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45)화 (45/130)

#45

아리안은 이제 완전히 나신이었다. 우윳빛 신체는 차갑고 창백했으며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공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리안의 인중과 턱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엄지로 문질러 닦고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차가웠다. 대공은 그것의 원래 온도를 안다. 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가 불시에 아리안을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하인이 미리 탕파를 넣어 둔 침대 안은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다. 대공은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리며 한 팔로 이불을 젖혔다. 손으로 한 번 시트 위를 훑은 대공이 그 미적지근한 온기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아리안을 안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리안이 떨리는 팔로 대공의 목을 끌어안아 왔다. 작은 새처럼 가슴팍을 파고드는 아리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짧게 혀를 찼다.

그가 팔꿈치로 시트를 짚어 약간 상체를 띄우며 반대편 팔로 자신의 옷을 뜯어내듯 벗었다. 단추가 침대 밖으로 튀어 나가고 소매의 솔기가 지익 찢어져 떨어졌다. 삽시간에 넝마가 된 옷가지를 내던진 대공이 팔다리로 아리안을 꽁꽁 휘어 감아 체온을 나눠 주었다.

“내, 내가 여기 있는 걸 그들이 눈치채면 어떡하지.”

아리안이 대공의 가슴팍으로 연신 파고들면서 중얼거렸다.

“궁정 마법사는 여기 못 와.”

대공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리안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콧잔등과 뺨이 가슴팍에 문질러지는 간지러운 느낌이 났으나 대공은 참았다.

“아직 치료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 목소리가 서럽게 작아졌다.

“999일이 모자라면 어떡하지.”

대공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없이 아리안을 더욱 거세게 끌어안았다. 불시에 강하게 끌어안긴 아리안이 끅 하고 납작해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한참 정적이 이어졌다. 침대 휘장 바깥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났다.

아리안이 또 웅얼거렸다. 입술이 가슴팍에 닿아 뭉개지는 느낌이 났다.

“그자는 누구였을까? 날 알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이후로도 입술이 한참 동안 쇄골께 근처에서 달싹댔다. 대공은 그냥 참았다.

아리안의 작은 웅얼거림은 새의 지저귐을 닮았다. 그것은 그 몸의 떨림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들어 곧 조용해졌다.

대공이 아리안이 잠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고요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는 그때 쾰른에 있었어.”

대공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리안이 턱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이불 속, 두 눈동자는 녹색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질거렸다.

“당신은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고.”

대공은 아리안이 또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입술을 아리안의 정수리에 눌렀다.

“내가 왜 여기서 당신을 도우려는지 의심하는 것 알아.”

아리안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하지만 당신이 그날 날 구했는걸.”

“내가?”

언제까지 무시할 수만도 없다고 생각한 대공이 되물었다.

아리안이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그의 눈이 아스라이 몽롱해졌다.

“그날은 날씨가 좋았는데… 초여름이었어.”

대공은 아리안이 자신의 가슴팍에 대고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꼈다.

“병사들이 내 집을 부수고 나를 끌어냈어. 그리고 목에 밧줄을 걸어서 심문관에게로 끌고 갔지. 심문관은 나를 고문했고… 나는 고통에 못 이겨 거짓말로 자백했어. 사람들은 나를 화형시키라고 외쳤고 판사가 그렇게 판결을 내렸지.”

아리안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가 다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당신 같은 종류의 생물이 나 같은 종류의 생물을 구하는 건 드문 일이야.”

아마 한순간의 충동이었겠지, 아리안이 그렇게 혼잣말했다. 대공은 그것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당신을 도우려고 했는데… 당신이 또 날 구했어.”

그러면서 그가 대공의 옆구리에 두른 팔에 와락 힘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팍이 축축해졌다.

“나를 구해 줘서… 그때부터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리안이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반복했다.

“고마워, 칼릴.”

대공은 그저 묵묵히 그것을 듣기만 했다.

얼마 안 있어 아리안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낮고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대공은 그의 매끄러운 등과 어깨를 천천히 어루만져 보았다. 떨림은 이제 없었고 피부는 따스했다.

대공은 한참 동안 아리안을 어루만지다가 새벽도 중턱에 왔을 때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리안을 돌아보았다. 아리안은 아주 깊게 기절하듯이 잠들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어깨와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 우윳빛 피부에는 매끄러운 광택이 맴돌았다.

대공은 천천히 휘장을 걷고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대충 주워 입었다.

침실을 나오자 어둑하게 밝혀진 응접실 가운데에 닛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그녀가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일어나라.”

대공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언제나와 같은 그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벽난로 안에서 타닥, 타닥 불길이 튀어 올랐다.

닛사가 비틀거리면서 두 팔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네 잘못이 아니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그만해.”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나이 든 마법사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불찰이기도 하다. 궁정 마법사들을 너무 얕봤어.”

그는 불길이 벽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서 희생제를 떠올렸다. 희생제와 국왕. 그리고 그 마법사. 대공에게 그것은 도무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형태를 알기조차 어려운 어떠한 형체. 추악하고 기괴한 무언가. 뒤집어쓴 로브의 모든 틈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불길한 그림자. 그렇다. 그것은 차라리 그림자 마수를 닮았다.

“그림자 마수가 인간으로도 형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닛사가 눈을 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예, 한 번도. 하지만 전하, 제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궁정 마법사, 그자.”

대공은 그가 칠 년간 보아 왔던 그림자 속의 환영들을 생각했다.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검은 짐승처럼 보였어.”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있기는 합니다. 쥐나 고양이, 매, 비둘기… 제가 아는 어떤 마법사는 열두 가지 동물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닛사 너는 전에 내게 흑마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흑마술사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아시다시피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지요. 흑마술사들도 그때 거의 다 죽었습니다.”

닛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그림자 마수가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확률이 높습니다.”

“하아.”

대공이 짧은 한숨과 함께 손등으로 이마를 덮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최근에는 자취를 감췄던 두통이 밀려왔다. 수년을 함께했던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안락함이 몸을 늘어지게 했던 모양인지 이 두통은 어색했다.

대공은 팔을 뻗어 탁자의 잔을 집었다. 닛사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 잔에 술을 따랐다. 잔의 술을 한 번에 들이켠 후, 그가 잔을 다소 난폭하게 내려놓았다.

“아리안, 아니 그 신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아리안에게 생각이 미치자 대공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그는 때때로 자신이 아주 나이가 많은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던 아리안을 떠올렸다. 그가 가져온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 대공은 그것이 국왕의 온실에서 훔친 것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자기가 아주 나이 많은 것처럼 얘기한 적이 있었어. 마치 수십, 아니 수백 년을 살아온 것처럼….”

“어떤 마법은 흐르는 시간을 느리게 해서 마법사들이 마치 오래도록 젊음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지요. 강력한 마법은 때때로 수십 년을 넘게 지속되기도 한답니다.”

그녀가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주름진 손목에 걸린 수십 개의 팔찌가 차르륵차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 든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수백 년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자는 아마….”

닛사는 그 얼어붙은 타일 틈에서 피어오른 황홀한 백합 송이를 떠올렸다.

“아마?”

대공이 재촉했다. 닛사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전하. 호수 반대편에서 온 사람들을 아십니까?”

닛사의 그 질문에 대공의 짙은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저 호수라 함은 대륙 중앙의 거대한 수정 호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호수는 세로로 길쭉한 표주박처럼 생겼는데 그 표주박의 주둥이 부분은 왕국 최북단의 아슬랭 지방에까지 닿아 있다. 그 널찍한 호수의 만을 얼음 호수라고 불렀고 그곳에는 호수 반대편에서 왔다고 하는 요정 일족이 살았다.

“얼음 호수의 요정 일족을 말하는 건가?”

“아니요.”

닛사가 조용히 부정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자가 아닌, 진짜로 호수 반대쪽에서 온 사람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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