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3)화 (73/130)

#73

오래지 않아 곧 마차가 성으로 들어섰다. 이 마차에는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으므로 성의 가장 안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주었다. 전령이 먼저 내렸다.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했다. 마치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듯한 대우였다. 아리안은 쓸데없이 저항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리안을 데리고 곧장 국왕의 내실로 향했다.

“옷을 안 갈아입어도 되나요?”

아리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령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체 없이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아리안은 포기했다.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긴 복도는 조용했고 여느 때와 같이 어두웠다. 쥐새끼 하나 들락거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리안 자신과 한 걸음 앞의 전령뿐인 것 같았다. 아니. 저 전령마저도…. 아리안은 그녀를 의심했다. 그녀 또한 요한의 꼭두각시가 아닐까? 그러나 이제 아리안에게는 그런 것을 알아볼 만한 능력이 없었다.

전령이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에는 양각으로 신화의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아리안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이 차원, 이 행성, 이 대륙만의 신화. 하잘것없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이야기. 아리안은 거대한 그림자 마수의 목을 베는 영웅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전령이 날개 달린 뱀이 꼬리를 문 형상의 문고리를 두들겨 노크했다.

대답 대신 작은 종소리가 돌아왔다. 전령이 그 소리를 듣고는 문을 열었다. 검은 아가리 같은 어둠이 문 안쪽으로 펼쳐졌다.

전령은 허리를 굽혔다. 아리안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눅눅한 먼지에 섞여 어딘지 달착지근한 향기가 풍겼다. 거기에 쇠냄새 같은 비릿한 냄새도 났다.

아리안은 조용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고 둥근 내실이 나왔다. 이 내실은 팔각형 모양이었고 4개 면에 각각 높은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둥근 돔 천장으로부터 황금과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가 내려와 있었다. 내실을 장식한 물건들 또한 하나같이 화려하고 가격을 따지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 무엇도 아리안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한쪽 창문 아래에 금 팔걸이가 붙은 녹색 의자가 놓여 있었고 요한은 거기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젊었다. 국왕의 얼굴은 쉰 살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더 적게 잡는다면 마흔 살로도 충분히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검어졌고 어깨는 벌어졌으며 가슴팍은 단단해졌다. 그는 홀로 시간을 거스르는 것 같았다.

아리안은 얼굴을 굳혔다.

요한이 벌떡 일어섰다. 그가 양팔을 벌리며 아리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그는 더 이상 지팡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거. 우리 신관이 드디어 왔군.”

아리안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요한은 아리안에게서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가 머리를 기울여 아리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마치 동물원의 사자를 관람하듯 아리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흠.”

그가 손으로 턱을 더듬었다. 수염 자국이 남은 각진 턱은 이제 수프나 미음 외에도 질긴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것은 아리안에게 경외심보다는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좀 씻어야겠군.”

그 뒤에 요한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옷도 갈아입고.”

아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난 갈아입겠다고 했어.”

“아! 그래? 미안하군. 내 전령은 충성스럽거든. 조금 과하게.”

“됐어.”

아리안은 용기를 끌어모아서 대꾸했다.

“왜 불렀는지나 말해.”

아무튼 아리안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파살리아의 국왕이었다. 그 안에 들어앉은 것이 비록 미쳐 버린 이전 시대의 신이라고는 해도.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밤에 만찬이 있어.”

아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전에 요한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거창한 건 아냐. 조촐한 자리지. 아주….”

그가 잠시 조용해졌다.

몸을 돌리더니 탁자로 저벅저벅 걸어가 주전자를 기울여 술을 따랐다. 거기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리안은 그 술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아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흠.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이거든.”

“가족들이라고?”

아리안은 무심결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요한이 붉어진 입술로 히죽 웃고 있었다.

“아. 다 모이는 건 아냐. 짐의… 둘째 아들이 올 거야. 곧 도착하겠지. 벌써 도착했을 수도 있겠고. 아무튼. 아주 기특하게도, 보급품을 잔뜩 이고 왔으니 안 들여보내 줄 수가 있나.”

그가 히죽거리면서 잔을 입가로 가져가 그 정체불명의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특한 아들이지. 소에, 양에, 밀, 온갖 향신료… 아슬랭의 바닥의 바닥까지 득득 긁어모아 온 게 아닌가 싶다니까.”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요한이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아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에게서는 조금 전의 독주의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리안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보다 요한이 더 빨랐다. 그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리안은 그 눈을 마주 쏘아 보았다. 짧은 눈싸움은 요한이 씩 웃으면서 끝났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군.”

이는 탈출을 의미했다.

아리안은 이미 여러 번 파살리아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물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봐. 벌써 삼 년째라구.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요한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려 벌렸다. 아리안은 고개를 일부러 빳빳하게 든 채로 대꾸했다.

“삼 년은 아무것도 아니야.”

“흠. 맞아. 그래. 삼 년은 아무것도 아니지. 근데 너한텐 이제 아닐 텐데?”

그가 아리안의 몸을 건조하게 훑으며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아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요한이 낄낄거리면서 마치 장난감을 찌르듯이 검지로 아리안의 어깨와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아리안이 휘청 뒷걸음질 쳤다.

“아니지, 아니지. 삼 년은 이제 네게 아주 긴 시간이야. 너한텐 이제 한 줌 모래알만치도 안 되는 시간만 남아 있는걸. 그 예쁜 얼굴도 눈 깜빡하는 사이에 쪼글쪼글 쭈그러들어서… 아. 안타까운 일이야.”

그러면서 그가 눈을 찡긋하고는 한 걸음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 그 젊음을 즐겨야지. 예쁘게 차려입으라고. 만찬에서 네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거든.”

아리안의 얼굴이 이번에는 일그러졌다.

“나 안 가!”

“아니, 넌 올 거야.”

“싫어!”

최근 3년은 싫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3년이었다. 그리고 그 싫다는 말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 3년이기도 했다.

요한이 설렁줄을 당겨 시종들을 불렀다.

시종들이 무언으로 아리안을 압박했다. 힘으로 저항한 적도 있었지만 더 심한 꼴을 당했을 뿐이었다. 결국 아리안은 그들을 따라 힘없는 발길을 옮겨 놓았다.

이미 목욕 준비가 되어 있었다. 향료를 푼 뜨거운 물과 갖가지 기름, 빗, 손톱깎이와 면도칼 같은 것이 욕조 옆에 놓여 있었다.

아리안은 허름한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곧 시종들이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이 짓거리도 이미 익숙해졌다. 아리안은 그들이 피부의 각질을 벗겨 내고 얼굴을 미용수로 닦아 내고 머리카락에 향유를 바르는 고난을 견뎌 냈다.

그 짓이 끝난 뒤에는 옷이 대령되었다. 긴 튜닉은 부드러운 비단으로 된 값비싼 것이었고 아리안의 붉은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녹색이었다. 소매는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으며 금색 자수가 놓여 있었다. 금사를 꼬아 만든 허리띠가 함께 나왔다. 그 뒤에 아리안은 마찬가지로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끝이 둥그런 비단신을 신었다. 그것은 너무 부드러워서 대리석이나 카펫 위가 아닌 곳은 밟을 수조차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시종 한 명이 그의 머리카락을 빗겼다. 끊임없이 빗었다. 구불거리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끝이 매끄럽게 찰랑댈 때가 되어서야 빗질이 멎었다. 다른 누군가가 그의 손등에 향수를 발랐다. 손톱 끝까지 정돈하고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

그가 앉은 자리 앞에 긴 거울이 있었으므로 아리안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울에는 스무 살 정도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아리안은 거울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놀랄 일도 아니건만 그는 자신의 성장을, 즉 필멸성을 알아차릴 때마다 놀라곤 했다. 그는 키가 조금 더 컸고 살이 빠졌다. 볼살이 빠져 턱선이 드러나며 앳된 티를 벗고 성숙해졌다.

“아름다우십니다.”

시종 중 하나가 무심결에 찬탄하듯이 속삭였다.

아리안은 곧장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얹은 자신의 손이 보였다. 길쭉한 손가락….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태양이 하나 더 떨어지며 더위가 물러난 날씨였으므로 시종들은 그에게 얇은 망토를 가져왔다. 사실 보온의 역할보다는 장식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그것은 속이 비칠 정도로 얇았고 반질거리는 광채가 맴도는 투명한 은색이었으며 발뒤꿈치 뒤로 질질 끌릴 정도로 길었다. 아리안은 이 값비싼 비단으로 온 바닥을 쓸며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나 이 성에서 오로지 아리안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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