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대공은 눈을 번뜩 떴다.
그가 벌떡 일어서며 칼이 밑으로 떨어졌다. 검집이 돌 타일에 부딪치며 철컹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는 신경 쓰지 못하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텅 빈 복도를 난폭하게 달려 나갔다. 돌계단에 그의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굳게 닫힌 문이 나타났다. 그는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쪽 침대에 아리안이 잠들어 있었다. 도롱도롱 넋 빠진 숨소리까지 내면서 깊게 잠든 얼굴은 평온했다. 볼록한 이마 위 눈썹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앳된 얼굴에는 긴장되거나 힘이 들어간 부분 하나 없이 자연스러운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이따금씩 입술이 달싹이며 입꼬리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럴 때마다 진한 속눈썹은 작게 떨리고 감긴 눈꼬리 끝이 꿈질댔다.
깃털 이불이 그의 어깨와 등허리를 덮고 있었으며 발끝이 약간 빠져나와 있었다. 발등이 강물 표면 물고기의 등줄기처럼 반짝거렸다.
대공의 등 뒤로 불빛이 길게 들어와 온화하게 잠든 아리안의 얼굴 위를 가느다란 빛줄기가 가로질렀다. 잔잔한 숨소리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빠져나올 때마다 들려왔다.
대공이 들어온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는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더듬더듬 시트 위를 기었다.
흰 손.
그는 그 손을 아주 신중하게 뜯어보았다. 그 손의 크기와 무게감과 손가락의 길이, 각 마디의 굵기, 손톱 빛깔, 손바닥의 주름의 깊이와 길이, 개수까지 모두 눈에 새길 듯이.
그때 아리안이 몸을 뒤척이며 이불이 흘러내렸다. 깨끗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대공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그는 벌떡 몸을 돌렸다. 핏발 선 눈이 작은 방을 샅샅이 훑었다. 목걸이를 어디에 숨겼지? 서랍장으로 달려가 서랍을 잡아 뽑았다. 흙투성이 누더기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잡아 찢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틀 뒤, 커튼 아래, 침대 밑….
“으음… 칼릴?”
그때 아리안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실눈을 뜨고 그를 찾아 머리를 두리번거린다.
대공은 얼마간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그 대답에 아리안은 안심한 듯 다시 금방 잠으로 빠져들었다.
대공은 오랫동안 그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성벽 구석 타일 사이에 작은 새싹이 살짝 머리를 들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것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새싹은 힘없이 시들거렸으나 애써 녹색 순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들고 있던 가죽 주머니에서 물을 조금 따라 그 틈에 부어 주었다.
짧은 일식이 끝나고 다시 해가 떠올랐을 때는 두 번째 해와 함께였다. 계절의 변화는 아주 완만했다. 파살리아 성 곳곳에는 아직도 서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봄은 우중충했다. 아리안은 고작 이 작은 새싹 한 포기에서 간신히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파살리아를 뒤덮은 불길한 그림자는 계절이 바뀌었음에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아리안은 쪼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들어 높게 솟은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칼릴이 머무는 층 근처를 시선으로 더듬었으나 창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잠시 그곳을 올려다보던 아리안은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대공의 얼굴을 못 본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닛사에게 몇 번 물었으나 그저 대공 전하께서는 바쁘시다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제 아리안이 기다리는 것은 그저 도르센으로 떠난다는 그날뿐이었다.
만일 대공이 마음을 바꿔 아리안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짐마차에 숨어들거나 짐을 나르는 일꾼으로 속여서라도 따라가리라. 아리안은 그렇게 대공을 만나지 못한 지난 여러 날 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결심을 되풀이하며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아리안이 기다리는 그날보다 더 빠르게 닥쳐온 것은 다른 일이었다.
아리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병사들에게 이끌려 지하 감옥에 내동댕이쳐졌다.
철컹!
창살 문 바깥에 자물쇠가 걸렸다. 저벅저벅 병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차가운 바닥에서 허우적대던 아리안이 간신히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일으켜 창살로 다가갔을 때는 이미 병사들은 떠나가고 감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옥은 어두웠다. 아리안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창살 맞은편에 비좁은 복도가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구정물이 고여 있었다. 그 복도 끝에는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올 수 있는 작은 철문이 붙어 있었는데 굳게 잠긴 채였다. 이곳에는 아리안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사람의 기척은 아니었다.
아리안은 창살을 움켜잡고 바깥을 향해 외쳤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없어요, 어요…. 텅 빈 메아리만 돌아왔다. 철컹철컹, 창살을 흔들어 보았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날 여기에 가뒀지?’
아리안의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국왕의 암수, 또는 일왕자의 더러운 계책…. 대공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문득 오스발이 했던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바쁘다던 대공. 그리고 코르키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리안은 조금 더 이쪽 세계의 정치와 대공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이제 와서 아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기 암시뿐이었다. 그는 괜찮을 거야. 나도 괜찮을 거야.
결국 아리안은 감옥 안쪽 구석으로 돌아왔다. 습기가 느껴지는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팔로 몸을 감쌌다. 눈을 감자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만 하루를 쫄쫄 굶은 뒤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넓지 않은 홀이었다. 천장은 낮았고 창문은 없었다. 방 끝에 낮은 계단이 두 개 있었고 그 위에 단상이 놓여 있었다. 아리안은 가운데에 앉혀졌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방 안에는 열기가 넘실거렸다. 아리안은 이 열기를 잘 알았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단상에 앉은 거만한 얼굴의 여자가 턱을 어루만지면서 무어라고 연신 질문을 던졌다. 아리안은 이런 재판을 이미 겪어 보았다.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예상대로 모든 것은 막힘없이 흘러갔다.
하인 두 명이 나타났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담뱃잎을 기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약초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항상 혼자 다니고….”
“대공 전하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나타나서….”
“어디 출신인지는….”
전부 검게만 보이는 얼굴들이 아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자신의 발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발치로 무언가가 내던져졌다. 거뭇하게 타들어 간 산사나무 트리니티 매듭이었다. 다음에는 은으로 된 펜던트가 다시 그 곁에 떨어졌다.
“마물의 상징입니다!”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저주한 겁니다! 대공 전하를….”
아리안은 그 울부짖음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았다. 칼릴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안은 사람들이 칼릴을 저주의 희생자라고 주장할까 봐 걱정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저주에 걸린 희생자를 화형시킨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수천 개의 차원에서 수천 개의 문명이 질리지도 않고 비슷한 짓을 해 왔다. 이곳 사람들은 신체에 남은 저주는 마수의 흔적이며 그 희생자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사제의 정화술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사제가 없는 지금에는 오로지 그 육신을 불로 태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저들이 칼릴의 신체에 남은 그 흉터를 발견하고 불에 태우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아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제각각의 증언을 했고 그중 아리안에게 불리한 것이 채택되었다. 여기까지는 아리안이 이전 겪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진행이었다. 다행히 이전과 다른 점은 고문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형을 선고한다.”
재판관이 은 망치로 작은 종을 땡땡땡 내리쳤다.
아리안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아리안은 칼릴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혹시나 그걸로 사람들이 칼릴을 저주와 엮을까 봐 두려워 묻지 못했다.
아리안을 도로 감옥 안으로 밀어 넣은 간수들이 철창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들 중 하나가 몸을 돌려 철창 안의 아리안을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깝구만.”
다른 한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미쳤어? 마물이라고. 저주를 걸지도 몰라.”
“그래서 아깝다는 거야. 저걸 봐…. 막내 왕자가 끼고돈 이유가 보이잖아.”
“미친 자식. 막내 왕자도 저주에 걸렸을지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거야. 마물을 끌어안고 뒹굴다니, 퉷!”
세 번째 간수가 문밖에서 그 둘을 닦달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