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약간의 비웃음이 실린 그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 반응일 줄은 알았어. 그런데 난 원래 그 자식들 안 좋아해. 멀린, 키르케, 솔로몬, 붓다, 메데이아, 갈드라 로프투르, 라스푸틴, 뭐 이런 놈들 말야.”
그가 늘어놓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낯익은 이름들에 대공이 눈썹 끝을 치켜올린 순간, 남자가 말을 마쳤다.
“당연히 공회야 말할 것도 없고. 아. 신전 기사단도. 이봐. 난 네 편이야. 우리 중에 신전 기사단 좋아하는 놈들이 어딨어?”
이번에야말로 대공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리?”
남자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래. 우리. 아무리 너하고 내가 급이 조금… 차이 난다고는 해도 설마 같은 카테고리로도 안 묶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래! 우리! 다차원 생물종!”
그 뒤에 그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아. 코믹스 오타쿠라고 생각할 거야. 이 근처에 그런 가게가 하나 있거든. 조금 더 내려가면… 유니언 스퀘어 쪽에.”
땅딸보의 개소리는 대공의 귀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단어 몇 개가 정신없이 그의 머리 주위를 공전했다. 공회. 신전기사단. 우리. 다차원 생물종. …차원 마수.
두통이 그의 전두엽을 강타했다. 대공은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뜨거운 햇살이 온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은 정돈되어 있었고 햇빛을 받은 잎사귀는 반짝거렸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으나 활력이 넘쳤다. 주위는 시끄러웠고 적어도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음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공원 안쪽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어린애들도 많았다. 작은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 서너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은 이곳을 알았다. 왜 모르겠는가? 그는 이 앞의 코옵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센트럴파크 사우스가 내려다보이는 루프탑을 가진 펜트하우스. 그걸 사려고 코옵 이사진 면접을 세 번이나….
지끈거리는 두통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지.
그의 취미는 세계 곳곳에 집을 수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18홀 골프장과 개인 해변이 딸린 삼천만 달러짜리 대저택일 때도, 제곱미터 당 일억은 나가는 다운타운의 고급 펜트하우스일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총탄이 터져 나가는 내전 한복판의 방 두 칸짜리 너덜거리는 아파트일 때도 있었다.
“네가 4억 5천만 광년이나 추락했을 거라고는 사실 아무도 생각 못 했어. 그 정도 추락하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 뭐. 사탄 정도? 근데 넌 제법 괜찮아 보이네. 다행이다, 야.”
킥킥거리는 땅딸보의 웃음소리가 시끄러웠다.
“난 네가 사탄보다 더 대단하다고 옛날부터 생각하긴 했어. 그렇게 생각한 치가 나만은 아닐걸. 그 대단한 사탄도 결국… 재앙은 못 됐잖아. 안 그래? 재앙의 왼쪽 어깨.”
재앙의 왼쪽 어깨.
그건 그의 이름 중 하나였다.
그는 수많은 집들만큼이나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다수는 친근하게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것은 오로지….
“칼릴, 듣고 있어? 요즘 공회가 수상쩍어. 신전 기사단도 움직임이 영 껄쩍지근하고…. 널 그렇게 골로 보내 버린 뒤로는, 아니, 실례. 그러니까, 골로 보내 버렸다고 생각한 뒤로는 한동안 잠잠했던 것 같은데 말야. 그도 그럴 게 아직 999일이 안 지났잖아?”
그가 턱을 밑으로 쭈욱 빼면서 선글라스 위로 떠보는 듯한 시선을 던져 왔다.
“재심을 대비한다는 말이 있던데…. 흐음. 네 생각은 어때? 준비 중이야? 난, 뭐랄까, 네가 그런 시시한 것보다는, 좀 더 엄청난 걸 계획한다고 생각했거든. 좀 더 네 이름에 걸맞은 그런 거.”
땅딸보가 쉼 없이 지껄여 대고 문장과 문장 사이사이마다 바닐라라테를 후루룩후루룩 시끄럽게 빨아들여 댔다. 바람이 불고 노천 테라스 안쪽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쿵쿵대는 비트가 흘러나왔다. 공사장 소리가 났다.
일단 여기는 너무 시끄러웠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시끄러운 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그들은 다시 어둑한 내실에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사방의 돌벽으로 소음이 차단되어 적막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어두운 방.
대공은 긴 의자에 처음처럼 앉아 있었다. 맨발이었고, 오른손에 검을 쥐고, 튜닉도 없이 셔츠와 바지만을 엉성하게 걸친 방만한 차림. 땅딸보는 칼릴의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또한 화려한 튜닉에 허리띠에는 장식용 홀을 차고 있는 차림으로 돌아온 뒤였다.
내실에는 아까의 환영은 없었다.
벽난로 속에서 불똥이 튀는 타닥거리는 소리가 이따금씩 나는 것을 제외하면 사방은 고요했다.
어느 정도 이어진 적막을 엉거주춤 서 있던 땅딸보가 끊었다.
“어… 미안. 불편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너는 맘대로 돌아다니기 좀 그런 상황이지?”
그가 엉거주춤하던 허리를 펴고 섰다. 슬쩍 대공의 눈치를 본다. 대공은 무시했다.
“그래도 들키진 않았을 거야. 네가 맘대로 움직이진 못해도… 뭐. 우리가 조금 차원 틈을 왔다 갔다 한다 해서 공회가 어떻게 그걸 다 알아차리겠어?”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체는 수백 수천 개의 차원에 걸쳐 분포한 고질량 생물체이므로. 제아무리 공회라도 나비의 날갯짓을, 파도의 횟수를,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전부 세지는 못한다. 아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차원과 차원 사이를 넘나드는 그들의 발자취를 일일이 쫓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상관없어. 시끄러워서 그랬을 뿐이야.”
대공이 드디어 대답했다.
아, 하고 땅딸보가 반색을 했다.
대공은 여전히 저 땅딸보의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해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다. 쉽사리 기억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적어도 그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아차렸는지 땅딸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뭐어. 오늘 온 건 네게 내가 네 편이라는 걸 말하려고 온 거야. 재앙의 그 날에… 흠흠. 너하고 척지고 싶진 않거든. 뭐 그날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당분간은 근처에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그러면서 그가 벽 뒤로 스윽 사라졌다. 바닥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땅딸막한 그림자도 자연스럽게 흐려졌다.
어떻게 부르냐고 반문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공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공은 허공을 지긋이 노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여태까지 그가 혼몽 속에서 더듬었던 모든 꿈과 환상들이 어지러이 일그러졌다. 진짜와 가짜가 한데 섞였다.
쿠르르릉.
천둥이 쳤다.
파살리아는 아니었다.
보스니아에 인접한 크로아티아의 시베닉 지방. 카를로바츠에서 A1 국도를 타고 295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다 국도를 빠져나와 방향을 살짝 보스니아 쪽으로 돌린 중간쯤의 위치로, 위도는 북위 43도, 경도는 동경 16도쯤이 된다.
대공은 그가 달려왔던 여정을 눈으로 훑었다.
신전기사단은 그를 열아흐레 동안 쉼 없이 쫓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민스크, 키예프, 다시 몰도바를 거쳐 부다페스트, 그리고 벨그레이드, 마지막으로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A1 국도를 달릴 때쯤에는 강철의 육신을 지닌 그조차도 피로와 짜증에 몰릴 대로 몰린 상태였다.
기사 한 명의 창이 그를 메르세데스째로 꿰뚫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일격이었다. 하늘에서부터 어슷하게 내리꽂힌 그 일격은 그의 척추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오른쪽 갈비를 부수고 폐를 꿰뚫었으며 그로도 모자라서 메르세데스의 자랑스러운 직렬 6기통 엔진을 직격했다. 그 폭발에서 신전 기사단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빠져나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는 피와 내장을 바닥에 줄줄 쏟으며 대략 시속 165킬로미터로 북동쪽을 향해 4시간 20분 정도를 달렸다.
그의 핏자국을 따라 마물들이 몰려들었고 개중 몇몇은 그가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감히 그의 발뒤꿈치에 달라붙기도 했다.
결국 그는 야트막한 구릉 두 개가 겹쳐지는 지점에 쓰러졌다.
하급 마수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힐끔힐끔 눈치를 보다가 그가 움직이지 않자 파리떼처럼 달라붙어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핥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그것들이 정어리 무리처럼 와르르 물러났다가 다시 와르르 몰려들던 것도 기억했다.
저 멀리서 마른번개가 번쩍거렸다. 그건 그를 쫓는 신전 기사단의 헤드라이트였다.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갈증으로 부르튼 입술을 적셨다. 그는 그것이 빗방울이라고 생각했었다.
천둥은 여전히 으르릉거렸다.
아니. 천둥이 아니었다. 1.5톤 트럭 엔진 소리. 트럭이 그가 쓰러진 곳에서 1미터 반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흰 손.
그것은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다가와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