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44)화 (44/130)

#44

마법사가 대공이 걸어온 통로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흠. 그나저나 부하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한 모양이군요. 대공 전하께서 여기까지 들어오신 걸 보니.”

그의 시선이 다시 대공에게로, 정확히는 그 검에게로 향했다. 이미 피에 젖은 그 검 끝에.

그가 연극적으로 허리를 쑥 굽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가 봐드리도록 하죠. 신관의 얼굴을 봐서라도요.”

그러면서 그가 아리안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막내 왕자가 희생제를 방해하다니!”

“……!”

깜짝 놀란 아리안이 미처 굳어지기도 전에 노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국왕이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국왕이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외쳤다.

“감히 막내 왕자가 희생제를 방해하다니!”

마법사가 연신 히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싸구려 성대모사보다 못한 대사가 이어졌다.

“이 석실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궁정 마법사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이 석실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궁정 마법사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그 죄가 참으로 깊도다.”

“그 죄가 참으로 깊도다!”

“처소로 돌아가 부름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라.”

“처소로 돌아가 부름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국왕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동시에 마법사가 몸을 돌려 국왕에게로 다가갔다.

“폐하.”

그 부름에 국왕이 바닥에 고꾸라진 채 고개만을 발딱 들고서 헐떡였다. 일국의 국왕, 그러나 개보다도 못한 꼴이었다.

마법사가 그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켰다.

“희생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폐하.”

동시에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일제히 국왕의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 대기 시작했다.

“희생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왕국의 앞날은 밝으리라! 국왕 폐하 만세!”

석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국왕이 비틀대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노인의 주름진 입가는 피와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법사의 어깨에 힘없이 몸을 기대면서 헐떡였다.

“희생제가 성공하였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모두 폐하께서 손수 산 제물을 받아들이신 덕분입니다.”

“그래… 그래….”

국왕의 얼굴에 광기 어린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는 아리안이나 대공은 마치 이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다는 듯이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희뿌옇게 번득였고 기이한 열기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마법사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매달렸다.

“이제 된 것이냐, 궁정 마법사여? 이제 산 제물의 젊음이… 활력이 짐에게 깃들겠느냐? 대답하여라.”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오….”

“옥체를 생각하시어 이만 돌아가심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벌써부터 기운이 샘솟는구나.”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국왕의 몸을 둘러업었다. 머리를 산발하고 왕관조차 발치에 떨어트린 채, 국왕이 킬킬거리면서 웃어 댔다. 그들이 국왕을 데리고 천천히 석실을 떠나갔다.

문가에서 궁정 마법사가 짧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깊게 그림자 진 얼굴 위 미소는 뚜렷했다.

곧 그들의 뒷모습이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대공이 석상처럼 굳어진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고 두 뺨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대공은 밀랍 인형처럼 창백한 아리안의 뺨을 가볍게 손으로 감쌌다.

“정신 차려.”

그 나직한 목소리에 아리안이 천천히 눈을 들어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이 흐릿한 두 눈은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칼릴….”

아리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마법사를 막아야 해. 이건 재액을 부르는 의식이야. 이건….”

“궁정 마법사가 국왕을 가지고 놀며 사술을 부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공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던 일이야. 상관없다. 저대로 미친 짓거리를 하다가 빨리 뒤져 버린다면 더할 나위 없지. 국왕이 죽는다면 궁정 마법사를 처리할 명분도 생기고.”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마법사가 노리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국왕의 몸을 빼앗으려고….”

대공이 아리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아.”

대공이 엄지로 아리안의 뺨에 묻은 더러운 피를 닦아 냈다.

“이번 일은 내 불찰이다. 닛사의 말을 너무 믿었어.”

“아냐. 닛사 경은 잘못이 없어. 이건 여기의 그 누구도 막지 못했을 거야….”

아리안이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작아지며 그의 몸에서도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어이 무릎에 힘이 풀리며 여태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밑으로 휘청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 대공이 그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아리안이 놀라 작게 비명 질렀다. 힘 빠진 두 팔이 무심결에 대공의 어깨를 끌어안아 매달렸다.

대공은 아랑곳 않고 그를 안고서 저벅저벅 걸어 피 고인 석실을 빠져나왔다.

석실 입구에는 대공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 죽인 마법사 넷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그 시체들은 검은 타르 웅덩이처럼 보였고 어둠에 잠긴 복도는 길었다.

대공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아리안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몸을 떨었다. 마법사에게 붙잡혔던 어깨가 불로 지져지는 듯이 아팠다. 그곳에서부터 퍼진 오염이 독처럼 혈관을 타고 내달려 그의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것은 결코 아리안을 해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쩌면 회복에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성채에는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먼 밤하늘에서 번개가 번득였다.

탑 앞에는 닛사와 오스발이 그림자처럼 서서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을 발견한 그들의 초조하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대공의 품에 안긴 아리안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전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신관이 여기에….”

오스발이 달려들어 물었다. 대공은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내, 내려 줘.”

그때 아리안이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닛사와 오스발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 것과 동시에, 아리안의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어딘가 금빛 광채를 띈 검붉은 피가 삽시간에 인중과 입술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야트막하게 서리가 깔린 돌바닥 틈으로 그 피가 떨어지며 얼음이 녹았다. 돌 틈으로 빛이 스며 나왔다. 그와 함께 차가운 타일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싹이 불쑥 머리를 들었다.

닛사와 오스발의 눈이 커졌다.

새싹 위로 핏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쑥쑥 자라나 싱그러운 잎을 펼쳤고, 그 위로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곧 아름다운 백합이 꽃잎을 스르르 벌렸다. 어둠 속에서 탐스럽게 피어난 백합 송이 위로 서리가 떨어졌다. 그 곁으로 다른 새싹들이 하나둘씩 솟구쳐 올랐다.

아리안이 황급히 손바닥으로 코를 막았다. 떨어지던 핏방울이 멈추었다. 피가 대신 그의 소매를 적시고 팔꿈치로 흘렀다.

“이게 대체….”

오스발이 경악한 얼굴로 백합과 아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동시에 대공이 자신의 망토를 떼어 내 아리안의 얼굴 위로 덮었다. 그의 발이 백합을 타 넘었다.

“처리해.”

“네, 네!”

닛사가 황급히 몸을 굽혀 백합을 뜯어 냈다. 소매로 바닥을 쓸고 손끝으로 타일 틈을 긁어내 경이로운 이적의 자취를 삽시간에 지워 없앴다.

***

대공은 침실에 도착해서야 아리안을 내려 주었다.

침실은 어둡고 따스했다. 벽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구석마다 놓인 화로 속에는 숯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안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대공은 아리안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불그스름하던 두 뺨도 지금은 밀랍처럼 희멀건했다.

아리안은 두 손으로 자신의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손이 단추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버, 벗어야 돼… 오염이 묻어서….”

아리안이 고개를 바닥에 푹 떨군 채 웅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듯이 희미했으나 대공은 그것을 알아들었다.

대공이 아리안의 손 대신 단추를 잡았다. 그가 빠르게 단추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힘없이 미끄러지기만 하던 아리안의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제식을 위해 입은 흰옷은 얇고 부드러웠다. 비단 아래로 아리안의 피부에 선명히 돋은 소름이 느껴졌다. 대공은 차분히 수많은 단추들을 벗겨 나갔다. 곧 피 묻은 장의가 밑으로 떨어졌다. 추위와 고통으로 움츠러든 흰 어깨가 드러났다. 대공이 표정 변화 없이 그 속옷을 고정시킨 끈을 풀었을 때, 그 어깨가 부끄러움으로 흠칫 떨렸다.

대공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아리안의 얇은 신발도 벗겼다. 양말 없는 맨발가락이 드러났다. 발가락 끝까지 모두 하얗게 곱아 있었다. 대공의 손은 불길 같아서 그 발의 차가움이 더욱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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