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1)화 (71/130)

#71

부르조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익숙한 약병과 고블릿 컵이 놓여 있었다.

“닛사 경과 의논해서 처방을 조금 바꿨습니다. 전보다 더 주무시기 편할 겁니다.”

부르조가 그렇게 말하면서 길쭉하고 조그마한 은 숟가락을 약병 안으로 넣어 한 숟갈을 떠냈다. 시럽처럼 걸쭉한 약제가 숟가락에 걸려 올라왔다. 부르조는 그것을 은 컵에 넣고 뜨거운 포도주와 물을 부어 희석시켰다.

칼릴은 그 익숙한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이미 잠옷 차림이었다. 얇고 편안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위에 긴 비단 가운을 걸쳤을 뿐이었다. 그의 눈 밑은 약간 거뭇했지만 얼굴에 졸음의 기색은 없었다. 광대와 턱선이 날렵하게 도드라지는 얼굴은 약간 수척했고 그것이 도리어 위험천만한 매력을 더했다.

물론 부르조는 주군의 미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걱정할 뿐이었다.

“오늘 밤에는 곳간의 쥐새끼들도 죄다 잠을 잘 겁니다. 올굽에서 온 수레가 수백 대는 족히 되지 않습니까? 순무튀김이나 감자수프가 아닌 걸 맛본 놈들 눈이 희번득해서는… 큼큼. 아무튼 오늘 밤은 조용할 겁니다. 길가의 거지새끼조차 배 터지게 빵을 먹었으니까요.”

“오스발에게서는 별다른 말은 없고?”

“오스발 녀석이요?”

부르조가 은 숟가락으로 바쁘게 잔을 젓다 말고 눈을 껌뻑였다.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따로 명령을 내리신 게 있습니까?”

“아니다.”

칼릴이 고개를 저었다.

부르조가 조심스레 쟁반에 받쳐 든 컵을 그에게 바쳤다.

칼릴이 컵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침실 밖에서 다소 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이든 노인은 귀가 어두워 그것을 듣지 못했고, 칼릴만이 들었다. 부르조는 그 걸음 소리가 침실 문 밖에 멈춰 섰을 때서야 다른 방문객을 알아차렸다. 칼릴이 집어 들었던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대공 전하.”

바깥에서 노크 대신 나지막한 부름이 들려왔다. 오스발이었다. 부르조가 몸을 돌렸다.

“들어와라.”

칼릴이 가운의 허리끈을 묶으면서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스발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직까지 부츠를 신고 검을 차고 있었다. 망토는 없었지만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가죽 튜닉에 벨트까지 모두 차려입은 차림새였다. 부츠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는데 마치 어딘가에서 바쁘게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꼴이었다.

“전하.”

오스발은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실제로 망설이지는 않았다.

“전하께 알현을 청하는 자가 있습니다.”

칼릴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그 곁에 아직까지 쟁반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던 부르조가 “이 시간에?” 하고 불만스럽게 혼잣말했다.

“내가 아는 자냐?”

칼릴은 알 수 없는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쉴 뻔했다. 그는 몸을 비스듬하게 옆으로 돌려 다시 부르조의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알현은 내일 아침이다.”

“하지만 그 자가 전하께서 찾는 자를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칼릴의 손이 멈칫했다.

“…온 왕국에 내가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퍼졌나 보군.”

그가 빈정거리는 투로 지껄이고는 컵 끝에 멈춰 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짧은 침묵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자냐?”

“여자였습니다. 젊고…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만나 보겠다. 알현실로 데려와라.”

“예.”

오스발이 물러났다.

칼릴이 가운을 벗어 흘리듯이 내던지고는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르조가 눈치 빠르게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고 대신 그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었다.

칼릴은 마지막으로 칼을 차고는 침실을 나왔다.

한밤중의 알현실은 고요했다. 칼릴은 옥좌에 올라가 앉았다.

다섯 개 계단 아래에 오스발이 서 있었고 거기서 두 발자국쯤 뒤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지 않았다. 특징 없는 회색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차림이었다.

“후드를 벗어라.”

칼릴이 명령하자 여자가 양손으로 후드를 벗었다.

검은 머리 타래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여자는 스무 살쯤 된 것 같았고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미모는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감흥을 준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여자를 알았다. 그의 푸른 눈에 반지르르한 이채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여자가 빙긋 웃으며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대공 전하께서 주술사를 찾으신다지요?”

오스발이 그녀에게 무례하다고 외치려던 차, 칼릴이 그를 제지했다.

“오스발. 나가 봐라. 이 여자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전하.”

오스발이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체를 모르는 자입니다.”

“아니다. 아는 자야.”

그리고서 칼릴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옥좌 팔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대화가 길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긴 얘기를 할 사이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다면 부르십시오.”

“네가 걱정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

오스발이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 물러났다.

알현실에 둘만 남았다.

벽에 걸린 램프 불빛이 흔들려서 긴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 두 개가 기둥과 벽 사이에 커다랗게 너울거렸다. 둘 다 너무 커서 형태는 알아볼 수 없었다.

여자가 눈을 들었다. 칼릴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이런 것도 색다르네.”

여자가 칼릴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밑에서 널 올려다보는 거 말야.”

그러면서 그녀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런 것도 좀 우습고. 내 말은. 이거 전체 말이야. 대공 작위, 성, 옥좌, 전쟁, 전부.”

“나한텐 자연스러운데.”

칼릴이 대꾸했다.

“너희하고 달리 우린 이런 게 익숙하니까.”

“차원들을 돌아다니면서 역할 놀이 하는 거? 난 그렇잖아도 전부터 악취미라고 생각하긴 했어.”

“너흰 항상 그렇지. 우리가 하는 게 뭔들 너희에게 악취미로 안 보일까.”

칼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그 질문에 메데이아가 빙긋 웃었다.

“나한테 물어볼 게 있지 않아?”

“내가? 너에게?”

칼릴이 우습다는 듯이 반문했고, 메데이아는 대답 대신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고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어느 쪽이든 매력적이었다. 칼릴에게는 그저 살과 피의 집합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대공 전하께서 사람을 하나 찾는다는 소문이 우리 떠돌이들 사이에 퍼져 있사옵니다.”

그녀가 비꼬는 듯한 존댓말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제법 커서 알현실 바깥의 기사들, 그리고 오스발에게까지 들렸을 것이었다.

옥좌에 앉은 칼릴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메데이아는 높은 자들(이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부르는 단어로, 칼릴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이에서도 이름 높은 주술사였다. 독사의 혀를 지닌 여자이기도 했으며 잔인하기도 했다. 쉽사리 믿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글쎄.”

칼릴이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과연?”

메데이아가 검지를 턱으로 가져가며 애교 있게 머리를 갸우뚱 기울여 보였다.

“상처가 다 나았나 봐?”

그녀의 검은 눈이 반질거렸다.

“내가 보기엔 안 그런 거 같은데.”

그녀 정도 되는 자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칼릴은 그녀를 속이려는 쓸데없는 노력 대신 무감흥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지?”

“어머. 무슨 상관이라니? 내가 널 도와줄 수도 있잖아. 궁금한 게 많을 텐데.”

“궁금하다면 순순히 대답이라도 해 줄 생각인가?”

“물론이야.”

그녀가 생긋 웃었다. 이는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칼릴의 무표정이 살짝 변했다.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가며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독사의 혀를 가진 마녀. 네가 날 돕겠다고?”

“왜 못 도와? 나도 공회 싫어해. 너도 알잖아.”

“그래 봤자 너도 그들 중 하나지.”

“내 자리가 거기 있는 건 사실인데,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거기 앉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어디 보자. 포에니 전쟁 때 마지막으로 한번 앉아 봤던가?”

그 뒤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정말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그녀의 눈이 칼릴을 더듬었다. 음탕한 시선은 아니었다.

“저주나… 주술이나… 그것도 아니라면 네 상처에 대해서라도.”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릴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수면 부족 탓에 의심과 억제를 담당하는 두뇌의 부분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것이 분명하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메데이아와 말을 주고받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수면 부족이 그를 충동질했다.

“저주에 대해 잘 아나?”

“저주라.”

그녀가 짐짓 점잖은 태도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거야말로 내 전공이지.”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허리를 번쩍 세우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네게 걸린 건 저주라 하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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