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56)화 (56/130)

#56

“그냥 나한테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건데….”

그 모습에 가장 당황한 것은 오스발이었다. 그는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공의 옷자락에 매달린 아리안에게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리안이 대공의 침대를 함께 쓰는 것을 그도 알았다. 지금 이 모습은 주군의 은밀한 사생활에 가까웠고 그것을 지켜보는 건 대단한 실례였다.

다행히 그가 더한 실례를 범하기 전 대공이 황급히 오스발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오스발은 내실을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이곳에서 달아나다시피 뛰쳐나갔다.

문이 다소 거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대공이 신경질적으로 아리안의 양팔을 붙잡아 바닥에서 일으켰다.

대공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무표정했으나 푸른 눈동자는 불길이 쏟아질 듯 일렁거렸다.

“호위를 따돌리고 성을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까진 봐줬어.”

그가 낮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젠 내 기사들의 눈까지 속이고 국왕과 궁정 마법사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곳엘 와?”

아리안이 히끅, 딸꾹질을 했다. 동시에 대공이 움켜잡고 있던 아리안의 양팔을 난폭하게 놓았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미, 미안….”

“내가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벌을 줄 수밖에 없게 된 꼴을 보니 기분이 어떤가?”

죄책감으로 아리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리안은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대공이 팔짱을 낀 채 아리안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이 그 무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재차 사과하려고 한 순간 대공이 물었다.

“왜 연회에 가려고 했던 거지?”

그리고 그는 아리안이 또다시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차갑게 잘랐다.

“연회가 궁금했다는 둥 하는 거짓말은 집어치워.”

아리안의 모든 거짓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그 한마디에 아리안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지크에 대해 대공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지크는 과거 신전 기사단의 둘째 검이었고 그보다 더 전에는 차원 마수 파프니르를 살해한 적이 있는 이름 높은 용 살해자이며 칼릴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고?

이곳에 올 이유가 없는데도 그의 애검 그람까지 가지고 왔다고?

아마 칼릴을, 혹은 자신을 찾아온 것 같다고? 그리고 그 목적은 아직 알 수 없다고?

기억이 없는 대공에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아리안은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그동안 대공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 그게….”

아리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둘째 왕자의 일행이 오는 걸 봤잖아. 그중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었어….”

대공의 눈이 점점 더 서늘해졌고 아리안의 말은 갈수록 횡설수설했다.

“내, 내가 이상한 걸 봤거든. 그, 둘째 왕자가 데리고 있는 기사들 중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당신한테 위험할까 봐 내가 그 사람을 확인하려고….”

“수상한 사람이라고? 네가 아는 자였나?”

“그런 거 같아서 확인하러 갔는데….”

대공이 미심쩍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둘째 형님이 데려오신 일행은 전부 얼음 호수의 요정족이다. 넌 호수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했고. 그것도 거짓말이었나?”

“아니야!”

놀란 아리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이상했어.”

대공의 싸늘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아리안의 눈이 떨렸다. 그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며 딴 곳을 보았다.

식은땀으로 이미 온몸이 축축했다. 긴장감에 무릎까지 후들거렸고 손발이 차가웠다. 더는 이 거짓말을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끌어모아 대공에게로 몇 걸음 다가갔다. 둘의 몸이 가까워졌다. 아리안은 그의 체온이 느껴질 거리까지 비슬비슬 걸어갔다.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팔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아리안은 있는 힘껏 손을 내밀어 대공의 가슴팍을 살짝 건드렸다. 대공의 몸은 석상처럼 단단했으며 미동조차 없었다. 아리안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손바닥 전체를 천천히 그 가슴팍에 붙였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약간 더 가까이 접근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둘의 몸이 붙을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대공이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리안에게서 풍기는 타인의 냄새를 맡았다. 갖가지 음식 냄새, 향신료와 기름 냄새, 약간의 땀 냄새. 그것은 그를 몹시 불쾌하게 했으며, 아리안이 미안하다며 그의 몸을 쓰다듬을 때 그 불쾌감은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으리만치 강해졌다.

대공은 성큼 뒷걸음질 쳤다. 둘의 몸이 삽시간에 떨어졌다.

아리안이 안타깝게 아, 하고 탄식했다.

대공이 탁상의 종을 흔들었다. 곧 하인이 달려왔다.

“목욕 준비를 해라.”

야밤의 난데없는 명령에도 하인은 군소리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꾼 두 명이 나무 욕조를 가지고 와 내실 가운데에 놓았다. 그들이 펄펄 끓는 물을 길어와 욕조를 채우기 시작했다. 다른 하인 한 명이 금으로 된 쟁반을 높은 탁자에 올려 두었다. 쟁반 위에는 목욕 소금과 꽃잎이 잠겨 있는 향유, 비누와 면도칼, 솔, 깨끗한 수건 따위가 놓여 있었다.

일꾼들이 목욕 준비를 하는 내내 아리안은 내실 구석의 그림자 밑에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일꾼들이 모두 물러난 뒤, 대공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향해 욕조를 가리켜 보였을 때까지도 그랬다.

아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공은 굳건했다. 욕조를 가리키는 손끝 또한 미동이 없었다.

결국 아리안은 그가 보는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목욕통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물은 살이 익을 것처럼 뜨거웠다. 대공은 팔짱을 끼고 아리안이 몸을 씻는 것을 감시했다.

침묵 속에서 물이 철썩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리안이 비누로 머리카락까지 전부 깨끗이 헹구어 낸 뒤에 욕조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도 대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쪽으로 와.”

대공이 건조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명령했다.

아리안은 수건으로 엉성하게 몸을 가린 채 물을 흘리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돌바닥은 차가웠다. 뜨거운 물로 달아오른 몸통은 가을의 사슴처럼 살이 올라 있었으며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방은 벽난로의 불길로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데일 듯이 뜨거운 물속에 잠겨 있던 아리안의 피부에는 희미하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아리안은 마치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두 번 더 그것을 반복한 끝에, 완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입술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대공의 생각은 읽기 어려웠다. 갑작스레 아리안을 목욕시킨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아리안은 그저 그가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화가 났으리라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팔짱 끼고 있던 대공이 팔을 풀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아리안의 왼쪽 옆에 섰다. 시선이 수건으로 가려지지 못한 아리안의 몸 나머지 부분을 관찰했다.

“그래서, 연회에서 그자와 만나 얘기했나?”

“아니….”

아리안이 고개를 젓자 대공의 반듯한 얼굴 위, 짙은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아리안은 한 번 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얘기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난… 그냥 그런 걸 알 수 있어.”

“그렇겠지. 넌 신관이니까.”

그 말에 아리안은 입을 다물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공은 그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닛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호수 반대편에서 온 자들. 신화와 전설 속의 영웅들. 이제 와서 아리안이 이왕자가 끌고 온 얼음 호수의 요정 족속들에게 관심을 보일 만한 이유라고는 뻔했다.

대공의 눈에서 빛이 지워졌다.

“그자의 인상착의를 닛사에게 말해 둬.”

그 순간 아리안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댕그랗게 커져 있었다. 입술도 멍하니 벌어져 안쪽의 혓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대공이 천천히 아리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젖은 머리칼에 코를 대고 살짝 냄새를 맡았다. 거기서는 이제 익숙한 비누와 향료 냄새가 났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떼어 내 아리안의 잘게 소름이 돋은 어깨에 덮었다. 아리안이 녹색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믿어 주는 거야?”

그 질문에 대공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긴 눈꼬리 속 푸른 눈동자가 아리안을 향했다.

“왜? 이번에도 거짓말인가?”

“아니야!”

아리안이 망토 자락을 와락 움켜잡으면서 바락 외쳤다. 그 바람에 앞을 가리던 수건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조금 전 기세 좋게 외친 것과 달리 그가 몸을 떨면서 대공의 망토로 몸을 가리려 했다.

대공이 두 손으로 그 망토 자락을 느리게 벌렸다. 그 손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아리안이 결국 힘없이 망토를 놓았다. 검은 망토 안쪽으로 선명한 흰 몸이 드러났다. 대공은 그 빛나는 몸을 눈으로 훑었다. 짧은 한숨이 젊은 남자에게서 새어 나왔다. 그는 마치 눈부신 것을 가리듯이 망토를 도로 여미고 대신 아리안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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