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57)화 (57/130)

#57

아리안은 순순히 침실까지 자기 발로 걸어 따라왔다. 침대 앞에서 아리안이 대공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혼자 다니면 안 돼. 닛사 경하고 오스발 경을 꼭 데리고 다녀.”

대공은 걱정이 가득 담긴 그 무구한 눈동자 앞에서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아리안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키스했다.

젖은 입술을 마주 댄 채 대공이 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내게 거짓말하지 마. 숨기지도 말고.”

“알… 겠어….”

아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파살리아 어디에나 눈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눈이든 아니면 마법사들의 가짜 눈이든 간에. 파살리아에는 소문만큼이나 공공연한 비밀도 많았고 비밀을 지키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오로지 혼자만이 간직하는 것이었다.

대공은 오스발을 시켜 하인을 한 명 매수하게 했다.

이 파살리아에서 가장 발이 넓은 사람은 왕도 마법사도 아닌 하인들이었다. 그중에 성의 램프 기름을 갈고 벽난로의 장작을 채워 넣는 하인들이야말로 왕의 가장 깊은 내실에까지 드나들 수 있는 파살리아의 눈과 귀였다.

오스발이 매수한 하인도 그중 하나였다. 하인은 은화 주머니를 대가로 둘째 왕자의 거처를 드나들며 동향을 살펴 오스발에게 전달했다.

은밀한 거래는 주로 성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어두운 골목길, 사람으로 가득 찬 냄새나는 주점, 사람이 없는 시장 한구석, 해가 없는 이 극야에는 어디에서든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둑한 오후, 파살리아에는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녹다 만 질퍽거리는 눈이 사방을 진창길로 만들었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하수도가 막혀 구정물이 넘쳤다. 성으로 통하는 길마다 마차와 말과 사람이 한데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여긴 눈까지도 기분 나쁘게 내리지 않습니까?”

오스발이 망토의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그가 어깨에 쌓인 축축한 눈을 한 번 탁탁 털어 낸 뒤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이미 대공과 닛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벽난로 곁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닛사가 오스발을 향해 빈 의자 하나를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오스발은 의자에 앉는 대신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탁자에는 몇 가지 음식과 술이 놓여 있었다. 음식은 절반 정도 식어 있었지만 술은 아직도 뜨거웠다. 오스발이 빈 컵을 당겨 와 거기에 뜨거운 포도주를 붓고 물을 약간 섞었다. 독한 향기를 뿜는 술을 단번에 들이켠 그가 손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도록 썰려 있는 사슴 고기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을 떼어 내 입에 넣었을 때, 닛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땠느냐?”

오스발이 고기를 씹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대공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딱히 수상한 거동도 없고, 그렇다고 파살리아의 다른 귀족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컵에 담긴 술을 마시는 둥 마는 둥 입술만을 적시고 있던 대공이 고개를 돌려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이 말을 이었다.

“자기 거처에 틀어박혀서 별로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는군요.”

대공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좁아졌다.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오스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에 놓여 있던 깨끗한 수건에 손을 닦고서 대공의 잔에 포도주를 더 따라 주었다.

버터를 발라 튀긴 납작한 밀빵에 두꺼운 햄을 끼워 먹고 있던 닛사가 대공을 향해 말했다.

“전하. 이왕자는 이전부터 중립을 지켜 왔습니다. 파살리아의 궁정 귀족들이나 다른 힘 있는 영주와도 친분이 적고요. 더구나 파살리아에는 거의 머물지조차 않는데… 이제 와서 그자가 수상한 짓을 꾸밀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 생각이야 바뀌는 거지요.”

그러면서 오스발이 술 주전자를 들고 닛사의 옆으로 걸어가 그녀의 잔도 채워 주었다. 닛사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거였으면 진작 바뀌었겠지.”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공이 입을 열었다.

“이왕자가 데려온 부하들은?”

그 질문에 닛사와 오스발이 동시에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뒤 오스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술 주전자를 탁상에 내려놓았다.

“수정 호수의 요정들이 맞기는 한 모양입니다. 뭐, 사실 거기까지는 정확하게 알기 힘들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따로 수상한 짓을 하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대공이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흐음, 하고 낮게 신음했다.

오스발의 보고나 닛사의 의견이나 가리키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이왕자는 오랫동안 굳건한 중립을 지켜 왔으며 이는 요정 혼혈이라는 그의 태생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다음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간이 지긋이 좁아졌다.

만일 아리안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대공은 그 말이 그와 이왕자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공은 아리안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가 오늘 둘째 왕자의 일행이 오는 걸 봤잖아. 그중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었어….’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서글픈 목소리를 떠올리자 누군가 그의 머릿속에 정을 박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대공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닛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한동안 그가 저주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기에 닛사의 반응은 더 예민했다.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오스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섯 번째 치료는 언제랍니까? 이전 치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희생제 때문에 날이 늦춰졌다는군.”

닛사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의 미간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서 대공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전하. 진통제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야.”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닛사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약간 띄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대공은 조금 전 오스발이 채워 놓은 술잔을 들어 올려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계피, 꿀, 그 외 달콤한 향기를 뿜는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통과하며 위장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화끈하게 덥혔다.

“이왕자와 자리를 마련해 봐. 조사도 계속하고. 정말로 이상한 게 있다면 뭐라도 걸리겠지.”

그는 오스발을 향해 그렇게 명령한 뒤 몸을 일으켰다.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천천히 방을 떠나가는 대공의 흔들리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완전히 떠나간 뒤 오스발이 닛사를 향해 물었다.

“…제가 오기 전에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닛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둘 다 동시에 대공이 남긴 술잔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먼저 이왕자에게 연락하여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이왕자가 직접 대공의 거처까지 찾아온 것이다.

***

닛사가 아리안을 찾아온 것은 정오가 아직 못 된 때였다.

게으른 궁정 귀족들이라면 이제야 느지막이 일어날 시각이었으니 누군가를 방문하기에 그다지 적절한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닛사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아리안을 찾은 것 자체가 때 이른 방문객 탓이었던 까닭이다.

아리안은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회의 밤 이후 그는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었다. 대공이 또 화를 내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지크를 만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 치열한 고민은 며칠 내내 아리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크의 목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에게 먼저 접촉하는 것은 사서 화를 부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크는 완전히 말이 안 통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어쩌면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혹시 지크의 목적이 아리안이나 칼릴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면 조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아리안에게는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닛사가 그에게 불청객의 방문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아리안은 닛사의 뒤를 따라가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왕자 전하께서요?”

“정확히는 이왕자 전하가 아니라 그 수하가 널 찾더군.”

“나, 날 왜요?”

아리안은 무심코 말을 더듬었다. 닛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지크였다.

‘설마.’

아리안은 속으로 웅얼거렸다.

‘설마 연회에서 날 발견했던 걸까?’

머릿속이 수런거렸다.

우뚝 걸음을 멈춘 닛사가 몸을 돌려 아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아리안이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굴었고, 아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을 밑으로 떨어트렸다.

지긋이 아리안의 수그린 정수리를 바라보던 닛사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연회에 몰래 숨어들어 갔던 걸 안다.”

아리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네가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다만 난 네가 대공 전하를 위해 여기 있다던 말을 믿어.”

그것은 절반의 신뢰와 절반의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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