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59)화 (59/130)

#59

“나, 나도 생각을 하고 온 거야.”

“아하. 그래요?”

지크가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뻔한 일이었다. 백만 개쯤 되는 차원에 백만 개쯤 널려 있는 그렇고 그런 사연.

“아무튼 나도 장님은 아니니까 그 자식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아봤다는 거죠.”

지크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가며 비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가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상처도 상처지만 여기도 제정신이 아닌 거 같던데… 맞죠?”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딱히 지크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가 흐음 하고 팔짱을 꼈다.

“뭐어. 그 자식이 신전 기사단의 공격을 받고 추락한 건 누구나 다 알아요.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닐 거라 짐작하긴 했죠. 당신이 메데이아한테 말했던 시일을 훨씬 넘길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의 시선이 아리안의 시무룩하게 시든 얼굴에 가서 닿았다. 눈썹이 한껏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축축하게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한 서글픈 얼굴. 그것을 발견한 지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내가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그런 거 아니야….”

아리안이 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참 나.”

지크가 심기가 뒤틀린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보니 알고 있긴 했나 보네. 기가 막혀서…. 알면서도 그 자식하고 뒹굴었어요?”

“카, 칼릴은 여기 인간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고. 고, 고작, 며, 몇 번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오염될 리가 없어.”

“그거야 당신이 제대로 된 상태였다면 그랬겠죠.”

지크가 허리를 굽혀 아리안의 얼굴을 향해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그가 손가락으로 아리안의 찌푸려진 미간을 쿡 찔렀다.

“이봐요, 아리안. 정신 차려요. 이거 지금 진짜 몸이잖아.”

권능의 흔적밖에 남지 않은 취약한 몸. 정결한 만큼 쉽게 더럽혀지고 연약한 만큼 쉽게 부서진다.

“필멸하는 신체와 접촉하면서 더러워질 걸 몰랐다고?”

“칼릴은….”

“그래요. 그 칼릴은 지금 필멸하는 몸이고. 잘 들어요. 거기 남아 있는 당신의 흔적이 아니었더라면 ‘그게’ 칼릴이라고는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라구요.”

“치료할 수 있어. 내가 치료할 수 있다구. 그 상처만 아물면….”

“당신의 신성을 소모해서?”

기어이 아리안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넌 여기 왜 온 건데? 나 약 올리려고?”

“말했잖아요. 메데이아가 지랄을 해서 왔다고.”

“그, 그람까지 가지고? 칼릴을… 다치게 하려고 온 거 아니야?”

불신 섞인 눈빛에 지크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리안이 움찔 굳어지며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하아.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이봐요. 내가 그 자식을 죽이려 여기까지 왔다면 그 자식을 만난 순간 죽여 버렸어요. 필멸하는 신체를 가진 그 자식 따위를 상대로는 그람을 뽑을 필요도 없어요.”

“그, 그랬다간 이쪽 차원 전체가….”

“이런 하찮은 차원 따윈 알 바 아니에요.”

그러면서 그가 다시 아리안의 턱을 잡아 얼굴을 돌리게 했다. 시무룩하게 젖은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요. 칼릴의 신체는 이미 여기에 많이 동화되었어요.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요.”

지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젠 여기에 많이 유착되어서 이곳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아직 신체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아 질량을 유지하고는 있는 모양인데, 그게 더 나빠요. 아리안, 지금 당신의 상태로는 그런 고질량을 감당 못 할 테니까요.”

“내가 치료할 수 있어….”

“알아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 이상 당신 몸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에요. 신격을 잃은 자들의 말로까지 내가 말해 줄 필요는 없잖아요?”

아리안이 겁에 질린 것처럼 입술을 떨었다.

지크가 느리게 아리안의 턱을 놓았다. 놓여나자마자 아리안은 그에게서 물러나 구석으로 피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지크가 그 꼴을 노려보았다.

“난 당신한테 충고해 준 건데 그 태도는 뭐예요?”

“너야말로 충고하는 태도가 버릇없잖아.”

아리안이 그를 경계하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지크가 가소롭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이젠 당신한테 그런 말 들을 급 아니에요.”

“잘난 척은….”

아리안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아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크가 목깃 안쪽으로 손을 넣어 차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가볍게 잡아당기자 가느다란 은줄이 툭 끊어졌다. 그는 그것을 아리안에게로 건넸다.

“자요.”

아리안은 잠시 지크의 손과 얼굴,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목걸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건 왜?”

“성물이요.”

그 대답에 아리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단 말인가?

“뭐 해요? 빨리 받아요.”

아리안은 엉겁결에 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은줄은 지크의 체온 덕에 미지근했다. 은줄 끝에는 새끼손톱만 한 작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세 개의 점으로 단단하게 서로 얽힌 매듭 모양의 펜던트.

트리니티 매듭이었다.

삼 원소, 세 영역, 그리고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오래된 성물.

이런 걸 여기서 보다니.

아리안은 지크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

“이쪽으로 소환될 때 쓰인 거예요.”

“네가?”

“그럼 또 누가 있겠어요?”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리안의 심장이 철렁했다. 진짜 신체를 가지고 차원을 넘어온 것이 아니니만큼 소환될 때 쓰인 매개물은 중요하다. 지크가 굳이 이걸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녔을 만큼.

“이런 걸 왜 나한테….”

“확대 해석하지 말아요. 내 상태 보면 몰라요? 별거 아니라구요. 어차피 여기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고….”

소년 기사가 차가운 얼굴로 빈정거렸다.

“아무튼 그거면 어느 정도 오염을 막아 주겠죠.”

“고마….”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요. 잘 가지고 다니기나 해요.”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당신도 느꼈죠? 이 성채 자체가 심상치 않아요. 칼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아리안의 숨이 가빠졌다.

파살리아 성에 드리운 암운.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칼릴 때문이 아니야. 여기에… 우리 같은 자가 또 있어.”

그 말에 지크의 검은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리안이 약간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한 쪽은 아니야. 오래전에 타락한 자일 거야. 역병과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었어.”

“궁정 마법사 얘긴가요?”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어요. 둘째 왕자부터 시작해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지크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는 그것을 숨기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찮은 인간끼리의 권력 다툼 따위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그 궁정 마법사….”

“짐작 가는 데가 있어?”

“없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여러 가지죠. 별것 아닌 타락한 그림자의 찌꺼기거나, 아니면 암흑물질이 뭉쳐서 태어난 오물 덩어리일 수도 있어요. 물론 오래전에 추락한 악신일 수도 있고요.”

거기까지 말한 뒤 지크는 입을 다물었다. 아리안도 침묵했다.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그들의 전쟁 또한 역사가 깊었다. 과거 신이라 불리던 수많은 자들이 패배하고 추락했다. 어떤 자들은 영원히 죽어 사라졌고 어떤 자들은 권능을 잃고 필멸하는 존재가 되어 스러져 갔다. 그리고 어떤 자들은 살아남았다.

“여기 차원까지는 어림잡아도 4억 5천만 광년이 넘어요. 그 정도를 추락하고도 살아남았다면 보통 놈은 아니겠죠. 최소한 칼릴 만큼의 질량을 가진… 어쩌면 그 이상의.”

지크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추락할 당시 그랬다는 의미에요. 지금은 어차피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닐걸요. 당신도 알다시피 지난 삼백 년 동안 다른 차원으로 쫓겨난 건 우리가 모두 아는 놈들뿐이에요. 그렇다는 건 그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정말 오래전에 추락했다는 거고, 신체가 남아 있었다면 진작에 흐트러져셔 폭발해 버렸거나 아니면 블랙홀이 됐겠죠.”

그가 습관적으로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그러다가 아리안에게로 성큼 다가가서 찌푸려진 눈썹 사이를 쿡 찔렀다.

“괜한 고민은 그만두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봐요.”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쿵쿵쿵 문을 두드렸다.

지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썹이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제기랄. 가만 놔두질 않는군.”

그가 낮게 혼잣말하며 아리안에게서 물러섰다. 그의 등이 문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아리안은 그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선 지크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 해요?”

그러면서 그가 아리안의 손을 가리켜 보였다. 아리안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무심코 시선을 움직였다가 아직도 자신이 꽉 움켜쥐고 있는 트리니티 매듭을 발견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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