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58)화 (58/130)

#58

아리안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닛사가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왕자의 수하는 호수의 요정이다. 그들 요정 일족이 왕국의 신전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건 오래된 일이지.”

가파른 계단이 끝나가며 문이 보였다. 그녀의 걸음이 약간 느려졌다.

“그는 오래된 신전의 성물을 가지고 있다 말했다. 그걸 네게 전하고 싶다는 말도. 그런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리안을 향해 물었다.

“짚이는 데가 있느냐?”

짚이는 데가 있냐고?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성물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지크가 꺼낼 만한 핑계였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손톱을 잘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는 적당히 사실을 감추면서 대답했다. 다행히 닛사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문을 열기 전 아리안에게 경고했다.

“허튼 말은 하지 말아라.”

“그럴게요.”

당연히, 아리안은 입조심하는 데에 몹시 자신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채워진 넓은 방이 나타났다.

커다란 카우치 소파에 소년이 앉아 있었다. 주홍색 램프 불빛이 소년의 섬세한 옆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방은 그 얼굴을 알아볼 만큼 충분히 밝았다.

아리안은 떨어질 뻔한 심장을 간신히 주웠다.

지크가 맞았다. 각오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이 거세게 뛰었다.

“신관을 데려왔습니다.”

닛사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아리안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긴 시간을 드린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닛사가 지크를 향해 그렇게 경고한 뒤에 몸을 돌려 방을 떠나갔다.

문이 닫힌 순간 아리안은 막혀 있던 숨을 난폭하게 토해냈다.

“지크!”

그 외침에 지크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훤칠한 몸 위로 머리가 불쑥 올라갔다. 표정 없이 무미건조하던 얼굴 위에 마치 비웃음 같은 흐릿한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가 성큼성큼 아리안을 향해 다가왔다.

아리안은 무심코 뒤로 움찔 물러섰다. 금방 등이 벽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지크는 아리안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서더니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울여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참 나….”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음 소리를 냈다.

“메데이아 말이 진짜였군요.”

“메, 메데이아를 만났어?”

“썩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어요.”

지크가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그가 팔을 불쑥 뻗어 아리안의 턱을 움켜잡았다.

아리안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안의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여 가며 살폈다.

“어이가 없네요. 정말이었어. 정말 진짜 몸을 갖고 여기까지 왔잖아?”

아리안이 입술을 깨물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크는 순순히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다시 팔짱을 낀 그가 비딱하게 선 자세로 눈만 내려 아리안을 훑었다.

“권능도 없이 잘도 이런 미개한 차원에서 지내고 있었군요.”

그러면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줏빛 고상한 이마를 한 소년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하찮은 인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취급까지 받아 가면서….”

“너야말로 여긴 왜 온 거야?”

그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은 아리안이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 몸은 대체 누구 거고?”

“잠깐 빌렸죠.”

그가 양팔을 벌려 보였다. 아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렸다고? 설마….”

“오해하지 말아요. 금지된 걸 하지는 않았으니까. 난 정당하게 넘어왔어요. 이건 죽은 몸이에요. 잠깐의 생명을 연장해 준 대가로 몸을 빌렸을 뿐이라구요.”

아리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지크는 마치 보여 주듯이 양팔을 벌린 채 아리안이 자기 몸을 구석구석 살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아리안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에 닿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지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으면서 오른손으로 그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해 온 애검이 그의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아리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아랫입술이 화난 것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그람은 어떻게 갖고 왔어?”

“이건 메데이아의 도움이에요.”

지크가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걸요. 아니. 애초에 올 생각도 안 했겠죠.”

“메데이아가?”

아리안의 얼굴에 놀라움과 그리움이 함께 떠올랐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그 감정의 동요는 알아차리지 못하려야 그러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메데이아는 잘 지내?”

“잘 지내죠. 누구랑은 다르게.”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날 여기 보낸 게 그녀인걸요.”

아리안의 입이 벌어졌다.

“왜, 왜?”

“왜긴요.”

지크가 짜증과 빈정거림을 함께 담아 대꾸했다.

“그 마녀가 설마 이 차원에 선과 질서를 가져오라고 날 보냈겠어요? 당신 때문이죠. 당연히. 애초에 당신이 여기 오도록 도와준 게 메데이아라면서요?”

쌍꺼풀 없이 긴 눈이 아리안을 스윽 바라보았다. 동공이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에 번득이는 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그가 칼을 놓고 대신 팔짱을 꼈다.

“재심 청구를 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은 거 알죠? 거기다 아직 세 번째 동의인도 못 구했다면서요?”

“아직이긴 한데….”

아리안이 은근슬쩍 기대를 담아 지크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지크는 단칼에 그 기대를 잘라 버렸다.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거 바라지 말아요. 난 죽었다 깨어나도 칼릴 놈을 위한 재심 청구에는 동의 안 할 거니까.”

아리안의 얼굴이 단박에 시무룩해졌다. 지크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신전 기사단 출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그런 걸 부탁할 생각이 들어요?”

“아직 부탁 안 했잖아.”

“그러려던 눈빛이었잖아요.”

그러면서 지크가 대뜸 손을 다시 뻗어 아리안의 뺨과 턱을 커다란 손으로 한꺼번에 움켜잡았다. 아리안이 인상을 쓰면서 뒤로 물러나려 하자 반대편 팔을 그의 허리에 감아 끌어당겼다. 몸이 가까워졌다.

“왜 이래….”

“하하, 참 나.”

지크가 허리를 구부려 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리안은 그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얼굴이 꽉 붙잡혀 있던 탓에 소용은 없었다.

“메데이아가 걱정할 만하네요.”

지크가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로 낮게 속삭였다.

“칼릴하고 잤죠?”

그 질문에 아리안의 얼굴에 확 불이 들어왔다. 삽시간에 이마 끝부터 턱 끝까지 죄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성교했냐고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덧붙이는 것과 함께, 지크가 아리안을 탁 놓았다. 아리안은 놓여나자마자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치심이 심했던 탓에 눈동자까지 축축했다. 지크는 그 젖은 눈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꼴을 보면 뻔하네요. 당연히 했겠죠. 설마 여기 인간하고 뒹굴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 정도로 당신이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눈이 아리안을 살폈다.

“그렇죠?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아, 아니야.”

“하아. 다행이에요.”

지크가 과장된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가락이 습관처럼 애검 그람을 만지작거렸다.

“메데이아가 그랬거든요. 만약에… 그런 추저분한 짓이 생겼더라면….”

그가 빙긋 웃었다.

“차원을 찢어서라도 다시 데리고 오라고요.”

아리안의 입술이 떨렸다. 시선이 저절로 지크가 만지작거리는 검으로 가서 닿았다. 차원을 찢는다는 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저 검으로 파프니르를 베었을 때, 파프니르의 신체를 이루는 질량이 분포하던 수천 개의 차원이 한꺼번에 찢겨 나가며 수십억 개의 별들이 막대한 초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그 살해가 이루어졌던 차원은 이제 남아 있지조차 않았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곤 했다. 그라들롱이 그의 인간 딸의 정결성을 되찾기 위해 그 더러운 일이 벌어졌던 차원 자체를 물밑으로 가라앉혀 지워 없애 버린 것처럼.

아리안은 진정하기 위해서 아주 조금씩 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야. 안 그랬어.”

“그래요. 그럼 역시 그 오염은 칼릴 때문이겠군요.”

“…뭐?”

오염이라니?

아리안은 떨떠름하게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봐요, 아리안. 나한테도 눈이 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그놈을 못 봤을 것 같아요?”

아리안이 핫, 하고 눈을 크게 뜨자 지크가 빈정거렸다.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다고 생각해요? 지난 며칠 동안 그 자식은 또 어떻게 굴었는지 알고요?”

둘이 벌써 만나 한바탕 드잡이질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리안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가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지크가 참 나,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멍청이로 보여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긴. 생각이란 게 있었다면 이런 미개한 차원까지 그런 꼴로 기어들어 오진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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