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62)화 (62/130)

#62

아리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지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래전 추락한 악신일 수도 있다던 지크의 추측. 이 자는 다윗의 별을 안다. 그리고 아리안이 온 곳도 알고 있다. 4억 5천만 광년 너머, 수십억 개의 차원과 차원이 겹쳐진 틈새를 비집고서야 갈 수 있는 지구 은하를.

“너야말로 노리는 게 뭐야?”

아리안이 드디어 입을 열자 궁정 마법사가 아, 하고 연극적으로 양팔을 벌렸다.

“드디어 그 귀한 입을 여시는군. 나는 아주 그 입술이 딱 달라붙어서 영영 떨어지지 않게 된 줄 알았지 뭐야.”

“나하고 대공을 내버려 둬. 나는 여기서 널 방해하지 않을 거야.”

“흐음. 어떡할까.”

궁정 마법사가 고민하는 척 손끝을 턱에 가져다 대고 머리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잠시 뒤 그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봐. 들어 봐. 너하고 달리 난 몸을 가지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잘 알겠지?”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모를 수도 없었다. 저자가 희생제를 통해 국왕의 육신을 가로챈 것을 보면 명백했다.

“한데 인간의 몸은 영 불편하단 말이지. 아. 단순히 편의성을 말하는 건 아냐. 편의성은… 뭐. 따질 수가 없지. 사실 잘 기억도 안 나, 예전이 어땠는지.”

그러면서 그가 동정심을 유발하듯 애처롭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리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시시해졌는지 궁정 마법사가 흥 하고 몸을 돌렸다.

“모든 육체에는 기한이 있잖아.”

그가 자기 가슴팍을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들겨 보였다.

“수명 말이야. 수명.”

“설마 그게 억울하다는 거야?”

“왜 안 억울하겠어?”

아리안의 반응이 기쁜 듯 그가 반색을 하며 반문했다.

“그 고생을 해서 들어갔는데 백 년, 아니지, 십 년을 채 못 간다고 생각해 봐. 너라면 억울하지 않겠어?”

“안 억울해. 그리고 난 애초에 그런 짓 안 해.”

“흐흥. 뭐.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지. 시시하군.”

궁정 마법사가 기운 빠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그가 마치 초조한 것처럼, 또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좁은 통로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대공 말이야.”

그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눈이 번들댔다.

아리안은 아랫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내 약을 먹였는데도 멀쩡하기에 난 제법 괜찮은 몸일 거라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좀 더 오래가는 몸 말야. 젊고. 건강하고. 튼튼한 몸. 왕자라는 것도 물론 중요한 요소지.”

“대공에게… 약을 먹였어?”

“그래. 파살리아에 오자마자 먹였지. 사실 처음엔 크게 기대를 안 했어. 일왕자보다는 조금 낫겠거늘 했던 정돈데… 근데 생각 외로 멀쩡하잖아? 그래서 아주, 정말 아주 크게 기대했단 말이야. 어쩌면 저 몸은… 적어도 백 년은 가지 않을까 하고 말야.”

궁정 마법사가 픽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너 같은 게 붙어 있었을 줄이야. 그러니 당연히 내 약도 안 통했겠지.”

“그 약이라는 건….”

“별거 아냐. 네가 보기에는 아주 조잡할 거야.”

그가 부끄러운 척 손사래를 쳤다. 이쪽이야말로 조잡한 연기였다.

아리안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히죽 웃었다.

“이봐.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위험한 건 아니라구. 그냥 단순히.”

그가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쳐 보였다.

“이쪽에 약간 장난질을 쳐서 내가 쓰기 쉽게 만들려는 것뿐이지. 말했잖아. 조잡하다고. 국왕도 같은 식으로 처리했지. 뭐어. 나라고 처음부터 국왕을 노렸던 건 아니야.”

묻지도 않았던 지루한 하소연이 이어졌다.

“처음엔 둘째 왕녀를 생각했었지. 한데 어찌나 독한지 내가 건네는 건 손끝 하나 안 대지 뭐야? 그 계집애만 아니었다면 일왕자를 썼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권력 다툼이라니, 그건 또 사양이거든. 그런 귀찮은 짓을 뭣 하러 사서 하겠어?”

이 나이에 말이야, 하고 그가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피치 못하게 이 늙은이의 몸을 써야 했지 뭐야. 생 제르맹의 비술에 몇 가지를 섞은 덕분에 몇 년은 버티겠다만… 어차피 오래는 못 가겠지. 나도 알아.”

그가 양팔을 쫙 벌렸다.

“그때 대공이 나타난 거야. 도르센의 대공!”

재미없는 일인극에 취한 궁정 마법사가 빠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기대를 안 했어. 권력에서 멀어진, 오래전에 쫓겨난,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왕자라니… 그런 구질구질한 신파극은 딱 질색이거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내 약에 반응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아! 저 몸이라면 백 년을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금 귀찮더라도, 권력 다툼이나 전쟁 같은 거 말이야. 너무 많이 해 봐서 이젠 질렸거든. 아무튼, 그런 걸 감수할 만한 탐나는 신체가 아니냔 말이야!”

고조되었던 그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잿더미처럼 사그라들었다.

“하아아아…. 그런데 네가 붙어 있었을 줄이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구….”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왕이 되는 거라면 벌써 되어 있잖….”

“아니, 아니지! 그런 단순한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거… 이번에는 말이지….”

궁정 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망국의 왕 역할 놀이야.”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사람을 자기의 유희거리로 삼는 미치광이. 아리안이 상종할 만한 치도 아니었다.

아리안은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국왕의 몸을 입은 궁정 마법사가 외쳤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멍청이를 보는 건 오래간만이거든! 재미있게 해 달라구!”

미쳐 버린 전신(前神)을 뒤로하고 아리안은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지크의 말이 맞았다.

저것은 오래전 추락한 악신, 이제 신체를 잃고 권능의 찌꺼기만이 남아 방황하는 이전 시대의 자취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아직 대공의 정체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아나듯 그 장소를 빠져나온 길, 아리안은 탑 정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오스발과 마주쳤다. 오스발은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이야. 이거, 이거. 신관님. 산책이라도 다녀오셨습니까?”

그러면서 그가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탑 꼭대기 쪽을 얼핏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흐릿한 태양 하나가 어슴푸레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하긴… 가뜩이나 짧은 낮인데, 귀중한 시간이죠. 그래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낮이 더 길어질 겁니다. 닛사 경은 열이레만 더 기다리면 두 번째 해가 뜰 거라고 하더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봄이죠. 뭐. 파살리아의 봄이래 봤자 별건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리안은 오스발이 자신과 국왕을 봤을까 일순간 긴장했으나 오스발은 그저 태연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난 건 반가운 우연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미 한참 전이었다.

“대공 전하는….”

아리안은 곧바로 대공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오스발이 그 말을 가로막으며 탑 쪽으로 팔을 벌려 보였다.

“들어가실 거면 모실까요?”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했다.

그들은 함께 탑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경비병을 지나쳐 계단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리안은 빠르게 묻고 싶던 질문을 꺼냈다.

“대공 전하는요?”

“바쁘십니다.”

오스발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리안은 약간 안달을 내면서 다시 물었다.

“많이 바쁘세요?”

“네. 아시다시피 요즘 상황이 좀. 흠. 그렇지 않습니까? 코르키라의 전황에 대해선 좀 아십니까? 거기 상황이 심상치 않거든요. 대공 전하께서 살펴보셔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지요. 게다가 수정 호수의 요정들이 지금 파살리아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오스발이 그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사람들이 둘만 모였다 하면 요정들 얘길 하던데, 신관님께선 요정들을 만나 보셨습니까?”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수정 호수의 요정들은 이제 그다지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 반응에 오스발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와 정반대로 넉살 좋은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흠. 그렇습니까? 저희는 신관님께서 아슬랭 소백작과 아는 사이라 생각했지 뭡니까?”

그 말에 아리안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가 아는 지크는 당연히 요정이 아니었으므로 그와 만났던 일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오스발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치료가 자꾸 늦어지게 되는군요.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지요?”

맞다! 치료!

아리안의 눈에 반짝거리는 이채가 스몄다.

그렇잖아도 그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난번 지크와 만났던 이래, 대공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아리안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희생제 때문에 미뤄졌던 치료 일정은 또다시 밀렸다. 그 와중에 궁정 마법사, 이제는 국왕이 된 그 재액의 힘이 강해지며 파살리아를 둘러싼 오염 또한 강해졌다. 아리안이 굳이 트리니티 매듭을 가지고 어설프게 다윗의 별을 그려 이 탑을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치료가 계속 미뤄지는데 대공 전하께선 괜찮으세요?”

아리안은 초조한 듯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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