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지크!”
아리안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검이 지크의 왼 손목을 잘라 냈다. 늘어진 몸이 한 번 펄떡였다.
“크읏…!”
검을 들어 올린 칼릴이 머리를 살짝 갸웃했다.
“아차. 오른손잡이였지?”
같은 짓이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그 후에야 칼릴은 고개를 돌려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듯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칼릴이 그를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의 시선이 칼릴의 무표정하고 단정한 얼굴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갔다. 피를 흘리고 있는 가슴팍이 보였다. 지크가 남긴 상처였다. 비단 튜닉이 찢어져 그 부위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리안의 호흡이 더 빨라졌다. 아리안은 그 상처를 지혈하고 치료해 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지크에게 달려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회가 뭘 시켰지?”
“뭐?”
아리안은 처음에 그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다. 심장은 이제 너무 빨리 뛰어서 아플 지경이었다.
칼릴이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침착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물었다.
“공회가 네게 뭘 시켰지? 날 감시하라던가?”
“뭐?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리안의 말이 빨라졌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공회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시켰어. 여기 온 건, 내가, 내, 내가….”
“네가?”
“내가… 아, 지, 지크가….”
아리안은 이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지크에게 가서 닿았다.
그것은 이제 3차원 덩어리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뜨거운 내용물이 밑으로 쏟아져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더 이상 지크의 영혼은 거기 없었다.
칼릴이 무관심한 눈으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본신으로 돌아갔겠지.”
조금 전의 난도질을 그렇게 일축한 그가 아리안을 훑어보았다.
권능 없이 연약하기만 한 신체. 이래서야 본신을 가져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칼릴은 의문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목적이 뭐지? 나한테 접근한 목적도, 그 몸을 가지고 여기 온 이유도….”
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설마 데릴라 흉내를 내려 했던 건 아닐 테고….”
아리안이 정신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여기 온 건, 다, 당신도 알잖아. 난, 당신을 도우려고.”
“날 도와?”
“그래! 난 당신을 데리고 돌아가려고 온 거야. 재심을 청구하려고….”
“아하, 재심.”
칼릴의 얼굴에 흐릿하게나마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몇천 년간 그 누구도 통과한 적 없는 그 재심?”
“이번엔 가능성이 있어!”
아리안이 가쁘게 헐떡이면서 외쳤다.
“애초에 묵시록의 예언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그런 걸로 당신을 추방하는 건 말도 안 돼. 불공정한….”
“하하.”
건조한 웃음소리가 아리안의 말을 막았다.
칼릴이 머리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그 완벽한 입술 위에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공회가 병신 짓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새삼스럽군. 불공정? 그치들이 언제 공정한 적이 있었나?”
“아, 아냐.”
“너는.”
칼릴이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 공정한 재판을 받으라고 날 붙잡아 넘겼으면서 이제 와서 나더러 그 짓을 한 번 더 하라고?”
“부, 붙잡아다 넘겼다니….”
칼릴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리안의 흰 손에 닿았다. 그 손의 길이, 크기, 마디의 굵기와 손톱의 모양. 칼릴은 그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순간을 기억했다.
“시베닉에서 네가 날 찾아냈던 걸 기억해.”
“그건!”
칼릴은 아리안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
“난 당신을 숨기려 했어!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맞지만, 난 당신을 신전 기사단에 넘긴 게 아니라 숨기려 했던 거야!”
아리안이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칼릴은 그다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마치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리안이 숨을 가쁘게 내쉬는 소리만 울렸다.
얼마 뒤에 칼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상관없어. 네가 그때 날 찾았든 안 찾았든 어차피 신전 기사단에게 잡혔을 테니까. 널 원망하지도 않아. 그저 내가 궁금한 건….”
그가 피 묻은 칼끝으로 바닥을 탁, 탁,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초조함을 닮아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뭘 노리고 여기까지 왔지? 공회의 명령은 정확히 뭐였나?”
“아니야….”
아리안은 눈물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난 당신을 도우려고 온 거야. 말했잖아… 쾰른에서 당신이 날 먼저 구했다고. 그래서….”
“아. 쾰른.”
칼릴이 표정 없이 머리를 기울였다.
“기억 안 나는데.”
그 순간 아리안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눈물이 밑으로 굴러떨어져 턱 끝에 맺혔다가 추락했다. 투둑투둑 눈물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발치를, 손등을 적셨다.
탁, 탁, 탁, 탁, 그람 끝으로 바닥을 치는 칼릴의 손동작이 점점 빨라지다가 뚝 멎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칼릴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며 비스듬한 틈으로 오스발이 나타났다.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칼릴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보지 못했다. 그가 문간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일왕자의 군대가 퀸트 관문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르바 누님은?”
“퀸트 관문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칼릴은 배신을 암시하는 그 대답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다시 아리안에게로 떨어트렸다.
“전하. 시간이 없습니다.”
오스발이 그를 재촉했다.
퀸트 관문은 파살리아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이다. 그곳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파살리아에 들어올 수 없으며, 바꿔 말하자면 그곳을 통하지 않고는 파살리아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왕녀가 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퀸트 관문 근교에 군대를 주둔시킨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파살리아에는 일왕자의 용병들이, 그리고 퀸트 관문에 왕녀의 군대가 있다. 이제 그들이 파살리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등 뒤에 일왕자의 용병들을 두고 눈앞의 왕녀와 대치해야 한다. 그것은 위협이었고 곧 배신이었다.
“가서 준비해라. 곧 가겠다.”
“예.”
오스발이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칼릴은 아리안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모든 짓거리가 추방으로도 모자라 그를 완전히 죽여 없애려는 공회의 수작이라면 칼릴이 힘과 기억을 잃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으리라.
저 궁정 마법사조차 공회의 끄나풀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를 파살리아로 끌어들이기 위해 국왕을 조종하고 남부의 혼란을 야기하여 왕녀로 하여금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는 가설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칼릴은 약간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 무엇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고민이 끝났다. 그는 아리안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아리안이 넋이 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그렇다 치지.”
그가 조용히 그람을 들어 올렸다.
“네가 본신을 가지고 온 것도, 네 그 치료도, 전부 날 돕기 위해서였다면.”
그가 그람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피 흘리는 자신의 가슴팍을 지긋이 움켜잡았다. 차원을 가르는 명검이 그의 다차원 신체를 꿰뚫은 탓에 상처에서 피가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치료는 이걸로 할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칼끝을 아리안의 가슴팍에 지그시 눌렀다.
“아.”
아리안이 멍하니 신음을 흘렸다.
예리한 칼끝이 서서히 아리안의 겉가죽을 파고들었다. 연약한 피부, 그 아래의 부드러운 근섬유와 힘줄이 얽힌 근육층, 그리고 더 깊은 그 안으로.
고통은 없었다.
그 검은 단일 차원에 걸쳐 있는 아리안의 육신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은 채 깊숙하게 파고들어 아리안의 심저를 건드렸다.
그 날 끝이 심장 표면을 찌른 순간, 아리안은 자신의 영혼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신체에 남는 3차원 상처가 아닌, 불멸을 필멸로 만드는 상처. 그리고 그는 그 갈라진 틈으로 피가 빠져나가면서 신성이 함께 떠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릴이 찔렀던 것과 반대로 빠르게 검을 뽑아냈다.
핏방울이 튀었다.
“아….”
아리안이 힘없는 비명과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검이 성급하게 빠져나오며 남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칼릴이 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아리안은 쓰러진 채 바닥을 밟는 칼릴의 뒤꿈치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뻗으려고 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중력이 그를 누르며 몸이 빠르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추위가 그를 감쌌다. 그 추위와 무게감이 3차원적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리안은 자신이 잃은 것이 신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슬펐다. 그는 칼릴도 잃은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도에 내려앉은 어둠 구석에서 시궁쥐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피와 살점을 먹으려는 시궁쥐들이 눈을 빛냈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