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히야아아아. 역시 이렇군. 그래. 뭐어.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쥐들이 후다닥 달아났다.
“인간을 사랑한 끝이란 거 말이야. 배신! 절망! 피로 얼룩진 새드 엔딩!”
양팔을 연극적으로 치켜든 궁정 마법사가 천천히 아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텅 빈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가 쓰러진 아리안 앞에 쪼그리고 앉고는 시선을 맞췄다. 그 양 입꼬리가 갑작스레 히죽 찢어져 올라갔다.
“근데에, 이건 내 예상하고는 완전 다르잖아?”
아리안은 간신히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궁정 마법사가 피 고인 바닥에 양손을 철퍼덕 누르며 몸을 깊게 숙여 아리안과 시선을 맞췄다.
“난 진짜 몰랐거든.”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그게 차원 마수일 줄은 말이야.”
아리안의 몸이 움찔 굳어졌다.
“아주 깜찍하게 날 속였어. 아니, 아니지. 내가 멍청했지. 설마 그걸 못 알아보다니…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이건 불행일까? 행운일까? 아니, 아니지! 나에게 달렸어! 언제나 그렇듯이!”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복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그런 차원 마수가, 고질량이, 다차원 신체… 아!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차원의 개수를 계산해 낼 수만 있다만, 산출량이, 그때의 에너지가… 그걸 감당할 매개만 있다면!”
광기 어린 혼잣말을 미친 듯이 쏟아 내던 그가 아리안을 휙 돌아보았다. 번쩍이는 회색 눈이 아리안에게 꽂혔다. 입술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가 피에 젖은 한 손을 가슴팍에 얹었다.
“이봐아. 이렇게 됐으니 통성명이나 하지.”
그리고는 아리안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넌 아리안이지? 널 알아. 들어 봤어… 빛나는 자, 천상의 옥좌에 앉은 신들 중 하나, 선과 질서의 안내자, 뭐 어쩌고저쩌고 기타 등등. 아무튼 좋은 건 대충 갖다 붙이면 네 이름 중 하나는 되지 않겠어?”
그가 빙긋 웃었다.
“그에 비해 내 이름은 훨씬 더 간단하지. 묵시록의 요한. 아. 물론 그걸 내가 썼다는 말은 아니야. 그게 쓰인 순간부터… 난… 내 이름을 요한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
그리고 그 순간 아리안은 궁정 마법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묵시록의 요한.
이것은 공회가 그토록이나 피하고자 했던 재앙이었다.
<6> 밀월
무르익은 여름이었다.
내전도 3년째였다.
왕국에서 내전은 흔치도, 그렇다고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림자 마수라는 공통의 적이 융성할 때 왕국은 하나로 뭉쳤다. 그 반대일 때는 뿔뿔이 갈라져 서로 싸웠다. 왕국은 언제나 피폐했다. 사람들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전쟁에 익숙했다.
이 내전은 지루하게 길었다.
그와 반대로 이왕녀와 일왕자의 동맹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3년 전 그들이 퀸트 관문에서 도르센 대공을 놓친 이후로 전황은 뒤집혔다. 도르센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단 반년 만에 중부의 올굽 평원에 이르렀다. 때는 초가을, 농번기였다. 평원은 황금빛이 아니라 핏빛으로 물들었다. 대패한 동맹군은 동쪽의 엘테아까지 퇴각했다. 도르센의 기마대는 엘테아를 에워싼 오브강의 맞은편에서 다음 계절이 올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태양이 모두 떨어지고 극야가 왔다가 다시 봄이 돌아왔다. 전투가 재개되었다.
오브강이 핏빛으로 물드는 격렬한 전투가 다섯 번 있었다. 일왕자는 결국 엘테아를 빼앗겼고 달아나는 일왕자를 다급히 달려온 이왕녀가 간신히 구출했다.
타고나길 전사로 타고난 왕녀와 전형적인 파살리아 귀족다운 왕자 사이에 전쟁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 동맹은 와해되었으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일왕자는 장마철을 이용하여 군대를 이끌고 파살리아로 달아났다. 그리고 퀸트 관문을 걸어 닫아 기나긴 농성에 돌입했다. 왕녀는 분개했으나 그녀에게는 당장 엘테아에 주둔한 대공이라는 눈앞의 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계책을 짜내 도르센의 보급선을 끊었고 도르센 군대는 엘테아를 포기하고 다시 오브강 너머까지 퇴각했다. 두 군대의 경계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바뀌었다가, 다시금 극야가 찾아오며 모든 것이 소강되었다.
봄이 오자 대공은 군대를 올굽 평원까지 후퇴시켰다. 지루한 대치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금, 칼릴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영글은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나무가 보였다. 농익은 포도 향기가 창문을 넘어 방 안까지 넘실거렸다. 방의 커다란 대리석 탁자 위에도 포도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도르센의 가문 기후는 북부 포도 품종을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포도알은 작았으나 더 달았으며 이른 서리가 내려 채 떨어지지 못한 포도를 덮으면 그 과육은 서리 밑에서 더욱 달콤하게 익어 갔다.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멀리서 기러기 소리가 들렸다.
“사냥을 나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스발이 물었다. 칼릴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슬슬 기러기들이 살찔 때인데요.”
오스발의 말대로였다. 겨울이 오면 남하하는 기러기 무리들이 한창 살을 찌울 시기였다. 이 시기 도르센 귀족들은 기러기 사냥을 즐기곤 했다. 그것은 파살리아의 사냥과 달리 유흥이라기보다는 식량 수급을 위한 노동에 가까웠다.
칼릴은 대답 대신 벽에 걸린 자신의 활을 바라보았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손질한 활은 손때를 타 표면이 반질거렸다.
“아직은 이르지.”
대신 대답한 것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부르조였다. 회색 수염을 성기게 기른 노인이 포도주 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열흘만 더 기다리게. 지금은 아직 철이 일러. 기러기들이 제대로 투실투실 살이 오르려면 더 남았네.”
오스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올겨울은 제법 풍족할 게야.”
부르조가 이번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엔 올굽 평야에서 제법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아니 그렇사옵니까, 전하.”
그가 칼릴을 쳐다보았고, 칼릴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그는 올굽의 닛사에게서 온 서신에 불을 붙여 태워 없앴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오기 전에 보급선을 정비하고 군량 분배 문제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오스발이 말했다.
“그래.”
칼릴은 이번에는 소리 내서 대답했다. 그가 손에 쥔 촛대를 불어 끈 뒤에 그것을 탁자 끝에 내려놓았다.
“군대를 재정비할 때가 되긴 했지. 올굽의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토성에 언제까지 군대를 놔둘 순 없어.”
“그럼 엘테아를 다시 손에 넣어야겠군요.”
오스발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엘테아를 손에 넣는다면 남부의 병력을 바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 파살리아로 통하는 길도 뚫리죠. 더군다나 엘테아는 오브강의 수원을 끼고 있고 올굽에서 수로를 통해 보급을 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얘기하지. 부르조, 자네도 참석하도록 해.”
칼릴의 차분한 목소리에 오스발과 부르조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칼릴의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마자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들은 조금 걸어서 주군의 방에서 멀어졌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부르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저리 기운이 없으시단 말이냐. 왕녀의 배신이 그토록이나 마음에 걸리셨던가?”
“아니요….”
오스발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보다는….”
그는 파살리아에서의 칼릴을 떠올렸다. 활력과 생기가 넘치던 그 모습을.
“뭐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요.”
그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부르조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어허, 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스스로의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쳤다.
“가만.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께서 영 맥을 못 추신 게 파살리아에서 돌아오신 이후부터… 네놈, 뭔가 알고 있는 게지? 어서 털어놔라! 털어놓으라고!”
부르조가 퉁퉁한 손을 뻗어 훤칠한 기사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했다. 오스발은 그 손을 피해 재빨리 달아났다.
***
두 가신이 나간 뒤 칼릴은 아예 발을 의자 위에 올리고 등을 길게 기댔다. 몸이 무거웠다.
열린 창문 틈으로 황금빛 햇살이 들어와 그의 발치에 빗금을 그었다.
그는 억지로 뇌를 굴리려 했다. 닛사가 올굽에서 보내온 서신, 서신 위의 숫자들, 배급량, 군대를 어떻게 분할해야 할지, 보급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할 것들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 몹시 익숙한 일이었다.
한때 그는 이런 것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문명이 다섯 번 정도 저물 시간 동안 여러 개의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전쟁의 종류를 겪어 보기도 했다. 그는 일개 병졸이기도 했고 천부장일 때도 있었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일 때도 있었다. 때때로 그는 패배한 전쟁의 승리 방법이 궁금했던 나머지 비슷한 형세를 일부러 꾸며 내 같은 상황을 수십 번 반복했던 적도 있었다.
차원과 차원 사이에서 시간은 정말로 상대적인 것이었고 그는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그 모든 것을 겪을 수 있었다.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