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0)화 (70/130)

#70

아무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신체에 남은 상처를 모두 치료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전쟁에 몰두하는 것쯤이야 별로 성가신 일도 아니었다.

“후우.”

그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다시 기러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스발의 말대로 기러기 사냥이라도 나가야 하는 것일까.

충성스러운 가신의 마음을 이해한다. 뭐라도 해서 기분 전환을 시켜 주고 싶었겠지. 철 이른 기러기 사냥 이야기도 그 맥락이리라.

그러나 도무지 새 대가리들을 쫓아다니면서 활을 쏘아 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칼릴은 다시 생각의 방향을 애써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올굽 평원은 왕국의 곡창지대 중 하나였고 거길 차지한 것은 이번 내전에서 도르센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지난 2년 동안은 전쟁 탓에 별다른 수확을 기대하지 못했으나 올해 농번기에는 큰 전투가 드물었던 덕분에 수확량이 제법 될 예정이었다. 닛사는 상당히 세부적인 예측치를 서신에 동봉했는데 칼릴은 그 숫자들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굴렸다.

그러나 그 숫자들은 몇 번 반복적으로 떠오르다가 흐릿하게 뭉개져 버렸다. 칼릴의 머릿속도 따라서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깊은 잠을 잔 것이 언제던가.

전쟁의 첫 2년은 전투로 점철되어 수면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저 시간이 나면 잠을 청할 뿐이었다. 깊은 잠 같은 것은 사치였다.

3년 전, 다급하게 퀸트 관문을 빠져나오며 마찰이 있었다. 매복해 있던 아르바의 군대가 그를 덮쳤고 뒤에서는 나일의 용병들이 추격해 왔다. 그들을 따돌리고 도르센으로 돌아오자마자 전쟁 준비를 해야 했다.

본격적인 열전. 그런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은 아마 이라크에서였지…. 그는 그때의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최첨단 살인 무기들의 차가운 감촉을 동시에 떠올렸다.

몽롱한 피로가 함께 밀려왔다. 그는 깜빡 잠에 떨어졌다. 오래 잠들지는 않았다.

그는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한 감촉에 놀라 퍼뜩 눈을 떴다. 졸음이 뇌를 잠식해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느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었다.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칼릴은 혼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잠들었었고 이곳은 도르센,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드리워진 빛줄기의 각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십 분조차 되지 않은 짧은 백일몽이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참았다. 무의미하게 분노를 터트려 봤자 무엇이 변하겠는가. 그리고 실은 어디에 분노를 터트려야 하는지도 모호했다.

칼릴은 의자에서 내려왔다.

탁자 위에 술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거의 희석시키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각지에서 날아온 수십 장의 보고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빙자한 회합은 제법 화기애애했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비둘기 구이와 새끼양 튀김이 담긴 접시가 거의 비었을 때는 중요한 사안들은 거의 다 결정된 뒤였다.

칼릴은 냉정한 군주였으나 필요 이상으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수많은 전쟁을 함께 겪어 온 전우였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기도 했다. 어떤 자들은 그를 존경했고 어떤 자들은 그를 거의 흠모했다. 부르조가 특히 그랬다. 어느 쪽이든, 모두 그를 신뢰했다.

그 신뢰에는 맹목적인 데가 있었다. 국왕의 막내 왕자가 처음 도르센에 왔을 때 그는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병약한 꼬맹이였다. 열병에서 갓 회복한 열여섯 살 대공이 직접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섰을 때 도르센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칼릴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수백 번의 전쟁에 빠짐없이 참전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이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전쟁 또한.

그들은 이제 대공이 아니라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칼릴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승리를 위하여.”

그 자리의 모두가 빠짐없이 함께 술잔을 들었다.

술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시종들이 음식과 술을 계속해서 날라 왔다.

파살리아의 연회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독한 술과 기름진 고기가 모두 있었다. 도르센 사람들은 흥겨움을 모르는 인종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즐거움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악사가 들어왔다. 악사는 올굽 전투의 승리를 찬양하는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칼릴은 일부러 만취할 정도로 독주를 들이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것이 언제인지를 돌이키다가 관두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술기운에 취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칼릴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약간 비틀댔다. 오스발이 그를 부축했다.

“술이 과하셨습니다.”

“알아….”

칼릴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대꾸했다. 오스발 또한 술이 오른 채였다.

두 전우이자 주종은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팔다리를 뻗고 드러누운 칼릴을 오스발이 곁눈질했다. 그는 약간 흔들리는 손으로 주석 물병에 담긴 물의 양을 확인했다.

“여자를 부를까요?”

오스발이 칼릴에게 물었다.

“아르테아가 와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창녀의 이름을 언급했다. 칼릴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필요 없어.”

“그럼….”

오스발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럼 남자를 부를까요?”

이번에는 칼릴이 눈을 떴다.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저벅저벅 오스발 쪽으로 걸어와 물병을 낚아챘다.

“나가, 오스발.”

그가 명령했다. 오스발은 나가지 않았다.

“욕구 불만이실 겁니다. 아르테아를 불러오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남창들이라도….”

“나가.”

칼릴이 다시 한번 명령했다. 이번에는 오스발도 버티지 않았다.

“쉬십시오.”

오스발이 그렇게 인사하고 침실을 떠나갔다. 침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칼릴은 물병을 들어 올려 들이켰다. 물방울이 강인한 턱에 맺혔다가 굵은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그것을 소매로 닦아 냈다.

술기운이 달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둠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의심이 그의 다차원 두뇌를 꿰뚫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마지막으로 그람에 찔렸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상처는 모두 아물었으나 그 일그러진 흉터만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신체가 아직 필멸임을 의미했다.

칼릴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침실을 몇 바퀴 맴돌았다.

어떤 치명상은 회복하는 데에 수십 년, 때로는 수 세기, 어쩌면 그 수만 배나 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의 불멸성, 권능, 그리고 기억마저 앗아 가 버린 신전 기사단의 일격.

처음 칼릴은 차분히 인내심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는 인내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불면이 그의 인내심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심지는 매우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약….’

칼릴의 생각이 드디어 거기에 닿았다. 그는 오른손을 한 번 주먹 쥐었다 펼쳤다. 촘촘한 손금이 이어진 울퉁불퉁한 손바닥에 경련이 일었다.

기억과 함께 되돌아오는 권능은 부작용을 동반했다. 극심한 불면증에 더불어 이유 없는 초조함, 강박증, 두통, 상처 입은 자리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작열통. 권능은 그의 일부분이었으나 지금만은 마치 맞지 않는 팔다리를 잘라다 붙인 것처럼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아리안의 약은 대체 어떤 약이었을까? 정말 제대로 된 약이었을까? 무슨 원리로 그의 상처를 치료했을까? 무슨 원리로 이 고통을 지웠을까?

수면 부족과 두통이 생각의 방향을 부정적인 쪽으로 이끌었다.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그 어떤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치료를 멈춘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약 덕택이었는지, 아니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약 때문인지.

그에게 마약이라도 먹였단 말인가? 그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이 구석 차원에 영원히 처박아둘 심산이었다고? 그야말로 완벽하게 공회가 꾸밀 법한 일이 아닌가!

칼릴의 눈빛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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