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2)화 (72/130)

#72

칼릴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메데이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양 볼에 보조개가 깊숙하게 패일 정도로 까르륵 웃었다.

“너 혹시 이졸데가 마셨던 묘약에 대해 알아?”

“들어는 봤지.”

“하긴 그렇겠지. 아일랜드의 여왕이 만든 사랑의 묘약. 그걸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어?”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면서 반대로 동공이 반짝거렸다.

“그걸 마셨구나, 칼릴.”

“하.”

그제야 칼릴은 기가 찬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메데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의심 가는 데 없어?”

이번에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내게?”

그것은 거의 혼잣말이었지만 메데이아는 그 질문을 알아들었다.

“왜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예언이 있잖아, 재앙의 왼쪽 어깨. 널 묶어 두려는 거지. 너 정도의 초고밀도체를 영원히 추방해 둘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아.”

메데이아가 시를 읊듯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우스조차 프로메테우스를 영원히 묶어 두진 못했고, 솔로몬의 레게메톤도 결국에는 끝장났으며, 펜리르를 묶은 글레이프니르도 마지막 순간에는 끊어졌지.”

그녀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텅 빈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아, 짚이는 데가 있나 보군. 맙소사. 제2의 삼손이, 트리스탄이 여기 있었군.”

메데이아가 비웃듯이 지껄였다. 칼릴은 화내는 대신 조용히 물었다.

“해독약이 있나?”

“그런 게 있었다면 이졸데가 그렇게 뒤지진 않았겠지.”

메데이아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릴은 자신의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침묵이 일 분 정도 되자 메데이아가 지겹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약을 만들어 먹인 자를 찾아봐. 그자가 해독약을 따로 만들어 두었는지도 모르지. 그 누구도 차원 마수와 영원히 사랑에 빠져 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침묵하던 칼릴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날 돕는 이유가 뭐지? 너와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 네가 공회와 사이가 안 좋지만 날 도울 만큼은 아니라는 걸 안다. 네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아, 의심의 씨앗. 너희 족속들의 미덕이지. 존중해.”

메데이아가 웃었다.

“하지만 오해 마. 이건 날 위해서야. 널 위해서가 아니라구, 칼릴. 물론 믿든 안 믿든 그건 네게 달렸지만.”

그리고 그녀는 허리를 굽혀 아주 정중하고 완벽한 파살리아 궁정 식으로 인사해 보였다. 그건 조롱처럼 느껴졌다. 칼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만 물러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전하. 제 얕은 지식이 대공 전하께 도움이 되었기를.”

그는 그 비웃음 가득한 작별 인사를 무시했다.

메데이아가 알현실을 떠났다. 뒤를 이어 들어온 오스발이 옥좌 가까이로 다가와 칼릴에게 물었다.

“저 여자를 잡아 둘까요?”

칼릴은 고개를 저었다. 오스발이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칼릴을 바라보았다. 칼릴은 몸을 일으키며 짧게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저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주요?”

“그래.”

오스발의 눈이 커졌다.

“신관을 빨리 찾아야 해, 오스발.”

칼릴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삼 년 전. 아마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 정도 되는 상위 개체가 죽었다면 단순히 차원 하나둘 정도가 흔들리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롭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결국에는 달리듯이 바뀌었다.

쿵!

침실 문이 닫혔다. 칼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흉곽이 들썩이고 식은땀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메데이아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독사의 혀를 가진 마녀. 자기 사랑을 위해 동생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바다에 뿌린 미친년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성급했던 것도 사실이야.’

칼릴은 초조하게 침실을 빙빙 맴돌았다.

‘그때….’

그의 기억이 삼 년 전 파살리아에서의 그 밤을 헤맸다.

그는 그날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일의 용병들은 진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르바의 군대는 퀸트 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닛사와 오스발은 그 두 군대가 움직여 퀸트 관문을 차지하기 전에 당장 파살리아를 떠나 도르센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수십 번 충언을 올렸다. 그러나 칼릴은 그러지 않았다.

칼릴은 도박을 했다.

그는 아리안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데에 패를 걸었다.

아리안이 언제 추락했는지도 모를 찌꺼기 미치광이와도, 전(前) 신전 기사단의 일원인 그 용 살해자와도, 그리고 공회와도 아무 관계도 없다는 데에 판돈을 전부 걸고 도박의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화형이 집행될 아침까지 아무도 아리안을 구하지 않았다면 칼릴은 그를 구해 함께 도르센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칼릴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 신중했어야 했어.’

칼릴은 메데이아의 말을 돌이켰다.

‘아무튼 나는 그 애의 치료약을 먹었….’

그 애라니. 그것은 겉모습만큼의 소년도 아니고 심지어 그가 칼릴에게 먹인 것은 치료약도 아니다.

그것은 독약이었다.

칼릴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침대맡의 탁자에 부르조가 두고 간 수면제가 있었지만 그는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찾아야 해.’

또다시 찾아온 익숙한 불면 속에서 그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다시 찾아서 물어봐야 해. 내게 무슨 약을 먹였던 거냐고. 내게 무슨 짓을….’

기절과도 같은 짧은 잠이 그를 덮쳤다. 불과 십 분이나 될까 말까 한 그 짧은 수면 속에서 그는 환상을 보았는데, 흰 손이 나왔다. 흰 손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가, 내가 구하러 갈게.’

소년이 속삭였다.

‘기다려.’

***

국왕의 전령이 왔을 때 아리안은 신전 정원에서 갈퀴로 잡초를 긁어모아 태우고 있었다. 흙이 뭉쳐 젖은 풀이 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불은 자꾸만 꺼지려 했고 아리안은 거기에 다시 불을 붙이느라 제법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가 땀과 재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국왕의 전령이 정원까지 들어왔다. 이미 안면을 익힌 사이라 아리안은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불안하게 얼굴을 굳혔다.

전령은 군청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하늘하늘한 금빛 베일을 망토처럼 길게 두른 호화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녀는 최근의 파살리아 유행대로 가슴 밑을 보석 끈으로 조인 뒤, 위쪽이 트인 긴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에 여러 가지 가느다란 팔찌를 수십 개 걸고 있었다. 전령이 걸을 때마다 차랑차랑하는 소리가 울렸고 그는 아리안에게 3년 전, 나이 든 마법사를 떠올리게 했다.

아리안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엉거주춤 허리를 펴고 섰다. 전령이 그의 앞에 섰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아리안은 그녀가 웃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국왕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요?”

“예.”

전령이 대답했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함께 돌아가시죠.”

아리안은 손가락을 꼬면서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땀으로 젖어 있었다. 머리는 새집이나 다름없었다.

전령은 마치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가시죠.”

그녀가 한쪽 팔을 우아하게 벌려 보였다. 아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이두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는 둥그런 호박 모양이었고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이 쇠락한 신전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지경으로 화려했다.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마부조차 아리안보다 깨끗하고 정돈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자신의 옷에 묻은 재가 떨어져 마차를 더럽힐까 봐 잠시 머뭇거렸으나 뒤에서 전령이 재촉하는 바람에 얼결에 올라타고 말았다.

전령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국왕이, 정확히는 요한이 왜 자신을 부르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전 여러 번의 경험으로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관두었다.

그는 대신 커튼을 살짝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넓게 정비된 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마차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마부가 말고삐를 당겨 쥐었다.

아리안은 먼 성벽 밖에 펼쳐진 밀밭을 내려다보았다. 추수철이 가까워 그 밀밭은 부드러운 노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어둑하게 떨어지는 석양 아래로 일개미 같은 농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까이, 성벽을 둘러싼 아름다운 가문비나무 숲과 완만한 녹지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파살리아는 완벽하게 자급이 가능한 도시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더 이상 아니었다. 고대의 전장이 파살리아에서 서쪽 도르센과 남쪽 코르키라로 옮겨 가면서 파살리아의 왕들은 농지를 갈아엎어 아름다운 정원과 사냥터를 만들었다.

대신 부유한 비스키우스와 비옥한 올굽 평원이 파살리아의 젖줄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그랬다.

아리안은 조용히 커튼을 도로 닫았다. 소리 없이 메말라가는 도시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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