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던 사실을 대놓고 지적하는 한마디에 오스발이 숨을 삼켰다. 대공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가 진정 호수 반대편에서 왔다면 호수의 요정들이 누구보다 잘 알겠지.”
대공이 짧게 명령했다.
“닛사에게 얘기해 신관을 감시해라. 너도 마찬가지다. 절대 눈을 떼지 마.”
“그러겠습니다.”
오스발이 빠르게 떠나갔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내실에서 대공은 짧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차분히 우선순위를 셈하던 머릿속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목걸이라고?
뺏어서 알아본다고 성물의 진위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신관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시대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아슬랭 소백작은 호수의 요정 일족이니 성물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의 발언이 더 무게감을 가질 것이다.
‘진짜 성물일 리가 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의문이 뒤따랐다.
‘성물이 아니라면….’
동맹이나 약속의 징표라면 굳이 차고 있던 목걸이를 줄 필요가 없다. 마법적인 상징일까? 아니면 항시 패용하던 물건을 줄 만큼의 어떤, 감정적인…. 거기서 그는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 기회에 알아보면 될 테니까. 아리안의 정체를, 그가 대공에게 접근한 진짜 목적을.
몽롱하게 상념에 잠겨 있던 대공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손이 검 자루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예리한 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불길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상아색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느릿하게 일렁였다.
대공은 신중하게 방을 한 바퀴 전부 둘러본 뒤, 하아 하고 탄식을 터트리며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신경성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뚜렷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마법사들의 마법 눈을 닮았으나 그것과는 다른 기분 나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흐릿하게 배어 나왔다.
푸른 두 눈이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로 향했다. 날름거리는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불길을 바라보던 대공의 두 눈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혼몽 속에서 그는 꿈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평생 동안 들어 왔던 익숙한 환청으로 시작했다.
땅, 땅, 땅, 망치로 무언가를 내리치는 신경질적인 소음이 악몽의 시작을 알려 왔다. 빛나는 바다와 검은 하늘 사이를 유성우가 가득 메웠다. 그 사이에서 벼락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를 둘러싼 열두 쌍의 눈, 날개, 검, 번개.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얼굴들. 곧 수만 개의 칼날이 그를 꿰뚫었고 그는 어디론가 한없이 추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영원한 침잠이 악몽의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쫓기고 있었다. 뇌우가 그를 추적했다. 도로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등 뒤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렸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달린 끝에 그는 지쳐 쓰러졌다. 쓰러진 그에게로 무언가가 다가왔다.
흰 손.
그 순간 대공은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환상에서 깨어났다.
불과 몇 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핏줄이 터질 정도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긴 전장이 아니야. 여긴 파살리아다.’
몇 번이나 자신을 향해 되뇐다.
‘저주가 만들어 낸 악몽에 불과해. 저건 아무 힘도 없는 환상이다.’
자기 세뇌에 가까운 수없는 되뇜 끝, 그가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불면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5> 추락
아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흐릿한 회색 태양이 보였다. 그 하나의 태양이 떠오르며 지루하던 극야가 끝나고 계절이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으나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파살리아에 드리운 암운은 점점 짙어졌다. 일왕자조차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실체 없는 소문이 성을 맴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국왕이 회춘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국왕이 곧 죽을 거라고 했다. 아리안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성을 뒤덮은 오염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없었다.
얼마 전 그는 산사나무 껍질을 깎아 엉성하게 조각한 트리니티 매듭을 대공의 탑 여섯 방향에 묻어 다윗의 별을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지크에게 받은 은으로 된 트리니티 매듭은 아리안 자신의 방 침대 밑에 두고 축성했다. 일곱 지점을 잇는 육망성은 이 탑 전체를 아우르는 다윗 왕의 방패가 되어 탑을, 그리고 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호할 것이다.
물론 이것도 완벽한 처치는 아니다.
아리안의 권능은 원래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오염은 그에 비해 시일이 지날수록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계절이 바뀌어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작은 위안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흐느낌 같은 바람 소리가 성 전체를 윙윙 울렸다.
아리안은 성물이 묻힌 타일 사이를 손가락으로 들어내고 땅을 팠다. 끄집어낸 트리니티 매듭은 거뭇하게 타들어 가 있었다. 이전 다섯 개와 다를 바 없이. 그는 짧은 한숨을 쉰 뒤에 망설임 없이 손끝을 물어뜯어 피를 그 위로 떨어트렸다. 거뭇하게 타들어 간 산사나무 매듭 위로 핏방울이 떨어지며 치익 하고 연기가 타올랐다. 성물에 얽어 붙은 암흑 입자가 단번에 분열하며, 즉 정화되며 이쪽 차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쿼크가 되어 흐트러지는 과정. 아리안은 그 모든 과정을 끝낸 뒤에 몸을 일으켰다.
흙묻은 손을 탁탁 털며 몸을 돌린 차였다.
“그런 짓은 조금 더 조심해서 해야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탑을 둘러싼 좁은 통로 끝에서 들려왔다.
아리안의 몸이 굳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분명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게다가 대공의 거처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고 일꾼들은 이쪽으로 오는 것을 꺼려 언제나 인적이 드물었다.
게다가 저 목소리는….
아리안은 천천히 목소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잎이 모두 떨어진 장미나무 덤불과 높은 기둥 사이의 통로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자주색 외투를 입고 어깨에 다시 검붉은 모피를 걸친 뒤 황금 허리띠를 한 아주 호사스러운 차림이었다. 저번과는 명확하게 차림이 달랐으나 아리안은 그를 알아보았다. 궁정 마법사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국왕의 몸을 입은 궁정 마법사.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바른 자세였다. 그 육신은 고작 쉰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전 국왕의 얼굴에 가득하던 검버섯과 노쇠했던 육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변모였다.
젊음을 되찾는 비술은 수백 수천 가지가 있지만 거의 다는 사술이었다. 그리고 아리안이 알기로 그중 피를 동반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리안의 몸이 단박에 긴장으로 굳어졌다.
궁정 마법사가 천연덕스럽게 외투 자락을 끌면서 아리안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그에게서 풍기는 어두운 기색도 함께 강해졌다. 발치의 그림자가 들쭉날쭉하게 몸집을 부풀리거나 쪼그라트리며 바뀌었다.
“이봐. 네가 노리는 건 뭐지? 응?”
그가 아리안에게 물었다.
“대공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대체 뭔 짓을 하는 거야? 그 같잖은 병신 놀음도 그렇고.”
그의 시선이 파냈던 흔적이 역력한 아리안의 발치 곁을 힐끗 보았다.
“여태까지 얌전히 있더니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심경에 변화라도 생기셨나? 응?”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이런 자들을 잘 알았다. 독사의 혀를 지닌 자들. 대화는 그들의 간교한 지혜에 휘말리는 여지를 줄 뿐이었다.
아리안이 대답하지 않자 시시해졌는지 궁정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윗의 별? 흥. 시시하군. 허튼 장난질이지만… 뭐. 그 일가의 교활함만큼은 나도 인정해. 특히 그 아들. 시지푸스보다야 백만 배는 똑똑하지. 그도 그럴 것이 72장의 노예 계약서라니… 누가 그딴 미친 짓을 상상이라도 했겠어?”
그가 아리안을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그의 발치에서 이어진 어둑한 그림자 끝이 아리안에게 닿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가 마치 빛을 쪼인 시궁쥐 무리처럼 확 물러나며 쪼그라들었다.
아리안은 가만히 서 있었다.
궁정 마법사가 다시 나불나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나야 그렇다 쳐도. 네 의도는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어서.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지. 너 정도의 상위 개체가 공회의 허락 없이… 이런 외진 곳까지 몸소 강림하신 이유를 말이야.”
그가 스윽 상체를 기울여 아리안에게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가 옆으로 기울인 얼굴을 비틀어 아리안을 옆에서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기괴하게 찢어지며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 인간하고 사랑에 빠졌다는 둥… 그런 바보 같은 이유는 아닐 거 아니야. 응? 안 그래?”
그러더니 그가 신나게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