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47)화 (47/130)

#47

아리안은 그녀가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궁정 마법사가 무엇을 노리든 그자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사병이 있고 왕녀 전하의 세력도 건재하지. 그러니 크게 걱정할 건 없다.”

아리안은 놋쇠 숟가락을 죽 그릇에 넣어서 빙빙 돌리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이곳 차원의 사람들에게 궁정 마법사의 의심스러운 정체, 그자가 노리는 것, 그 위험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심지어 칼릴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그자는 위험해요.”

“나도 안다.”

그 뒤에 닛사는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네가 말하는 위험은 내가 알고 있는 위험하고 다르겠지. 네가 말하는 위험이 대공 전하의… 저주와 관련된 것이냐?”

그때 아리안은 그녀의 주름진 얼굴 뒤, 어딘지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을 읽었다. 그것은 나이 든 마법사의 고뇌와 걱정, 깊은 시름이었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의 침묵 뒤, 닛사가 빵 부스러기를 수프 그릇에 넣어 저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이 땅에 인간이 아닌 자들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한참 오래전의 일이다. 선한 자들도 있었고 악한 자들도 있었지. 어떤 것들은 전설이나 신화로만 남았지만 어떤 것들은 아직까지도 이 땅에 존재한다.”

그녀가 수프를 젓던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정령이 나타나 수프를 핥기 시작했다.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정령들, 신관들, 마법사들, 얼음 호수의 요정들….”

그녀가 숟가락을 뒤집자 정령이 스튜 그릇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디차게 낮아졌다.

“그리고 그림자 마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회색 두 눈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희생제의 밤, 대공 전하께서는 인간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그림자 마수에 대한 것을 여쭈셨다.”

“난… 그림자 마수에 대해 몰라요.”

“네가 아는 것과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지.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이 선함의 반대편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선함의 반대편. 그것만큼 역병의 그림자를 잘 표현할 말이 있을까?

아리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만 대답해 다오. 너는….”

닛사가 망설였다.

“…대공 전하를 위해 여기 있는 거겠지?”

그 질문에만큼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리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닛사가 마치 안심한 듯이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래….”

연거푸 몇 번 한숨을 내쉰 그녀가 구리 잔을 들어 희석한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팔목에 매달린 수십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아무튼 인간의 일은 인간이 해결해야지.”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다시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국왕의 군대다. 늙어 노망이 났다지만 아직까지도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남아 있고 그 군대도 무시할 만한 게 못 되지. 다행히 퀸트 관문의 병력은 우리 편이다. 정확히는 왕녀 전하의 편이라고 해야겠지만. 거기에 우리가 데려온 도르센 사병도 오백 가까이 남아 있어. 기마병의 숫자는 파살리아 어느 군대보다 많고.”

아리안은 약간 입을 벌린 채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정치와 군사 얘기는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닛사도 그걸 알았는지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왕자… 한심한 작자지만 무시할 수만도 없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일왕자 얘기에 아리안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닛사가 혀를 찼다.

“네 외모는 화를 부를 만한 것이다. 섣불리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아리안은 숟가락 끝에 붙은 음각 장식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든 마법사의 눈이 그런 아리안의 둥근 이마와 관자놀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살폈다. 그녀는 아리안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날로만도 여러 번째의 한숨을 쉬고 말았다.

“왕국에서… 붉은 머리는 색을 밝힌다고 하지. 당연히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괜한 여지를 줄 필요는 없으니 머리카락도 가리고 다녀라.”

그 뒤로도 그녀는 가급적이면 호위를 데리고 다녀라, 늦은 시간엔 돌아다니지 말아라, 성의 어느 쪽으로는 가지 마라, 등등등 여러 가지 잔소리를 늘어놓은 끝에야 식사를 끝냈다.

아리안은 그 부드럽고 따듯한 음식들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닛사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약간의 위안이었다.

“어차피 봄이 되면 파살리아를 떠날 거다. 도르센은 이곳과 다르지. 돌아가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

희생제 이후 파살리아에는 암운이 감돌았다.

태양 없는 한낮에도 성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걸어 다녔다. 그림자 같은 하인들이 성 곳곳에 불을 밝히고 다녔으나 성의 어둠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어. 극야 때야 언제나 이렇지.”

아리안이 말아 준 담뱃대를 입에 문 문지기가 웅얼거렸다.

“전년에 비해 더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사실이긴 해. 아무래도 이것저것 달라졌으니까….”

그가 아리안을 힐끗 바라보더니 담뱃대를 문 채로 연기를 뻐끔뻐끔 내뱉었다.

“대공도 여기 와 있고. 둘째 왕녀도 자리를 비웠고. 둘째 왕녀가 여기 계셨더라면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을 거야.”

“둘째 왕녀가 그렇게 대단해?”

“흐흥. 하긴 너야 파살리아를 잘 모르니….”

그 말에 맞은편에서 카드 패를 섞던 중년 여자가 콧방귀를 꼈다.

“자기도 고작 어머니 대부터 여기 살았던 주제에 토박이인 척하기는. 이봐, 돼지치기. 그 자식 말은 듣지 마.”

그러면서 그녀가 미지근한 흑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컵을 쿵 내려놓았다. 카드 패 위로 맥주 방울이 튀었다. 다른 사내가 손바닥으로 카드 패를 당겨가며 킬킬댔다.

“누님, 요즘엔 파살리아도 옛날 같지 않소. 성벽 안팎으로 사방팔방에서 몰려든 뜨내기들이 가득하지. 이 녀석도 보시게나. 돼지치기라고는 하지만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출신도 모를 거지 놈을 성벽 안으로 들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 아니겠소?”

“퉷. 그러니까 말이지.”

그들이 카드 패를 돌리고 서로 시시덕댔다. 문지기가 흥 하더니 담배를 쭈욱 빨아들였다.

“뭐 수백 년을 살아야만 토박이인가. 그렇게 치면 도르센에서 온 막내 왕자도 뜨내기 아니겠어?”

다들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안은 그들이 대공을 술자리 안줏감처럼 씹어 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꾹 참았다.

나쁜 패를 뽑았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은 젊은 여자가 카드 패를 테이블 위에 탁 내던지고는 아리안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담배를 말아 건넸다. 그녀가 대가로 넘실거릴 정도로 가득 채운 맥주잔을 밀어 주었다. 마침 목이 타던 차였기에 아리안은 그것을 꿀꺽꿀꺽 마셨다.

담배를 입에 물고 쭉쭉 빨아 대던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입과 코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아. 둘째 왕녀든 대공이든 좋으니까 빨리 왕이 되기나 했으면.”

“말도 안 돼! 대공은 왕이 못 돼! 둘째 왕녀가 괜히 그치를 파살리아로 끌어들였겠어?”

“누가 그걸 몰라?”

여자가 뾰족한 눈으로 대꾸했다.

그녀가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며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무튼 그치는 잘생겼잖아. 그런 잘생긴 남자가 왕이 된다면 파살리아도 번쩍번쩍 빛이 나지 않겠어?”

“쯧쯧….”

누군가 혀를 찼다.

“모르지. 대공도 말이야. 반평생을 도르센 그 시골구석에서 보내다가 파살리아로 온 거잖아? 눈이 번쩍 뜨여서 없던 권력욕이라도 생길지 누가 알아?”

“쓸데없는 소리 마. 둘째 왕녀하고 대공이 싸워 봤자 피 보는 건 우리 같은 아랫놈들뿐이야.”

“아이참. 알아. 안다구요.”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일왕자도 있고. 거기다 아슬랭에 갔던 둘째 왕자도 이번에 돌아온다잖아. 그러고 나면 이제 세 왕자가 전부 파살리아에 있는 건데… 그러면 분위기도 좀 나아지겠지.”

“둘째 왕자?”

아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아리안을 돌아보았다.

“아. 돼지치기, 너는 잘 모르겠구나.”

“외가 고향에 가 있다는 얘긴 들었어.”

“맞아.”

그녀가 담배를 단번에 깊게 빨아들였다. 담뱃대가 삽시간에 절반이 타들어 갔다. 그녀가 매캐한 연기를 입과 코로 뿜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파살리아를 싫어했어. 그치의 모친이 수정 호수의 요정 일족이라는 건 알아?”

요정이라고?

아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젓자 그녀가 깔깔 웃었다.

“그치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잖아. 서른 해쯤 전에 파살리아에 왔던 둘째 왕자의 모친이 국왕과….”

“삼십 년 전에는 국왕도 제법 볼만했던 모양이지.”

문지기가 끼어들며 킬킬거렸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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