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연회장을 채운 사람들은 대다수가 파살리아 궁정 귀족이었으나 드물게 외부의 영주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하나같이 좋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절반 정도는 이미 취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취해 가는 중이었다.
아리안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연회장 구석을 통해서 새앙쥐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 연회에 분명 참석했을 국왕이나 아니면 궁정 마법사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둘 다 연회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는 몸이 안 좋으신가 보군요.”
“왕자의 귀환 연회인데….”
아리안은 두 남녀가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그들 사이에 있는 빈 접시를 낚아챘다. 얼굴이 많이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서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모든 하인들은 절대 윗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구부정하게 고개와 허리를 구부리고 다녔으므로 아리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네 번째 접시를 옮겼을 때, 아리안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악사가 음악을 바꿨다. 경쾌하던 음악이 물 흐르듯 유려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악사가 들고 있는 류트는 현이 23줄이었는데 아라비아의 우드를 닮은 것이었지만 훨씬 더 복잡했다. 그녀의 실력은 제법 뛰어났다. 정교한 선율은 오래전 콘스탄티노플에서 지내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장대한 임페리움 로마노룸, 노바 로마를 찬양하던 수많은 음유 시인들.
아리안은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출입문 쪽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서기 시작했을 때 재빨리 구석으로 숨었다.
둘째 왕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붉은 망토에 보라색 튜닉을 입었다. 그것은 왕자의 몸에는 약간 큰 것처럼 보였고 그가 걸을 때마다 보석 허리띠가 덜걱거렸다.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따르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머리가 검고 키가 컸으며 검을 차고 있었다.
아리안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들이 모두 요정 일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아리안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리안의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뒤통수나 옆얼굴을 먼 거리에서 흐릿하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팔에 가득 안고 있던 빈 접시를 탁자에 대충 밀어 올려놓고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슬그머니 연회장 앞쪽으로 둘째 왕자 일행을 따라 이동했다.
둘째 왕자는 중간중간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느리게 걸었다. 몇몇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키스를 했고 몇몇은 단단히 포옹을 했다.
아리안은 사람들이 모두 둘째 왕자를 바라보거나 또는 목소리를 낮춰 자기들끼리 둘째 왕자에 대해 속삭이는 동안, 눈에 띄지 않고 상석에서 가까운 태피스트리 앞까지 기어 왔다.
그리고 그제야 이왕자 일행의 면면이 낱낱이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비명을 참았다.
지크가 맞았다!
믿기지 않았다. 지크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아리안은 몇 번을 다시 살폈으나 그 낯익은 얼굴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지크는 둘째 왕자의 가장 가까운 곁에 서 있었고 다른 파살리아 궁정 귀족들과 달리 소매가 좁은 튜닉을 입었다. 그는 아리안만이 알아볼 수 있는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의 저 검. 못 알아보려야 그럴 수도 없는 지크의 검이었다.
‘그람까지 가지고 오다니….’
파프니르를 살해한 명검, 그람의 위력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 밀도가 대략 청색 초거성 정도 되는 거대한 차원 마수의 외피를 찢어 낸 저 칼을 가지고 그가 이곳 차원까지 넘어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설마 칼릴을….’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기 위해서 손바닥으로 입과 코를 한꺼번에 꽉 눌러 막았다. 그리고서도 한참 동안 어깨가 씨근씨근했다.
아리안은 얼마간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두 손을 얼굴에서 뗐다. 당장 칼릴에게 가야 했다. 그에게 위기를 알려야 했다.
아니. 그보다는 먼저 지크를 설득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칼릴이 기억을 잃은 지금 지크가 그를 죽이려고 든다면 그 누가 그것을 막겠는가?
‘말도 안 돼. 판결은 그냥 칼릴을… 추방하는 거였어. 죽이는 게 아니라.’
아무튼 움직여야 했다. 이곳에서 접시나 나를 시간이 없었다.
아리안은 의자 뒤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그가 일어서려 한 것과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일으켰다. 그는 그것이 게으름 피우는 그를 질타하는 다른 일꾼이거나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게으름 피우던 게 아니에요. 바닥에 접시가 떨어져 있어서 그걸 주우려고….”
무작정 변명을 주워 삼키던 그의 입이 그대로 굳어졌다.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대공이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가느다란 눈은 차가웠다. 그가 아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리안에게는 약간 커서 헐렁거리는 소매와 목깃을 더 유심히 보았다.
아리안의 눈이 떨렸다.
그는 연회에 데려가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던 대공의 등을 떠올렸다.
“이, 이건… 그러니까… 이게….”
목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공의 말을 무시하고 연회에 몰래 숨어들었으니 만일 그가 정말로 여기 귀족들처럼 그의 죄를 물으려 든다면 아리안은 당장에 죽은 목숨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간에 지크에게 자신의, 그리고 칼릴의 위치까지 발각되리라.
아리안은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대공이 한발 빨랐다. 그가 아리안의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끌어냈다. 아리안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연회장의 만취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공의 거처까지 돌아오는 기나긴 길 도중, 아리안은 몇 번이나 대공에게 상황을 변명해 보려고 했다.
“여기 연회가 궁금했어….”
또는,
“광대가 온다고 하잖아. 신기해서….”
아니면,
“일손이 부족하대서 도와주려고….”
물론 대공은 그 어느 변명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들은 대공의 거처 탑에 도착했다.
연회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처럼 탑은 조용했다. 대공은 다섯 개 층을 단번에 올라갔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리안은 얼굴이 시뻘게지고 땀을 흘리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대공이 그를 내실 안으로 밀어 넣고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은 어깨를 움츠리고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아리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대공은 그의 사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벽난로로 걸어가 초에 불을 붙였다.
어둡던 내실이 약간 밝아졌다. 대공이 손에 든 유리 촛대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출렁거렸다.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은 석상처럼 고요했다.
당연히,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아리안을 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명령을 무시한 죄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유리 촛대를 탁상에 내려놓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아리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리안은 괜히 더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화내는 대신, 대공은 몸을 돌렸다.
“오스발!”
그가 부하를 불렀다. 얼마 안 있어 허리에 검을 찬 젊은 기사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전하, 부르셨….”
그가 대공의 곁에 엉거주춤 선 아리안을 발견하고는 입을 벌렸다. 대공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내가 네게 내린 명령을 말해 봐라.”
그 질문에 오스발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연회에 갔던 대공이 이 자리에 있었고 자기 방에서 얌전히 자고 있다고 보고 받은 신관은 하인들이나 입는 엉뚱한 차림으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어트린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대공은 무표정했으나 그를 오래 보아 온 오스발은 그의 분노를 알아차렸다.
오스발이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관을 보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에 대공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는 부하의 실수를 하나하나 지적해 가며 트집을 잡는 성격은 아니었다. 상벌은 명확했으나 둘 중 어느 것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늘 밤에 신관의 방을 확인한 자가 누구지?”
“테사와 오뎃사입니다, 전하.”
둘 다 대공을 오랫동안 섬겨 왔으며 대공의 밑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가신들이었다.
“둘에게 채찍질을 한 뒤에 검을 빼앗고 칠 일간 마구간으로 보내라.”
오스발이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사에게서 검을 빼앗는 것은 가장 무거운 명예형(名譽刑)이었다. 작위를 받은 기사이자 귀족에게 일꾼들이나 하는 일을 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공의 유일한 치료자인 신관을 지키는 임무의 막중함 또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만큼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의 무거움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발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부하들의 검을 빼앗으러 가는 무거운 발을 붙잡은 것은 아리안이었다.
“안 돼!”
아리안이 다급하게 대공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그들에겐 죄가 없어.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내가 그들 눈을 속였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리안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