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아리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아니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국왕의 손에 들린 잔과 그 뒤에 늘어져 있는 희멀건 시체를 번갈아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잔을 든 국왕의 손이 그에게 가까워졌다.
“신관이여… 이걸. 이 잔을.”
국왕이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아리안은 질색하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린 채 국왕의 손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 잔을 받으라.”
그러나 국왕이 억지로 그 뺨에 잔을 가져다 눌렀다. 창백한 뺨에 피가 묻었다.
아리안은 간신히 굳어진 혀를 움직였다.
“싫습니다.”
“그대가 받아야 한다.”
국왕이 기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생제는 정결한 신체를 매개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리안은 다시 한번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국왕의 갈퀴 같은 손이 억세게 그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창백해지다 못해 푸르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국왕의 손가락이 억지로 볼을 눌러 입술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다.
잔이 그의 입가로 다가왔다.
“마셔라! 어서!”
국왕의 눈이 번들거렸다.
“읏….”
아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돌렸다. 국왕의 회색 손이 점점 더 크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감히….”
노쇠한 노인의 어깨가 들썩이며 입술까지 벌벌 떨렸다. 땀과 피로 축축한 손바닥에서 잔이 서서히 미끄러졌다.
“무엄한 것….”
그의 손가락 끝의 떨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더니 종래엔 그 손끝에서 황금 잔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그것은 매우 느린 슬로 모션 영화처럼 보였다.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쨍! 황금 잔이 돌 타일에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히 울려 퍼졌다. 장작개비 같은 손끝에서 미끄러진 잔이 돌바닥을 요란히 굴렀다. 더운 피가 왈칵 쏟아져 아리안과 국왕의 발을 적셨다. 검은 타일 틈을 피가 느리게 흘렀다.
오염된 피. 그것은 그 자체로 불결함과 타락의 정수였다. 아리안은 이제 밀랍처럼 창백했다.
“어찌….”
국왕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얼굴은 갑자기 십 년은 나이 든 것처럼 지쳐 보였다. 그는 수백 년 묵은 고목처럼 보였다.
“폐하.”
그때 검은 로브의 궁정 마법사가 그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신성한 산 제물입니다. 어서 공양하십시오.”
“하지만 신관이 이것을 거부하였는데 어찌 제물을 공양하겠느냐?”
“폐하께서 손수 피를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은 젊고 순결한 산 제물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폐하께 활력과 생명력을 채워 드릴 것입니다.”
“활력과, 생명력을… 다시….”
국왕이 마치 기계인형처럼 멍하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렇군, 과연, 그렇고말고….”
왕국의 지배자가 짐승처럼 타일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웅덩이에 거리낌 없이 얼굴을 처박았다. 흰 정수리에서 관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 년 동안 왕들의 머리 위에서 으스대던 황금 관이 마치 싸구려 동전 한 닢만도 못한 것인 양 데굴데굴 몇 바퀴를 굴러 아리안의 발치 앞에 멈추었다.
국왕이 길게 혀를 내밀어 타일 위의 피를 핥았다. 그의 얼굴은 희열과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아….”
아리안이 넋을 잃고 신음했다.
“안 돼….”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아무 힘이 없었다.
바닥에 엎드려 기는 국왕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것이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입을 벌렸다. 톱날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입이 쩍 벌어지더니 국왕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아리안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희생제의 제물은 아리안이 아니었다. 제물은 처음부터 국왕이었다. 아리안은 그저 여기 초대된 여흥 거리에 불과했다.
마법사가 바닥에 엎드려 기는 국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아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아니. 그것은 국왕의 얼굴을 한 마법사였고 바닥을 기는 것은 그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지가 사라진 껍질이 그저 본능을 따라 바닥에 고인 피를 게걸스레 빨아 대고 있었다.
아리안의 양팔을 움켜잡은 두 마법사가 그를 놓고는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법사가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아리안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일왕자가 뭐라 했는지 알아?”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인 양 친근한 말투였다.
“대공이 애인을 숨겨서 데리고 왔다 하지 뭐야? 하하! 그 자식은 가끔씩 정말 믿기지 않게 멍청하단 말이야….”
그러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런 상위 개체가 왜 이런 꼴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가 아리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앞에 섰다. 아리안에게 그는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것이 허리를 약간 굽혀 아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하. 정상적인 경로로 여기 온 게 아니로군.”
그 눈길이 아리안의 뺨, 창백한 입술,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소환되어 여기 온 게 아니었어… 하긴 이런 상위 개체를 쉽사리 이쪽으로 가져올 수는 없지. 어디 보자. 저쪽에 대부분의 권능을 다 두고 왔군. 하하, 하하하. 가엾기도 하지. 이런 연약한 꼴이라니….”
그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한동안 지루했었는데, 일이 제법 재미있게 됐어.”
그것이 아리안을 향해 얼굴을 들이대고는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더군다나 아직은 깨끗하군. 아직은….”
그가 몸을 똑바로 세우며 양손으로 두건을 벗었다.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창백한 뺨과 혈색 없는 입술. 피부는 파충류의 것처럼 체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오로지 눈빛만이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번쩍거렸다.
그가 아리안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웃어 보였다.
“여기 생활은 어때? 지낼 만해? 네가 온 곳과는 많이 다르지? 그러니까… 거기가 몇 세기쯤 됐지? 18, 19… 25세기쯤 되었나?”
아리안이 터질 듯이 커진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누구지?’
대답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쪽은 어때? 꽤 변했을 텐데… 시차가 좀 나잖아. 공회는 여전한가? 뭐. 그치들이야 빅뱅이 서른 번쯤 다시 온다 해도 여전하겠지만.”
그가 킬킬거렸다.
“아무튼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봐. 내가 여기 생활에서는 선배인 셈이잖아? 너른 마음으로… 후배를 굽어살피는 거지.”
그러면서 그가 고개를 돌려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히죽히죽하는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불길한 시선이 다시 아리안을 향했다.
“꽤 재미있을 거야. 답답한 공회의 규칙 없는 생활 말야. 너도 즐기게 될걸. 내가 장담하지.”
“…정체가 뭐야?”
“아. 벌써 그 질문이야?”
그가 시시하다는 듯이 한숨을 픽 내쉬었다.
“대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별로 재미있는 질문도 아니잖아.”
“내가 여기 온 건… 널 방해하려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규칙에 의하면 여기 사람들을 이용해서는….”
“아하! 규칙! 설마 고리타분한 공회 얘긴 아니겠지? 설마!”
그러면서 그가 양손으로 아리안의 어깨를 아프도록 우악스레 움켜잡았다. 그 손바닥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치이익,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천 아래로 피부가 느리게 타들어 가고 오염이 살을 파고들었다. 아리안이 고통을 참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그 얼굴을 향해 마법사가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꼴을 보니 공회가 널 여기 보낸 건 아닐 테고, 너도 별로 결백한 것은 아니지 않나? 응?”
“…네 말이 맞아. 난 널 방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아리안의 목소리가 도중에 멎었다.
그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뻗어 온 칼날이 마법사의 턱밑에 닿았다.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했다.
검 끝이 마법사의 목을 야트막하게 찔렀다. 거기로부터 검푸른 핏방울이 한 방울 새어 나왔다. 그 피에서는 악취가 풍겼다. 아리안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몸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몸을 등 뒤에서 대공이 받아 안았다.
“칼….”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아리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법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 웃더니 갑작스레 양팔을 번쩍 벌렸다.
“이거, 이거. 대공 전하.”
그는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지껄여 댔다.
“이거 놀랍군요. 아직 이 껍데기가 제대로 보이다니, 과연….”
그 눈이 대공의 흔들림 없는 얼굴을 거쳐 몸을 훑었다.
“…과연 부족함 없는 신체입니다. 건강하고, 젊고, 튼튼하지.”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대공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마법사가 아리안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칼끝이 목에서 떨어지며 맺혀 있던 핏방울이 목울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직 아리안에게만 느껴질 역겨운 냄새가 한층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