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63)화 (63/130)

#63

“너무 치료가 늦어지면 안 되는데… 아시다시피 치료에는 적기라는 게 있잖아요.”

“저야 치료사도 마법사도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지요. 제가 대공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바쁘시면 아주 잠시라도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치료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꼭이요.”

“그러겠습니다.”

“꼭이에요.”

아리안은 여러 번 당부했다.

그들은 어느덧 아리안의 방 앞에 당도했다.

“물론입니다.”

오스발이 친절하게 대답하며 문을 닫아 주었다.

***

오스발이 왔다 갔다.

‘국왕을 만나더군요. 국왕이 찾아온 것인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다지 길지는 않았습니다.’

그 짧은 전언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수정 호수의 요정들, 이제는 국왕.

아리안의 목적은 무엇일까? 정말 단순히 그를 돕기 위해, 보다 정확히는 ‘칼릴’을 돕기 위해 여기 왔다고?

칼릴.

대공은 닛사를 시켜 그 이름에 대해 조사했다. 역사, 전설, 신화,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이야기들까지. 수확은 실망스러웠다. 어디에도 칼릴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닛사였다. 그녀가 잰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두 팔에서 팔찌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으며 잔뜩 긴장한 것처럼 양어깨가 경직되어 있었다.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오스발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관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뭘 발견해 내느냐에 따라 다르지.”

그 대답에 닛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경련하며 팔찌들이 지이잉 하는 진동음을 울렸다.

“전하께서 의심하시는 바를 저 또한 압니다. 일왕자나 이왕자, 국왕… 왕녀가 보낸 자일수도 있겠지요. 신관이 누구와 내통하든, 차라리 그편이 낫습니다.”

“그편이 낫다고?”

“예. 그건 신관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의미니까요.”

나이 든 마법사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카랑카랑해졌다.

“부귀영화를 노린다면 더없이 단순하겠지요, 권력이라면 그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

닛사가 대공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신관의 목적이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목적.

대공은 무심코 그 이름을 낮게 뇌까렸다. 칼릴. 아리안이 애틋하게 속삭이던 이름을.

“전하. 그게 정화술이든 아니든, 치료가 전하의 저주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치료에 대해 가장 의심하던 게 너 아니었던가?”

“그랬었습니다.”

그녀가 대공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건 최측근에게만 허락되는 거리였다.

“전 칠 년 동안 그 저주를 보아왔습니다. 그 고통을 저도 함께 겪었습니다. 그걸 없애기 위해 제가 무슨 짓까지 해 왔는지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저는 압니다. 그자의 정체나 목적이 무엇이든 그 치료만은 진짜라는 걸.”

그녀의 눈은 진지했다.

“국왕이 도르센을 핍박하고 이왕녀가 저흴 배신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파살리아의 왕좌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신관은 다릅니다. 그는 전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자입니다.”

닛사가 팔걸이 위에 올려진 대공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전하.”

그녀가 낮게 대공을 불렀다.

“신관의 목적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용해야 합니다.”

오랜 충신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신관을 만나십시오.

그가 바라는 걸 찾아내고, 만일 필요하다면 설령 거짓을 연기한들 어떻습니까?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닛사가 떠나간 뒤 그는 잠자코 허공을 응시했다. 푸른 눈이 빈 벽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불길 같은 그림자들이 솟구쳤다. 그와 함께 진짜 같은 환영들이 불쑥불쑥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어떤 것은 얼굴이 있었고 어떤 것은 검은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공은 이제는 익숙해진 그 환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것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러 개의 환영 사이에 누군가가 몸을 벌떡 일으켜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칼을 차고 예복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그림자 인형극처럼 모두에게는 소리가 없었다. 검고 긴 옷을 입은 누군가가 높은 단상 위에 서서 나무로 된 망치를 두들겨 댔다. 땅땅땅땅땅땅, 그 환청만이 귀가 아플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대공은 저 다음을 알았다.

이것은 그가 수백 번을 꾼 꿈이었고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아 온 환각이었다.

다시 똑같은 짓거리가 처음부터 반복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손가락질하고, 누군가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쑥덕대고, 누군가가 화난 듯이 허공을 향해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른다.

대공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때였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낯선 목소리가 그 환영들 사이를 갈랐다.

대공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그의 손이 민첩하게 검을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뽑아낼 듯 칼자루를 쥔 손등에 핏줄이 꿈틀댔다.

“마조히스트야? 아니면 복수심이라도 갈고 있었어? 이거 네 재판 장면 아냐? 이런 끔찍한 건 대체 왜 만들어서 보고 있는 거야?”

저벅, 저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천연덕스레 가까워졌다.

대공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건 남자였다. 약간 땅딸막하고, 나이는 서른다섯 살쯤 되었고, 배가 조금 나오고, 화려한 튜닉에 칼 대신 장식용 홀을 허리에 찬 차림의 남자. 그리고 대공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내실을 꽉 채우고 있는 환영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가면서 대공을 향해 걸어왔다.

“어이쿠. 이거 정교하게도 만들어 놨네.”

그가 키가 큰 판관 차림의 여자 환영을 올려다보면서 관자놀이의 땀을 닦는 척했다.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걸음 수를 세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침입자는 대공의 열 걸음 내로 다가오기 직전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대공을 향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어휴, 이런 구석 차원에 있었으니 찾기 힘들었지.”

남자가 대공에게 약간 비굴한 것처럼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대공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미안, 미안. 싸우려고 온 거 아냐. 싸우려고 온 거였으면 이렇게 나왔겠어? 당연히 싸우려고 들지도 않겠지만. 난 현실주의자야. 누구누구랑은 다르게. 질 게 뻔한 싸움은 안 하지. 누구누구랑은 다르게.”

불과 십 초도 안 되어 그렇게 빠르게 지껄여 댄 그의 얼굴에 친절함을 한껏 끌어 올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지냈어, 칼릴?”

칼릴.

또 저 이름이다.

대공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진 것과 동시에 갑작스레 배경이 전환되었다.

벽이 녹아내리고 대신 커다란 나무와 잘 정돈된 블록 길이 펼쳐졌다. 뜨거운 정오의 태양 빛이 떨어져 내렸다. 차양막을 내린 가게들. 기이한 옷차림으로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들 손에 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귀에 무언가를 꽂고 정신없이 뭐라고 지껄여 대고 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공은 알루미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둥근 알루미늄 테이블이,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알루미늄 의자에 앉은 땅딸막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앞치마를 입은 젊은 흑인 남자가 다가와 그들에게 영어로 물었다.

“뭐 주문하실래요?”

“난 아이스바닐라라테. 저쪽은….”

대공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같은 걸로 주세요.”

“아이스바닐라라테 두 잔이요. 사이즈는….”

“큰 걸로!”

“네.”

건성으로 대꾸한 종업원이 몸을 돌려 테이블을 떠나갔다.

어느샌가 옷차림이 바뀐 땅딸보가 휴우, 하면서 노란색 선글라스를 아래로 슬쩍 내리며 턱을 목에 한껏 붙여 대공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바닐라 싫어해?”

어디선가 드릴로 콘크리트 벽을 부수는 공사 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여전하구만.”

센트럴 파크의 정오,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있고 그 사이로 관광객을 태운 마차들이 지나갔다.

대공 자신도 전혀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그는 검은 슬랙스에 흰 셔츠를 바지 밑으로 넣어 입고 벨트는 하지 않았다. 셔츠 소매는 두어 번 넓게 접어 굵은 팔뚝을 드러내고 있었고 단추는 목 위에서 한 개만 풀었다. 그는 선글라스는 끼지 않았고 대신 손목에 두꺼운 시계를 차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종업원이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에 바닐라라테를 가져왔다. 땅딸보가 빨대를 호로록 빨아들이면서 대공을 향해 코끝을 실룩거렸다. 제법 역겨웠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난 네 편이야.”

“내 편이라고?”

대공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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