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리안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리안의 온 신경이 귀로 쏠렸다. 그가 마른침을 꼴깍 삼킨 순간 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들렸다. 철컹, 철컹, 문의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녹슨 열쇠를 돌리며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 아리안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기 서 있는 것이 칼릴이라면, 그가 평상시의 무심한 얼굴로 서 있다면, 마치 쾰른에서 그를 구하고 참혹한 희생제에서 그를 구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아리안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그에게 달려들어 키스할 것이다. 허락은 구하지 않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칼릴은 용서해 주리라.
끼익, 문이 열렸다.
아리안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철창 너머로 손을 뻗어서 칼릴을 끌어안을 마음의 준비. 그리고 이 철창문이 열리는 순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창살 틈으로 입술을 내밀어 그에게 키스할 마음의 준비.
문 바깥에서 발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무두질된 비싼 가죽으로 된 부츠.
아리안의 몸이 환희로 터질 듯이 부풀었다.
“칼릴!”
그가 성급하게 칼릴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그리고 창살을 움켜잡고 철창문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 발이 계단을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실루엣이 스윽 드러났다. 가파르게 올라갔던 아리안의 심박 수도 그 순간 뚝 떨어졌다.
“하아….”
아리안이 실망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면서 창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칼릴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빠르게 저벅저벅 감옥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고상한 진줏빛 이마와 짙은 검은 눈썹, 긴 눈이 드러났다.
“지크….”
아리안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동안 둘째 왕자가 아슬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지크와 만나지도 못했다. 따라서 아리안은 그가 이미 이쪽 차원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지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왜라니요?”
그의 목소리는 몹시 불쾌한 일을 겪은 듯했고 즐거움의 기색이라고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여기 들어오려고 무슨 지랄을 했는지 알면 그딴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는….”
“칼릴이 보냈어?”
“하!”
지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짧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한 번 냈다. 그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말없이 손에 쥔 커다란 열쇠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그 열쇠들은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였고 모두가 하나같이 낡아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지크가 냉정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열쇠를 뒤적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제대로 맞지 않았다. 씨이발, 지크가 낮은 욕설과 함께 거친 손길로 다시 열쇠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시도에서야 자물쇠가 끼익 하는 녹슨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나와요.”
지크가 난폭하게 철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말했다.
아리안은 머뭇거렸다.
“칼릴은….”
“정신 차려요! 그 자식은 안 와요.”
그러면서 그가 아리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면서 감옥 밖으로 두어 발자국 끌려 나왔다.
“그런 개자식은 이제 잊어요. 끝내라구요. 내 말 알아들었어요? 정신 좀 차리란 말이에요. 생각해서 준 트리니티 매듭으로 쓸데없는 짓거리나 벌이고, 이 문명이 얼마나 미개한지 몰랐다는 말은 집어치워요. 마녀사냥을 안 겪어 본 것도 아닌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러더니 이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은혜도 모르는 차원 마수….”
그 순간이었다. 지크의 목소리가 뚝 멎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찢었다.
지크는 과거 신전 기사단의 두 번째 검이었고 용 살해자로 이름 높은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몸을 틀어 그 공격을 심장에서 약간 빗나가게 하는 데에 그쳤다.
“크읏…!”
낮은 신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아리안은 미처 증발되지 못한 핏방울이 그의 콧잔등으로 튈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크가 왼손으로 아리안을 뒤로 밀치면서 오른손으로 그람을 쥐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뽑기 전에 두 번째 공격이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단번에 어깨뼈가 날아가고 살점이 찢기며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에 굴하지 않고 그가 검을 뽑으려 했다. 시퍼런 검이 반 뼘 정도 뽑혔을 때 바닥을 짚은 그의 오른발에서 약간 위쪽에서 공기가 쩌억 갈라졌다. 그것과 동시에 그의 정강이가 피를 뿜었다. 그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모든 것은 너무 빨라서 아리안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 지크….”
아리안은 넘어지는 지크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무언가가 그의 바로 눈앞을 쇄도해 쏘아졌다. 지크가 한 팔로 아리안의 허리를 낚아채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검을 뽑아 그것을 냅다 받아쳤다.
쿠우웅!
마치 콘크리트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빛이 번쩍 사방을 밝혔다가 삽시간에 다시 어둠이 떨어졌다.
저벅, 그리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리안은 칼릴이 오기를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바랐으나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아리안은 곁에 선 지크와 계단 앞에 선 칼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칼릴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아리안이 상상하던 바로 그 표정. 쾰른에서 그를 구할 때처럼, 희생제의 밤에 그를 구할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하고도 차분한 얼굴 말이다.
그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으나 지크도 아리안도 그가 빈손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릴은 아리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지크가 쥐고 있는 검에 닿아 있었다.
“그게 그 유명한 명검 그람인가?”
그 조용한 목소리에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기억이….
“그런 위험한 걸 용케 여기까지 가져왔군.”
“도움을 조금 받았거든요. 다행히 이쪽엔 조력자가 많아서요. 누구누구랑은 다르게.”
지크가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그는 어깨에 구멍에 뚫려 있었고 정강이가 절반쯤 갈라져 너덜거리는 상태였지만 목소리와 표정에는 고통의 기색이 없었다. 아리안만이 창백해진 얼굴로 숨만 헐떡헐떡 몰아쉴 뿐이었다.
잠시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지크가 약간 오른발을 끌면서 한 발자국 나아갔다. 동시에 그가 왼손으로 아리안을 밀어 등 뒤로 숨겼다.
“자, 잠깐, 잠깐만….”
아리안은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해 보려고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아까의 공격도, 지금의 적대적인 분위기도. 칼릴이 신전 기사단을 싫어하고 신전 기사단이 그 재판에서 집행관을 자청하긴 했으나 지크가 신전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것은 아주 오랜 예전의 일이다.
하지만 아리안과 달리 저쪽은 대화의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을 가했는지는 불분명했다.
지크가 왼발로 바닥을 짚고 뛰어오르며 빠르게 검을 찔러 나갔다. 차원을 가르는 명검이 쏘아지는 것과 동시에 칼릴이 한쪽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원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며 지크의 온몸이 그 갈라진 궤적과 동일한 형태로 피를 뿜었다.
애초에 지크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지크는 여기에 몸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조잡하고 단순한 3차원 신체를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며 그런 몸으로는 그람을 제대로 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미 칼릴의 선제공격으로 어깨와 다리에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칼릴이 한 손으로 턱을 슬쩍 어루만지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넌 날 못 이겨.”
목소리는 차분했다.
“특히 그런 꼴로는….”
칼릴의 눈이 온몸에서 피를 뿜는 지크의 신체를 한 번 훑었다.
“흥. 본신째로 쫓겨난 게 자랑인가?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쪽도 어느 정도 제대로 돌아온 것 같은데 고작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나요?”
지크가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쳐 보이면서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칼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잠시 서로를 가늠하는 대치가 몇 초쯤 이어진 끝, 이번에는 지크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빠르게 발로 바닥을 박차고 쇄도해 나갔다. 검이 허공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그 앞의 차원이 휘익 비틀어졌다. 예리한 검 끝이 비틀린 차원을 그대로 꿰뚫으며 칼릴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람이 칼릴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가는 것과 동시의 지크의 왼쪽 허리에서 오른쪽 가슴팍까지가 쩌억 갈라지며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털썩, 갈라진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뜨끈뜨끈한 내용물이 쏟아져 내리며 복도에 고인 구정물 웅덩이로 흘러들었다.
아리안은 자신이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칼릴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그는 여유롭게,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어서 다가왔다.
곧 그의 발치에 떨어진 그람이 닿았다. 그는 차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나무 막대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살짝 뽑아 칼날을 살폈다.
“카, 칼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아리안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검을 바라보던 칼릴의 눈이 스윽 좁아지는가 싶더니 그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뽑아 지크를 향해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