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대공은 입을 다물고 팔짱을 꼈다.
닛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왕국의 전설이었다. 무수한 전승 설화가 호수의 반대편에서 온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왕국의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영웅담과 함께 호수 건너편에서 온 기사나 마법사, 용, 혹은 요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대공은 신화와 전설을 믿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런 것을 믿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대공 앞에 나타난 불가사의한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면….
“이곳에 잡아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질문에 나이 든 마법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떤 이들은 호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지고, 어떤 이들은 이 땅에 남아 우리 사람들과 혼인하여 자손을 낳았지요. 글쎄요. 이곳을 사랑하게 되어 그랬다고 하지만, 키그파와 페르거스처럼요.”
그녀가 유명한 전설 속 연인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더 믿습니다.”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예.”
닛사가 팔을 뻗어 손바닥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펼쳤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손바닥 밑에서 일렁이는 불꽃의 혓바닥을 가진 정령이 기어올라 손가락 틈으로 불길을 피워 올렸다.
“이런 작은 정령들을 오랫동안 이곳 땅에 붙잡아 두고서 이곳의 음식을 먹여 기르면 이들의 몸은 점차 물질화되며 힘을 잃습니다. 종내에는 완전히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진 생물이 되어 수명을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죠. 보다 강력한 정령들은 보다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 수 있지만 기본 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대공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기고 있는 정령에게 향했다.
“페르거스는 아름다운 키그파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고 열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둘은 한날한시에 눈을 감았다고 하지요. 즉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데아 마트로나는 용들과의 전쟁에서 한 팔과 한 눈을 잃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왕국에 남았습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전혀 늙지 않았다고 하지만 숲의 신과의 결투에서 칼에 찔린 상처가 낫지 않자 죽음을 예감하고는 호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녀의 두 어깨는 각각 에포나 산맥과 안다르타 산맥이, 나머지는 호수 가운데의 캄나 섬이 되었지요. 결국 돌아가지 못한 겁니다.”
아름답고 비참한 전설이지요, 하고 닛사가 중얼거렸다.
“저는 그들이 이 정령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손바닥을 다시 뒤집었다. 그녀의 팔찌 사이를 불꽃의 혀로 핥고 있던 정령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들의 육신은 우리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들을 오염시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커다란 상처, 성교와 잉태, 사랑이나 증오 같은 깊은 감정들….”
대공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닛사의 목소리가 멎었다. 그녀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 추측은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침묵 사이에서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대공은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손짓을 해서 닛사를 물렸다. 마법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 방을 떠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녀의 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대공은 그것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리안이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정리했다.
끌려가 고문당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에게 도움받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칼릴. 그 누군가.
이제 명백해졌다.
아리안은 그를 칼릴로 착각하고 있었다.
정신병이든 아니면 이쪽으로 떨어진 충격 때문이든, 그 무슨 이유이든 간에. 아주 대단한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고마워, 칼릴. 고마워. 나를 구해 줘서….’
아리안이 부르던 이름.
잠시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되뇌던 대공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뭐,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리안이 그를 칼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진짜 칼릴이 되어 주면 될 일이었다.
<4> 불안의 씨앗
아리안은 사흘 동안 앓았다.
그동안 그는 대공의 침대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다 깨어나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점심나절 대공이 침대에 앉아 그의 입에 말린 과일 조각을 넣어 주었다. 그는 새끼 새처럼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대공에게 드물게도 한껏 어리광을 피우다가 다시 잠들었다.
닛사가 그를 찾아 대공의 침실까지 들어왔을 때는 늦은 오후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아리안은 슬슬 잠이 깨던 참이었으나 지난 사흘 동안 대공의 침대를 차지하고 만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얼굴로 침대 밖으로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탓에 아직까지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닛사는 혼자였다. 아리안이 침대 휘장 밖으로 눈을 내밀자 그녀가 무덤덤한 얼굴로 탁자 위에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네 옷이다.”
아리안은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썩 예의 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태도였으나 닛사는 별말 하지 않았다.
대공이 그녀에게 아리안을 챙기라고 말했던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 닛사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뢰를 의미했다. 아리안은 대공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자였고 거기에 더해 대공의 침대를 나눠 쓰는 애인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년의 가치는 명백했다.
닛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너라. 대공 전하께서 네 식사를 챙기라 하셨다.”
아리안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닛사가 침실을 떠난 뒤 아리안은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몸이 녹아 버린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머리에는 둔중한 두통이 남아 있었고 고열에 시달렸던 탓에 전신의 모든 말단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입 안에는 아직도 대공이 조그마한 조각으로 뜯어내 한 조각씩 입에 넣어 준 말린 과실의 단맛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단맛의 여운에 집중하면서 닛사가 두고 간 옷을 펼쳐 보았다.
두건이 달린 두꺼운 회색 로브와 천을 꼬아 만든 가느다란 허리띠였다. 셔츠와 바지는 양털로 자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물건이었으며 신발은 로브와 같은 천으로 된 것이었다. 아리안은 신관 게르딕이 이것과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리안은 빠르게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는 이제 진짜 사제가 된 것이다.
닛사가 그의 이름을 신전의 사제 명부에 끼워 넣었고 궁정 마법사가 국왕 앞에서 그의 정결함을 증명했다. 비록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꾸며진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대공이 그를 일왕자에게서 빼내기 위해 둘러댔던 작은 거짓말은 이제 한 편의 잘 설계된 사기극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아리안은 부드러운 셔츠 표면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옷 틈에 상아 빗이 하나 끼어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머리카락을 빗었다. 여러 번 빗자 포슬포슬하게 부풀어 올랐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머리칼 끝을 잠시 더듬어 보다가 닛사가 기다린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서둘러 침실을 나오자 벽난로 앞에 서 있던 닛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리안의 얼굴을 본 그녀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모자를 쓰고 다녀라.”
그녀가 짧게 충고했다. 아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트리면서 두건을 양손으로 잡아 뒤집어쓰려 했다. 그때 닛사가 그것을 말렸다.
“내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미모에 혹할 만큼 젊지 않다.”
그녀가 차분히 말하며 긴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그녀의 손목에 걸린 여러 개의 팔찌들이 쩌렁쩌렁하는 소리를 냈다.
“앉거라.”
아리안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닛사가 종을 울리자 얼마 안 있어 하인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음식은 간소했으나 모두 갓 만들어 따스한 김을 올리고 있었으며 환자가 먹기 쉽도록 부드러운 것들뿐이었다.
아몬드와 흰 생강, 우유를 넣어 묽게 끓여 낸 쌀죽, 시금치와 파슬리가 들어간 크림수프, 푹신푹신한 밀빵이 제각각의 접시에 담겨 나왔다. 거기에 계피와 육두구와 꿀을 넣은 포도주 주전자가 함께 있었다. 하인은 그 포도주를 컵 두 개에 나누어 따른 뒤 물을 부어서 희석해 준 뒤에 자리를 떠나갔다.
닛사가 먼저 부드러운 빵을 부스러트려 수프에 넣으며 말을 꺼냈다.
“너도 상황은 대충 알겠지.”
그녀는 시간 낭비를 싫어했으므로 대화는 아주 간결했다.
“이제 너는 진짜 사제다. 도르센 출신이고. 대공 전하께서 네 방을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고 하셨으니 앞으로는 행동거지를 주의하거라.”
그것은 아리안이 예상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닛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리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리안은 희고 달착지근한 쌀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닛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닛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생제에서의 일은 전해 들었다.”
그 말에 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