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4)화 (74/130)

#74

아무튼 그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마주 잡아 꼬았다.

요한이 말한 만찬. 거기에 누가 있을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일왕자….’

아리안은 음울하게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 년 전 일왕자 나일이 엘테아에서 패전하여 파살리아로 귀환한 이래, 아리안의 삶은 더 고달프고 더 위험해졌다. 그가 성에서 요한의 장난감 노릇을 하고 있는 아리안을 발견하고는 어떤 눈빛을 했던가.

다만 요한의 변덕스러움이 그에게 아직 아리안을 강제로 폭행할 여지를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신관이었다. 그것도 국왕의 총애를 받는 파살리아에서 단 한 명뿐인 신관.

국왕은 시시때때로 신관을 불러 기도를 하게 했다. 때로는 시종들을 모두 물려 놓고 밤새워 그렇게 시키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국왕의 침실에서 국왕과 신관이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국왕의 회춘이 신관의 정화술 덕분이라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소문들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리안은 또다시 탈출에 대해 생각했다.

퀸트 관문이 봉쇄된 탓에 파살리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목적과 신분이 분명해야 했다. 아리안은 둘 다 분명하지 못했다. 퀸트 관문을 제외하면 파살리아는 험준한 에포나 산맥의 두 산줄기로 에워싸여 있었는데 그는 사람의 발로 지나다닐 만한 길이 못 되었다.

아리안은 이제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었다. 아주 작은 상처도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이 땅에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세균이 득시글거렸고, 제대로 된 의사는 물론 적었다. 그러므로 탈출은 매우 신중해야만 했다.

‘조금 더 준비를… 겨울이 오기 전에….’

아리안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앞서 걷는 시종을 따라갔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서 두 발자국 앞에 있는 시종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보았던 탓이었다.

시종이 불시에 걸음을 멈췄고 아리안은 하마터면 그의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출입문 앞, 나일이 서 있었다.

아리안은 흠칫했다.

나일이 뱀 같은 시선으로 아리안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그 시선에 서린 음탕한 기색에 아리안이 몸서리치는 것과 동시에, 그와 아리안 사이를 막고 있던 유일한 방패막인 시종이 옆으로 물러나며 바닥에 엎드려 나일을 향해 절을 올렸다.

나일은 시종을 무시하고 아리안을 향해 다가왔다.

아리안은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사내는 투우나 엽견 같은 성질로, 달아나면 더 쫓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지난 3년 동안 충실히 깨달은 덕택이었다.

나일이 눈으로 핥듯이 아리안을 보았다. 아리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공작새같이 차려입은 차림이 무색하게 나일이 사냥개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 적나라한 소리에 아리안은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요한보다 그에게는 지금 이 남자가 백만 배는 더 위협적이었다.

다행히 제아무리 망나니라 해도 시종들의 눈앞에서, 그것도 연회장 출입문 바로 앞에서 아리안을 희롱하지는 못했다. 그가 친근한 척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먼저 들어가도록 해.”

그의 얼굴에 한껏 웃는 표정이 떠올랐다.

“부왕께서 총애하시는 신관에게 이 정도 양보쯤이야 못 해 드릴까?”

“아, 닙니다. 전하께서 먼저 들어가세요.”

아리안이 사양하자 나일의 눈에 번뜩 빛이 떠올랐다. 그가 아리안에게 다가오며 친절한 척 웃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지.”

하면서 그가 아리안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아리안은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만찬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바람이 무색하게 그는 쓰러지지 못했다.

식탁은 족히 스무 명은 앉을 만큼 길었지만 자리는 단 네 개였다.

식탁 가장 끝, 상석에는 국왕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왼쪽으로 아리안의 자리가, 거기서 조금 더 떨어진 자리에 나일, 그리고 그 맞은편이 이왕자 아덴의 자리였다.

모두의 좌석은 목소리를 돋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일이 아리안을 자리로 이끌어 앉히면서 어깨를 주물렀다. 소름이 돋아 아리안은 몸서리쳤다. 흰 목 뒤에 삐죽하게 솟구친 솜털을 눈치챈 나일이 즐겁다는 듯이 그 뒷덜미를 자기 손바닥으로 덮었다.

“추운가 보군.”

아리안은 비명을 참아 냈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은 오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나일이 허리를 굽혀 아리안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도르센은 여기보다 더 춥지 않나? 응?”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는 아직도 아리안이 칼릴을 따라온 도르센 출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사제 명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리안은 목을 바짝 움츠렸다. 그는 그저 이 시간을 감내했다.

정확하게 남들 눈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만이 흐른 뒤에 나일이 허리를 펴서 아리안의 곁을 떠났다. 그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연회장은 어둑했다. 식탁 위까지 낮게 내려온 샹들리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족히 백 개는 넘을 초가 세워져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 연회장을 밝게 만들지는 못했다.

연회장 구석구석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파살리아의 그림자였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왕자가 들어왔다. 아리안은 이 고통의 장소에 그 누가 들어오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요한을 제외하고.

이왕자 아덴은 연회장으로 들어오다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아리안과 나일을 발견하고는 흠칫 멈춰 섰다. 아주 짧았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시종이 그에게로 다가가서 자리로 안내했다.

“우리 아우!”

나일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형님.”

아덴은 표정을 그다지 바꾸지 않고 나일의 인사에 답했다.

나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아덴의 어깨에 친근히 팔을 두르고는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이군. 삼 년 만인가? 응? 그렇지?”

“그렇습니다. 형님께선 여전히 강건해 보이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아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3년 만의 이왕자는 여전했다. 그는 여전히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얼굴색에 어울리지 않는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는 구부정했고 몸을 움츠리고 있어서 더 왜소해 보였다.

나일은 과도하게 친한 척을 하면서 시종을 밀어내고 자기가 직접 아덴을 자리까지 데려갔다.

“아우는 여전하군. 그런 점이 존경스럽지. 부왕께서도 널 반가워하실 거야. 물론 네가 가져온 물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러면서 나일은 자신의 농담이 대단히 재치 있기라도 했다는 양 커다랗게 소리 내서 웃었다.

“이건 그냥 인사치레 같은 거야. 내 말은, 이 만찬 말이야. 이런 게 네가 가져온 물자들에 대한 보답이 되진 않겠지. 당연히 말야. 걱정 말라구. 내가 다른 걸 준비해 놨어. 오늘은 조금 그렇고. 내일이나 그다음 날쯤. 아주 괜찮을 거야.”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파살리아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하거든. 적어도 아슬랭보다는 낫겠지. 하하! 기대하라구. 아주 근사할 테니까. 이런 고리타분한 만찬하곤 비교가 안 되지.”

“그것참 기대가 되는군요. 형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이야 뭔들 최고급이 아니겠습니까.”

아덴이 여전히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일은 그 대답이 마음이 드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 뒤에는 그의 가슴팍을 두어 번 툭툭 치고는 그를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악사가 음악을 바꿨다. 사랑에 대한 감미로운 음악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아덴을 힐끔거렸다. 당연히 그 곁에 지크는 없었다. 아슬랭 소백작. 그는 이미 죽었다. 아리안은 갈가리 찢긴 그 육신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쓴 침을 삼켰다. 지크가 떠올랐다.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가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이건 죽은 몸이에요. 잠깐의 생명을 연장해 준 대가로 몸을 빌렸을 뿐이라구요.’

하아, 아리안은 몰래 작은 한숨을 쉬었다.

지크는 잘 돌아갔을까. 그때의 타격에서 무사히 회복했을까. 제아무리 본신이 아니라 해도 신체가 찢기는 충격은 영혼에 타격을 입히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상처를 입었을지도….

나일과 아덴은 아슬랭에서 가져온 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전황에 대한 이야기도 끼어들었다. 그들은 아리안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사실 아리안은 듣는다 해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북동부의 영주들은 아직까지는 평온합니다. 속으로 재고 있겠죠. 발 빠른 자들은 곧 움직일 겁니다.”

“분위기는 어떻던가?”

“적어도 도르센에 붙지는 않을 겁니다. 올굽 평야는 방어하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요새를 짓는다던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