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66)화 (66/130)

#66

“빨리 나가자! 빨리 나가자구!”

그들이 아리안 앞을 떠나갔다. 아리안은 자신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어 차마 칼릴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부정조차 하지 못했다. 경험상 사람들은 아리안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그의 발언을 비비 꼬아 안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곤 했고, 아리안은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또 시간이 흘렀다.

절지동물이나 비쩍 마른 시궁쥐 따위가 근처에서 바스락거렸다. 아리안은 시궁쥐의 검고 반들거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새벽녘쯤(물론 이는 아리안의 추정이다) 계단 위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걸음은 뚜렷하게 점점 가까워졌고 그에 따라 아리안의 심장도 점점 빨리 뛰었다.

아리안은 그것이 누구일지 상상했다.

닛사, 오스발, 어쩌면 칼릴….

그러나 문이 열리고 구정물 고인 복도로 내디딘 발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창백한 남자, 궁정 마법사였다.

그가 아리안이 갇힌 창살 문 앞에 서서 두건을 벗었다. 시체처럼 핼쑥한 얼굴이 드러났다. 두 눈만은 불꽃처럼 번쩍거렸다. 아리안은 그 눈이 유리알 같은 회색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에야 알아차렸다.

그는 국왕의 몸이 아니었다. 아리안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를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마법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아리안을 지긋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쩐 일로 이자가 말이 없지?’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한 것은 아리안이었다.

“대공 전하는?”

한참을 머뭇대던 아리안이 던진 질문에 마법사가 하, 하고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창살 앞 복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미친 사람 같았다. 아리안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창살 쪽으로 엉금엉금 다가갔다.

“대공 전하는 어떻게 됐어? 너, 너도 알잖아. 난 저주 같은 거 하지 않았어. 대공 전하는 저주받은 게 아니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고 울컥한 아리안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거, 네가 꾸민 거지? 네가 이 짓거리를….”

“내가 꾸민 거 아냐.”

그때 마법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말이 막힌 아리안이 딸꾹 하고 딸꾹질을 삼켰다.

마법사의 석상 같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오히려 더 속내를 알기 어려운 히죽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꾸민 거 아니야.”

그가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봐.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내가 널 불태워서 뭐에 쓰겠어?”

“내가 대공 곁에 있는 게 신경에 거슬려서….”

“뭐, 신경 쓰이긴 하지.”

그러면서 그가 일부러 자기 손톱 밑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관심 없는 척을 했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창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 그의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마법사가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신경 쓰이긴 하는데 불에 태울 정도는 아니야. 이건 일왕자의 작품이야. 그 녀석답지. 그 녀석답게 지저분하고 재미없어. 아. 물론 그 트리니티 매듭을 찾아낸 건 제법 유쾌했지만 말이야.”

일왕자… 또 그 남자였다.

아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마법사가 그런 아리안의 표정을 보고는 재밌다는 듯이 한참을 킬킬거리다가 웃음을 뚝 멈췄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주 이를 갈던데. 널 진짜로 불에 태울 작정이더라구. 난… 뭐랄까. 일왕자가 널… 흠. 그래. 침대에서 아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대공처럼. 인간들이란 그렇지. 겉가죽에 좌지우지되거든. 백 년도 못 가 추악하게 쭈글쭈글 쭈그러들 겉가죽에… 물론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런 면에서 보면 그 작자들은 아주 눈이 높다고 봐야겠지.”

마법사가 쉼 없이 나불거렸다.

“여하간에 이건 내 작품이 아냐. 내가 했다면 이거보단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을 썼을걸.”

아리안은 희생제는 전혀 세련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대신 그는 다시 물었다.

“저기… 대공 전하는 어떻게 됐어?”

“그 꼴이 되어서도 대공이 걱정돼? 아주 대단하신 사랑이야.”

마법사가 쭈그리고 앉아 양손에 턱을 받치고는 아리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아리안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 소식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 작자뿐이었다.

“그래. 걱정돼.”

“흐음.”

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복도에 고인 구정물 위를 철벅거리면서 빙빙 맴돌았다. 몇 바퀴 돌더니 우뚝 멈춰 섰다. 미친 사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수 세기 전에 추락한 광신의 말로가 어떻든 아리안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저기….”

아리안이 세 번째로 다시 그를 불렀을 때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공은 무사해. 별 반응도 없고.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던데.”

그가 히죽거리면서 대답했다.

“아. 안타깝기도 하지. 근데 인간과의 사랑이란 보통 이런 식이거든. 내 말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고. 색다를 것도 없지.”

그가 일부러 하품을 했다.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법사가 허리를 굽혀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창살을 와락 부여잡은 흰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마법사가 허리를 다시 폈다.

“왜. 실망스러워? 근데 대공이 남자 애인 하나 구하자고 위험을 감수할 리는 없잖아. 이단 재판이라고. 그것도 파살리아에서! 자기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한다면 더더욱 안 그러겠지.”

“대공의… 엄마?”

처음 아리안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칼릴에게는 모친이 없다. 차원 마수들은 그냥 태어난다. 행성의 탄생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얼마 뒤에야 아리안은 그것이 인간으로서 ‘도르센 대공’의 생물학적 모친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법사는 아직 칼릴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아리안은 입을 다물고 뒤로 꾸물꾸물 물러났다.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봐.”

이번에는 마법사가 아리안을 불렀다.

“이봐!”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아리안이 고개를 들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정신 차려. 대공은 널 버렸어. 내일 아침이면 넌 불에 탈 거야. 제아무리… 너 같은 상위 개체라도… 흐흥. 본신이 죽으면 끝이지. 영원히.”

그가 지껄여 댔다.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절반만 믿었다.

칼릴은 아리안을 버리지 않았다. 아리안은 칼릴의 손길과 눈빛을 기억했다. 한 침대에서 얼싸안고 잠들던 밤들도.

칼릴은 그저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가 이 재판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어쩌면 새벽쯤에 닛사를 보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스발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직접 올 수도 있다. 그 희생제의 밤에 그랬던 것처럼. 그 옛날, 쾰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법사가 김이 빠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아… 그 얼굴은.”

그가 창살을 한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덜컹덜컹! 철창이 흔들렸다.

“애인에게 버림받았으니 불에 타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진짜? 이봐, 진심이야? 그럴 거면 그 몸을 날 줘. 조금 더 세상에 아름다운 방식으로 사용해 줄 테니까!”

“주겠다고 해도 어차피 넌 못 가지잖아.”

“그야 그렇지….”

마법사가 양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신격체는 항성 같은 것이라서 각자의 고유한 중력과 자전,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억지로 뒤틀어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아. 맙소사. 말도 안 돼… 이딴 말도 안 되는 일로… 그 아까운 몸을….”

마법사가 중얼거리다가 펄떡 고개를 들었다. 그가 창살로 달려들어 몸을 붙였다.

“이봐. 내 도움 필요 없어? 난 널 여기서 꺼낼 수 있어. 내가 한마디만 하면….”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한참을 더 창살 앞을 서성이며 아리안을 설득하다가 종내에는 김이 빠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아. 한심하군, 한심해.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래. 잘해 봐.”

그의 힘없는 발길이 터덜터덜 멀어져 갔다. 끼익, 쿵. 계단 위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아리안은 그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세다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칼릴이 곧 구하러 올 것이다.

시간이 더 흘렀다. 아마 이제 진짜 새벽녘이리라.

아리안의 믿음은 굳건했지만 기다림 자체가 지루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비쩍 마른 시궁쥐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이 눈을 빛내며 아리안을 살폈다. 어쩌면 아리안이 지쳐 쓰러지는 틈을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알이나 손가락을 파먹으려고…. 아리안은 지지 않고 시궁쥐를 마주 노려보았다. 눈싸움이 이어졌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일은 없을 거야. 곧 칼릴이 올 거거든. 아니면 닛사가… 아니면 오스발이….”

아리안이 그렇게 시궁쥐를 향해 제멋대로 지껄여 대던 순간, 계단 위, 문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궁쥐가 후다닥 복도 구석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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