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대공은 관둬. 내 친구가 그러는데… 도르센 남자들은 여자를 다루는 방법이 좀 이상하대.”
“어떻게 이상한데?”
“걔가 일왕자의 연회에서 시중을 들었거든. 그때 들었대. 도르센 남자들은….”
“잠깐! 돼지치기가 듣고 있잖아!”
그들이 아리안을 향해 킥킥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 아리안의 팔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뭐 어때. 얜 어디 가서 말 옮기는 애 아니야.”
그러면서 그녀가 아리안의 눌러쓴 모자 위로 입술을 꾹 눌러 키스했다. 모두가 한바탕 깔깔대더니 참새 떼처럼 우르르 자리를 떠나갔다.
계단참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아리안은 얼떨떨하게 그녀가 키스했던 모자 위를 손바닥으로 쓸다가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람들이 분주히 마차에서 짐을 꺼내고 있었고 이왕자는 시종과 함께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기사 몇 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별생각 없이 그들의 팔락거리는 망토 자락을 쫓던 아리안의 시선이 문득 가장 선두에 선 한 명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때, 그가 투구를 벗었다.
“어?”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벽에 찰싹 달라붙어 창문 틈으로 얼굴을 바짝 밀어붙였다. 시선이 조금 전 투구를 벗은 기사의 옆얼굴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는 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키가 컸고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고상한 진줏빛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은 약간 구불거리는 곱슬머리였다.
곧 그들의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맙소사.”
아리안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전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남자를 떠올렸다. 매우 익숙한,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
“…왜 여기 있지?”
멍청히 제자리에 서 있던 것도 잠시, 아리안은 화들짝 몸을 돌려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내렸다.
긴 회랑을 잰걸음으로 걷는 와중, 아리안은 새삼스레 들썩거리는 성의 분위기를 느꼈다.
컴컴한 극야의 한낮, 항시 발소리를 죽여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램프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건물 안팎으로 램프가 걸려 주위를 밝혔고 회랑에는 향료가 담긴 아궁이가 놓였으며 벽마다 화려하고 밝은 빛깔의 태피스트리가 걸렸다.
아리안은 주위를 힐끔거리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뱀의 탑에 도착하자마자 대공의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 통로로 스며들었다. 그곳은 흥분된 바깥의 분위기와는 유리되어 조용했으며 텁텁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리안의 걸음마다 그 먼지가 조금씩 허공으로 흩날렸다. 아무래도 이곳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하인들이 청소를 게을리하는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대공에게 하인들의 게으름을 고자질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문은 대공이 말했던 것처럼 살짝 열려 있었다. 아리안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에 그 문을 밀어 열고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은 비어 있었지만 침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리안은 망설이지 않고 침실로 통하는 통로로 슥 들어갔다.
대공이 거기 있었다. 이미 발소리를 들었는지 아리안이 들어오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대공은 사냥복 차림이었다. 소매통이 좁고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튜닉에 눈에 띄지 않는 암녹색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가슴팍을 두른 가죽띠에 짧은 단도가 매달려 있었으며 부츠의 박차조차 떼지 않았다. 그의 단정한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으며 전신에서는 땀과 가죽, 피와 흙냄새가 났다. 그는 막 사냥에서 돌아온 젊은 남신처럼 보였다.
아리안은 그를 힐끔거리면서 약간 거리를 띄우고 멈춰 섰다. 대공이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아니….”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대공이 자신의 손등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가 나나?”
“조금. 하지만 괜찮아.”
“그럼 이리 와.”
그렇게 말하면서 대공이 팔을 뻗어 아리안을 확 잡아당겼다. 아리안은 불시에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흐린 촛불 아래에서 그가 아리안을 샅샅이 살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빈틈없이 눌러쓴 모자, 그의 몸에는 커서 제대로 맞지 않는 거적때기 같은 외투, 턱 아래까지 둘둘 감은 목도리, 손등을 거의 가리는 긴 소매 같은 것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손으로 한바탕 그것들을 더듬어 어디 한 군데 허술하거나 흘러내리는 곳이 없이 꽁꽁 여매져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대공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난폭한 몸수색을 당한 아리안은 떨떠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신이 풀린 거야?”
“음. 그래.”
희생제에서 국왕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근신을 명령받은 대공은 한동안 거처 밖으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었다. 대공은 내내 지루해 미치겠다는 듯이 굴었지만 그걸 믿고 있는 건 아리안뿐이었다. 사실상 그는 아리안을 자기 침실로 불러 놓고 음식을 먹이거나 아니면 그 다리 사이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 또한 아리안만 몰랐다.
“언제부터?”
“오늘부터.”
건성으로 대꾸한 대공이 못마땅한 듯이 희미하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아리안이 눈치를 보았다.
“왜 그래?”
그 질문에 대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 다니지 마. 호위를 데리고 다니라고 했지.”
“당신 기사들은 너무 눈에 띄어….”
“그편이 좋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들이라면 감히 도르센의 기사들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위험한 곳엔 가지 않을게.”
“파살리아에는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어.”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을 세게 끌어안았다.
벌어진 가슴팍에 코를 부딪치자 남자에게서 풍기는 사냥의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젖은 풀밭의 냄새, 우거진 숲의 냄새를 닮았다. 아리안은 킁킁거리면서 그 냄새를 맡다가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다시 떠올리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대공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러나 진득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아리안은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대공의 가슴팍을 밀어 약간 몸을 띄웠다. 대공은 의외로 쉽게 그를 놓아주고는 천천히 몸에 두른 사냥 도구들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뭘 잡았어?”
“이것저것.”
그가 한 발을 의자에 올리고 쇠로 된 박차를 풀어 내면서 대답했다.
“파살리아의 사냥터에는 짐승이 많지. 대부분은 순한 것이고. 큰 재미는 없어.”
그렇게 대꾸한 대공이 고개를 돌려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면서 눈꼬리가 접히고 눈웃음이 떠올랐다.
“왜? 여우 꼬리라도 가져다줄까?”
“아니야!”
아리안은 펄쩍 뛰었다.
여우 꼬리가 달린 모자나 목도리 따위를 예전에 그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짐승의 형태를 남긴 그 사치스러운 모피는 당연히 아리안의 취향은 아니었다.
“흐음.”
대공이 아리안의 팔짝 뛰는 모습을 곁눈질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스스로 벨트를 풀고 장검째로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튜닉 목깃에 달린 끈을 풀어 헤치고 두 팔로 단번에 튜닉을 벗었다.
몸을 조이는 가죽 튜닉을 벗어 던지고 셔츠와 바지 차림이 된 그가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육중한 흉곽이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천천히 오르내렸다. 목덜미에는 땀이 맺혀 있었으며 굵은 근육이 셔츠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만 또다시 대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조금 전에 봤는데. 둘째 왕자가 돌아온 거.”
간신히 꺼낸 그 말에 대공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리안은 그 눈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겠지? 응? 당신이 여기 왔을 때도 그랬잖아.”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연회가 있을 거다. 꽤 거창하게 꾸며 놨다더군.”
그러면서 그가 탁자 한쪽에 놓인 묵직한 주전자를 집어 들어 거기에 입을 대고 그대로 물을 들이켰다. 단번에 주전자를 절반 정도 비운 그가 쿵 소리가 나도록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아리안은 그 젖은 입술을 흘깃거리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게 대단하대?”
그는 혹시나 둘째 왕자의 귀환 연회가 이전 대공을 위해 열렸던 것보다 더 거창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공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대공에게서는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법 돈을 들여 준비한 모양이니 그렇겠지. 이 년 만에 귀환하는 것이니.”
아리안은 그것이 혹시 고도의 비아냥거림이 아닐까 잠시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공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에게 연회란 딱 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형제를 위한 연회라면 더더욱.
아리안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당신도… 가?”
“그래.”
“그럼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