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49)화 (49/130)

#49

아리안은 꽥, 하는 비명과 함께 침대로 나뒹굴었다. 그 위로 대공이 덮쳐 올랐다. 둘은 넓은 침대를 몇 바퀴 굴렀다. 한참 후에야 대공이 숨을 헐떡이는 아리안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아리안을 진정시키려고 아무 말이나 대충 꺼냈다.

“다음 치료는 언제 하지?”

그 질문에 아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흰 얼굴에 숨기지도 못하고 우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번 그 일 때문에 약간 늦어질 것 같아.”

아리안은 속상하다는 듯이 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염이 생각보다 심각했어. 날짜도 어긋나 버렸고….”

그러더니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날짜를 계산한다.

“아마 열두 날 뒤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까진 해야지.”

그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자꾸 늦춰지네. 시간도 별로 없는데… 걱정이야.”

대공은 그 속닥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몸 상태는 연일 최상을 갱신 중이었다. 등의 저주는 잠잠했다. 그 어떤 아편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고통은 흐릿해졌고, 수년간 그를 괴롭혀 왔던 환영과 악몽도 이제는 힘을 잃고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더 빨리 완치한다면 좋을 테지만, 대공은 서두르지 않았다. 인내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고 그는 기다리는 데에 자신이 있었다. 이 치료에 설령 평생이 걸린다 할지라도 흔쾌히 기다리리라.

“괜찮아.”

대공의 대답에 아리안이 눈을 반짝 뜨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그 눈을 향해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천천히 해도 돼.”

아리안은 잠시 대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시간이 없다니까. 아직 마지막 동의표도 얻지 못했고….”

그러면서 아리안은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나 기억이 약간이나마 돌아왔을까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공은 별다른 말 없이 아리안의 붉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아리안은 실망했으나 그래도 또 헛소리를 한다며 일축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둘째 왕자가 돌아온다는 얘길 들었어.”

“그래. 퀸트의 관문을 통과했다는 전서구가 어제 도착했으니 아마 사나흘이면 파살리아에 도착할 거다.”

“둘째 왕자가 요정족이라는 게 진짜야?”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낮게 웃었다.

“얼음 호수의 요정일족들이 그의 모계 혈통이냐는 질문이라면, 그래, 맞아.”

“얼음 호수….”

“가 본 적 있나?”

대공이 예리한 눈으로 아리안을 살피면서 물었다.

아리안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그자는 왜 오는 건데? 사람들이 그러던데 둘째 왕자가 파살리아를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진짜야?”

진득한 시선이 의심을 감추지 못하고 아리안의 표정을 훑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글쎄.”

대공이 입을 열었다.

“나도 파살리아를 떠난 지 오래되어 둘째 형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요정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애초에.”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리안을 안고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들은 이제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리안은 그의 팔을 머리 밑에 깔고 누운 채 대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째 형님은 파살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 이곳에 세력도 없고… 사실상 나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파살리아 밖에서 보낸 셈이지. 거기다 아슬랭의 요정 일족들은 그다지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도 않아.”

“아슬랭이라고?”

“그래. 요정의 영토지.”

대공이 조용히 대답했다.

“얼음 호수로 이루어진 불모지에 불과하다. 요정 외에는 아무도 살지 못해. 왕국 입장에서도 아무 쓸모 없는 땅이니 내버려 두는 셈이지.”

그가 손을 뻗어 아리안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희던 얼굴이 금방 발갛게 물들었다.

“이리 와.”

대공이 그를 끌어당겼다. 아리안은 얼결에 그에게 끌려가 단단한 가슴팍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이마에 턱이 부딪쳤다. 대공이 낮게 웃으면서 그의 허리를 양손을 잡아끌어 올리며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아리안의 옷을 느긋하게 벗기기 시작했다. 아리안의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대공의 입술이 그 불그레한 목덜미에 닿았다. 까슬한 입술이 부드러운 피부를 간지럽히듯 스쳤다. 아리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대공이 한 팔을 뻗어 침대의 휘장을 마저 내렸다. 두꺼운 휘장이 떨어지며 침대 속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리안의 얼굴은 선명했다. 그가 어깨를 떨면서 새 부리 같은 입술로 웅얼거렸다.

“왜, 왜 이렇게 자주 해?”

그 말에 아리안의 셔츠를 벗기던 대공이 멈칫했다. 그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뭘 자주 해?”

“이, 이거 말야. 저번에도 했잖아.”

“저번 언제?”

그 질문에 아리안이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양 몸을 숙여 대공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엊그저께 말이야. 그때도… 여러 번 했잖아.”

그 대답에 대공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더 듣지 않고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재빨리 아리안의 몸을 밑으로 깔아 눕혔다. 두 손이 껍질 벗기듯이 아리안의 옷을 벗겨 내던졌다.

“더 자주 할 수도 있어.”

하루걸러 한 번이 아니라 하루에 몇 번이라도…. 그 음탕한 속삭임에 아리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옷을 빼앗긴 흰 몸은 이미 긴장과 야릇한 기대감으로 땀이 스며 있었다. 대공이 그 위로 입술을 떨어트렸다.

***

어둑한 늦은 오후, 둘째 왕자 일행이 도착했다.

이는 예상보다 사흘 늦어진 도착이었는데 눈길에 마차가 미끄러져 시간을 한동안 지체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간신히 파살리아 성문을 통과했을 때 마중 나온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마차 꼴이 말이 아니었다. 흰색으로 칠한 뒤 금색과 녹색 장식을 덧댄 마차는 본디 몹시 화려했을 것이었지만 온갖 오물로 범벅되어 본래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마차는 심지어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기까지 했는데 마차 바퀴가 눈이 녹은 진창에 빠지며 주축대가 휘어진 탓이었다.

마차를 끄는 네 마리의 말들은 모두 지쳐 있었고 사람들도 딱 그만큼 피로한 안색이었다.

구깃구깃한 망토를 두른 기사 한 명이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갔다. 그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둘째 왕자가 마차 안에서 내려왔다.

아리안은 그 장면을 탑 계단참의 작은 쪽창 틈으로 훔쳐보았다. 아리안만이 아니라 탑의 창문마다 하인들이며 일꾼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성으로 들어오는 둘째 왕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비실비실하잖아.”

누군가가 실망한 듯이 중얼거렸다.

“국왕 씨에서 뭘 기대했는데?”

“아니… 첫째 왕자는 제법 훤칠하잖아. 막내 왕자야 두말할 것도 없이 미남이고.”

“요정 피가 잘못됐나 봐.”

그들이 킥킥거렸다.

그들의 시선 아래, 둘째 왕자가 어둑한 하늘을 등지고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일왕자보다 더 작았고 얼굴에는 혈색이 없었다. 녹색 비단 튜닉과 검은색 셔츠를 입었는데 그 두 색 모두 그의 얼굴빛에는 어울리지 않아 얼굴을 더 칙칙하게 보이게 했다. 물론 세상의 모든 피로와 고뇌를 짊어진 듯한 그 표정도 한몫했다. 그가 약간 비틀거리자 곁에 선 기사가 그를 부축했다.

기사의 팔에 몸을 기댄 이왕자가 고개를 들어 얼핏 탑 쪽을 바라보았다. 그 덕에 아리안은 그의 창백한 얼굴 위, 푸르게 빛나는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저 눈은 막내 왕자랑 비슷하네.”

누군가 또 속삭였다.

“둘째 왕녀도 다른 왕자들도 파란 눈이잖아.”

“국왕도 그렇던가?”

“글쎄. 누가 감히 폐하의 얼굴을 들여다보겠어.”

그 말에 아리안은 국왕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그러나 끔찍한 기억 속 국왕은 피로 얼룩진 얼굴로 혀를 빼고 헥헥대는 모습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왕자가 비틀거리면서 기사의 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리고는 마중 나온 사람들을 향해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재미없네.”

누군가 아리안의 생각을 대신 말했다.

“그러게. 도르센 대공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생겼더라면 이것보단 더 재밌었을 텐데.”

“말도 마. 내 얼굴 보라고. 나만큼 기대했던 사람이 여기 또 있겠어?”

그러면서 한 여자가 반짝거리는 속눈썹을 붙인 눈을 깜빡여 보았다.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그래도 왕자잖아.”

“흠. 안 내키는데.”

“차라리 대공을 노려 보는 건?”

그 순간 아리안은 그 말을 한 여자를 휙 돌아보았다. 풍성한 검은 머리 타래를 땋아 내린 고작 스무 살 남짓의 젊은 여자였다. 어둑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도 발그레한 두 뺨은 싱그러웠다. 그들은 아리안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천진난만하게 떠들어 댔다.

“글쎄. 대공은 잘생겼지만 무서워. 거기다 항상 그 기사와 마법사를 데리고 다니잖아. 또 잘된다 하더라도 문제야. 도르센으로 날 데려가겠다 하면 어떡해?”

“꿈 깨!”

그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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