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슬랭 소백작.”
문 바깥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낯선 이름으로 지크를 불렀다.
지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옆으로 돌렸고, 문밖에서 도르센 기사 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아리안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돌아가시죠.”
그들이 아리안을 방 반대편에 있는 문 쪽으로 이끌었다.
아리안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지크의 등만 보였다. 닛사가 그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리안이 그것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기사들이 문을 열고 아리안을 문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문이 닫히며 지크의 뒷모습도 사라졌다.
방으로 돌아온 아리안은 트리니티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더 잘해야 돼.’
메데이아에 이어 지크마저 그를 돕기 위해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이곳 차원에 온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던, 자신에게 무엇도 숨기지 말라던 대공의 말을 떠올렸다. 대공의 말이 옳았다. 거짓말은 언제나 상황을 복잡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칼릴에게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 트리니티 매듭을 보여 주고, 성물에 대해 설명하고, 아리안 자신이 여기 온 이유, 그리고 지크가 아리안을 만나고자 한 이유까지 차분히 알려 줄 것이다.
그는 옷의 구겨진 곳을 모두 펴고 옷차림을 단장한 다음에 차분히 앉아 대공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대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밤을 지새웠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
대공은 손안의 서신을 와락 구겨 버렸다. 구겨진 서신을 벽난로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불길 위에 떨어진 서신은 삽시간에 타들어 가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털썩 몸을 내던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제기랄, 하는 드문 욕설이 한숨에 뒤이었다.
서신은 아르바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답게 간결했으며 불필요한 미사여구라고는 한마디도 없이 본론만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