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무튼 둘째 왕자는 보통은 수정 호수에서 자기 친척들하고 지내. 파살리아에는 가끔씩만 와. 이런 겨울에 오는 건 없던 일인데….”
누군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치도 제정신이 아니군. 여기 상황이 병신 같다는 걸 모른대?”
“알고 오는 걸 수도 있지.”
“그 겁쟁이가? 잘도 그러겠군.”
“그렇잖아도 이번엔 요정족들을 잔뜩 이끌고 온다잖아.”
좁은 방 안이 껄껄대는 웃음소리와 매캐한 담배 연기, 싸구려 흑맥주 냄새로 가득 찼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쿵쿵 발로 걷어찼다. 문이 벌컥 열리고 양팔로 몸을 감싼 경비병이 들어왔다.
“어흐으 추워, 추워, 추워. 눈이 또 쏟아지려나 봐.”
그의 뒤로 야경꾼이 빈 램프를 들고 따라왔다.
“어이쿠. 돼지치기가 담배를 말고 있네. 이 녀석이 말아 주는 담배가 최고라니까… 대체 어디서 담뱃잎을 구하는 거야. 같이 알자구. 장사 좀 하자니까?”
야경꾼이 그렇게 지껄여 대면서 아리안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안은 그에게 마지막 담뱃잎을 말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야경꾼이 벽에 걸린 횃불로 가서 불을 붙였다.
어깨에 서리를 묻힌 경비병이 긴 의자에 늘어져 있는 다른 사내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이봐. 교대해! 일어나라고!”
“어흐… 돌아다니는 놈도 없는데 지긋지긋하구만.”
“이따 새벽 되면 이리 들어와. 누가 지나다니겠어?”
야경꾼이 그렇게 외치면서 기름 동이에서 램프로 기름을 옮겨 담았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건들대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 곧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니까 돌아갈 놈들은 싸게 싸게 엉덩이 들고들 가셔.”
아리안은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구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성문 곁의 초소 탑은 경비병들과 문지기, 마지기에 어린 기사 종자들, 그 외 성을 드나드는 모든 작자들의 아지트나 다름없었으니 투박한 외투를 입고 모자까지 깊게 뒤집어쓴 아리안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문지기가 도르래를 돌려 성문을 닫고 있었다. 그가 아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는 거야? 조금 이따 창부들이 올 건데.”
“가야 돼.”
“흠, 그래. 여기보다 돼지우리가 더 편안하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아리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그를 뒤로했다.
성벽 안쪽으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깔린 오래된 타일 틈마다 서리가 두껍게 끼어 있었다.
아리안은 어둠 속에서 그 틈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었다.
성벽 꼭대기에서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든 램프 불빛이 아른거렸다. 성벽과 첨탑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회랑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이따금씩 건물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바닥에 긴 빗금을 그었다.
아무도 없는 통로를 통해 탑으로 돌아왔다. 아리안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그의 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곧 기사들이 그가 잘 있는지를 확인하러 방으로 올 것이다. 아리안은 서둘러 방으로 뛰어들었다.
어둑한 방 끝, 침대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그는 이불을 확 걷었다. 거기에는 아리안의 옷을 입은 진흙 인형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이것은 아리안이 오래된 느티나무 밑을 파서 가져온 진흙으로 만든 것이었다. 권능을 거진 두고 온 지금의 그로서는 그것을 인간 같아 보이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으나(그것은 슬픈 진저맨처럼 보였다. 약간 탄….) 적어도 인간의 옷을 입혀 짧은 시간 누군가를 대신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슬픈 진저맨은 이제 팔뚝만 한 크기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아리안은 황급히 옷의 소매와 바지통 사이에 파묻힌 진저맨을 구출해 냈다. 그것이 아리안의 손가락을 잡아당기다가 곧 손바닥 위에 올려 둘 만큼 작아졌다.
“수고했어.”
아리안은 그것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허둥지둥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침대 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양털로 짠 셔츠와 바지, 그리고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급한 손길로 허리띠를 묶었다. 그 뒤에 낡은 돼지치기의 옷으로 슬픈 진저맨을 둘둘 싸매 서랍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면서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문틈 밑으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낮은 발소리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것은 단 한 명의 발소리였다. 기사들이 아니었다.
아리안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훌쩍 뛰어서 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에 양손을 얹고 힘주어 밀려는 순간, 그보다 일 초 먼저 문이 살짝 당겨졌다.
열린 문틈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들어 왔다. 아리안은 그 문틈으로 팔을 내밀었다. 마치 응답하듯이 문밖의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밖으로, 보다 정확히는 대공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손에 유리 촛대를 든 대공이 아리안을 받아 안으며 방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도로 닫혔다.
대공이 머리를 숙여 아리안의 모자 위에 코를 가져다 댔다. 모자를 벗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아리안이 아, 하고 짧게 신음했다.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안의 동그란 정수리 위로 코를 묻고 그에게서 풍기는 여러 가지 냄새를 맡았다. 써늘한 바람 냄새, 담배와 맥주, 싸구려 기름 덩어리로 태운 램프 냄새.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아리안의 모자를 벗겼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싸맨 천도 풀어냈다. 부스스한 머리칼이 밑으로 떨어지며 촛불 빛이 거기에 반사되어 끝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대공은 그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느리게 쓰다듬었다.
“성의 분위기가 안 좋으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진흙 인형으로 호위의 눈을 속이고 혼자 밤늦게까지 돌아다닌 것을 들켰을까 봐 빠르게 쿵쿵대던 아리안의 심장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에 간신히 원래의 박자를 되찾아 갔다. 아마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응… 알겠어….”
아리안이 괜히 발가락을 꼬면서 대꾸했다. 대공의 손끝이 두피에 살짝살짝 닿을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부턴 저녁엔 내 방으로 와.”
그가 아리안의 등이 문에 닿을 정도로 밀어붙이고 입술이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하인들이 다니는 문을 열어 두마.”
“정말? 그래도 돼?”
“그래.”
그 대답에 아리안의 얼굴이 선명하게 환해졌다.
대공이 아리안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아리안의 손목을 잡아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계단 복도는 어두웠다. 대공의 손에 들린 촛대는 고작 발치를 밝힐 뿐이었다. 아리안은 대공의 등만 바라보며 걸었다. 윙윙거리며 벽을 울리는 바람 소리, 거기에 타닥, 타닥, 그들의 발소리가 뒤섞여 계단을 울렸다.
대공이 층계참 끝 작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리안의 팔을 잡아당겨 먼저 안으로 밀었다.
대공의 내실은 어둑하고 고요했다. 두꺼운 태피스트리와 카펫으로 덮인 방에서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벽난로에서 불똥이 튀는 소리만 탁, 탁, 울릴 뿐이었다. 온화한 공기에 아리안의 뺨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아리안을 따라 들어온 대공이 촛대를 가까이에 있는 탁자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양팔로 아리안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리안이 고개를 꺾어 뒤를 돌아보자 대공이 그 눈꺼풀에 천천히 키스했다. 그것은 흡사 다정한 연인 같은 몸짓이었다. 아리안의 온몸이 곧 완전히 새빨갛게 익었다.
그가 뜨겁게 달궈진 목덜미를 움츠리면서 대공의 입술이 떨어진 한쪽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대공이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듯이 그 팔랑거리는 속눈썹 위에 몇 번이고 쪽, 쪽, 하고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리안이 참지 못하고 끙끙거리면서 먼저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대공은 순순히 키스해 주는 대신 두 손으로 천천히 아리안의 허리띠를 풀었다. 몸을 완전히 가리는 큼지막한 로브가 발치로 떨어졌고, 그는 그것을 발로 걷어차면서 아리안의 등을 밀어 침실로 이어지는 문 쪽으로 향했다.
아리안이 주춤거리면서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돌렸다.
발그레하니 윤기가 도는 흰 이마가 대공을 향했다. 대공은 무심결에 그 위에 입술을 떨어트려 키스를 퍼부었다. 아리안이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면서 고개를 발딱 뒤로 젖혀 먼저 입술을 들이밀어 대공에게 키스했다. 기어이 입술이 붙었다. 아리안이 백조의 목처럼 미끈한 두 팔로 대공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법 열정적인 태도였다. 대공은 입술을 기울여 소리 없이 웃으면서 그 키스에 화답했다.
그는 아리안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발로 밀어 열고 아리안을 끌어안은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침대 휘장은 절반 정도 걷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아리안이 움찔 굳어졌다.
“자, 잠깐만.”
대공이 입술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의 시선이 거의 본능적으로 그 입술에 꽂혔다. 젖어서 반들거리는, 아름다운 크기와 형태의 그 입술이… 그 순간 대공이 아리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