짓것 금방 되찾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못 되찾은들 어떻겠느냐? 우리에겐 아직 비스키우스가 있고 파살리아는 난공불락이 아니겠느냐?”

모든 대화는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았지만 아리안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칼릴….’

아리안은 칼릴을 생각했다. 누군가 심장을 꽉 옥죄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전황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저 모든 것이 그들 말대로이고 칼릴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그래, 아슬랭은 어떠한가?”

단순히 근황을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아슬랭은….”

아덴이 조금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이 대답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전하.”

“흐흥.”

요한이 코를 울리며 웃었다.

“현명한 대답이로군.”

그다지 흡족한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일이 아덴을 쳐다보았다. 아덴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도르센의 역적이 아슬랭 소백작을 죽였으니 어찌 아슬랭이 도르센 편을 들겠습니까? 또한 아들로서 부왕을 따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것은 이왕자가 지금까지 꺼낸 말 중에 가장 긴 말이었다.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슬랭의 요정들은 그럼 파살리아 편이다?”

“여태까지 그랬듯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전하.”

그제야 요한이 표정을 풀었다. 식탁의 분위기가 간신히 부드러워졌다.

아리안은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주위에 들리지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 아덴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아슬랭 소백작이 도르센 대공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파살리아 편을 들겠다고? 3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왜 이제 와서?

3년 전 그날 새벽을 떠올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플 정도였다. 아리안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그의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술은 향기로웠으나 독했다. 상관없었다. 이 독주가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주기를.

만찬도, 대화도 이어졌다.

“우리 아우가 파살리아로 들어오면서 상단 무리를 함께 이끌고 들어왔더군요.”

나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나이 차이가 약간 떨어진 형제지간처럼 보였다. 그가 요한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시장이 열릴 것 같습니다. 파살리아에도 이제 활기가 돌겠군요. 올굽의 전황처럼요.”

“물론이지. 짐의 둘째 딸이 엘테아를 되찾았으니 남은 것은 이제 승리뿐이로구나.”

값비싼 술과 기름진 음식을 앞에 둔 부자가 전장에서 구르고 있을 둘째 왕녀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거렸다.

아리안은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탈출. 언제나 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는 꾸준히 기회를 엿보았다. 아주 가끔씩 우울해지곤 했으나 그다지 길어지지 않았다. 필멸의 신체에 갇힌 채 이곳 머나먼 차원에서 영원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이따금씩 그를 덮쳤지만 그는 꿋꿋하게 그것을 떨쳐 냈다.

그에게는 더 큰 사명이 있었다. 재앙을 막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가 직접 요한을 상대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그저 파살리아를 탈출해 칼릴에게 이 진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재앙이 이곳에 있으며 그를 노리고 있다고. 신성 재판 자체가 예언의 일부였으며, 칼릴을 추방한다는 판결은 커다란 실수였다고.

한참 딴생각에 빠져 있던 아리안을 깨운 것은 요한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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