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번에는 궁정 마법사도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리안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찰나의 정적. 아리안은 반사적으로 마법사의 발치를 살폈다.
검은 오탁이 한데 뭉쳐 꿈틀거리는 그림자처럼 그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불화의 씨앗. 역병의 전조. 재앙의 그림자.
이것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옥좌 아래 도열한 다른 세 명의 마법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한기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국왕의 손을 뿌리치고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마법사가 머리를 기울이며 히죽 웃었다.
“안녕.”
그가 입을 열었다.
“만나 보고 싶긴 했어.”
그가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관이라잖아. 처음엔 안 믿었지.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사제는 오라스테스의 전쟁에서 거의 다 죽였다고 생각했거든. 그렇다고 일왕자의 바보 같은 소릴 믿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가 가벼운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옥좌 아래로 한 계단 걸어 내려왔다. 아리안은 따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뭐어. 어딘가에 하나쯤은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 모든 일이 그렇잖아?”
마치 대답을 요구하듯 그가 아리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제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완벽한 거라곤 없지.”
그가 흐음,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그 번들거리는 검은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설마 신관보다 더한 것이었을 줄이야….”
그 순간 국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마법사여. 어서 준비한 것을….”
이전 두 번과 한 치 다른 것 없이 완벽하게 동일한 어조였다. 그것을 깨달은 아리안의 등 뒤로 소름이 달린 것과 동시에 마법사가 어이쿠, 하면서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 미안. 미안. 신경 쓰지 마. 가끔 저래.”
“마법사여. 어서 준비한 것을….”
“폐하.”
그가 국왕을 부르며 몸을 돌려 옥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국왕이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폐하. 이는 진실로 정결한 신관입니다.”
그 말에 흐릿하던 국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오, 오오오… 이럴 수가.”
국왕이 헐떡거리면서 힘없이 주먹 쥔 손으로 팔걸이를 쿵쿵 내리쳤다.
“진실로 정결한 신관이로구나!”
“네, 맞습니다. 폐하! 이 깨끗한 신체는 희생제에 더없이 걸맞습니다. 다만… 저희가 준비한 다른 제물과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마법사는 서둘러 말하라.”
“희생제는 예정대로 진행하되, 신관을 희생제의 매개로 삼으소서. 순결한 신관의 신체를 통해 제물을 바치면 이 의식의 효과는 백 배, 아니 천 배로 증폭될 것입니다.”
“과연!”
국왕은 의지가 없는 허수아비처럼 굴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늙은 국왕이 마냥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 말이 맞다. 마법사여. 그대로 진행하여라. 어서 서둘러… 서둘러 희생제를….”
탁한 자줏빛 입술이 집착적으로 웅얼거렸다.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둘러 희생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마법사가 국왕의 옥좌로 가서 그를 일으켰다. 국왕이 비틀거리면서 두 다리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마법사가 그를 부축해 제단 앞으로 데려갔다.
“안 돼….”
아리안에게서 희미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국왕이 힐긋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산 제물이 꺼림칙한가?”
마치 아리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국왕이 질문을 던졌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혹은 겁쟁이를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국왕이 자신을 부축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휘청이는 걸음으로 아리안에게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구부려 아리안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노인에게서는 퀴퀴한 죽음의 냄새가 났다.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이미 수명을 다한 살아 있는 시체….
“산 제물이 꺼림칙한가? 희생제가 옳지 않은가? 어디 한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국왕이 아리안의 뺨을 핥을 듯이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 낼 때마다 보랏빛으로 검게 변색된 입술에서 악취가 풍겨 나왔다.
하지만 아리안은 알 수 있었다. 지금만큼은 국왕 본인의 의지였다. 이건 이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노인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폐하.”
그는 노인의 흐릿하게 백태가 낀 눈을 올려다보았다.
“무고한 피는 불길함을 부를 뿐입니다. 희생제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무고한 피라?”
“네.”
“불길함을… 부를 뿐이라고….”
국왕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름져 늘어진 눈꺼풀이 퍼들퍼들 떨리며 거뭇한 손가락 끝이 경련을 일으켰다.
“불길함을… 그렇다면 짐의… 젊음은… 치세는….”
“폐하!”
그때 제단 앞에 서 있던 궁정 마법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국왕이 마치 끈에 묶여 끌려가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 신관은 자비로운 존재입니다. 신실한 신관으로서 당연히 희생제에 찬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저희 궁정 마법사들은 다릅니다. 저희는… 오로지 국왕 폐하의 안녕을 위해서만 일할 뿐이죠.”
국왕의 눈이 다시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그가 힉힉대며 웃기 시작했다. 미끈거리는 양서류의 호흡 소리를 닮아 있는 그 웃음소리가 석실에 힘없이 메아리쳤다.
한참을 이어지던 웃음이 뚝 그쳤다. 국왕이 느릿느릿 마법사를 향해 다가갔다.
마법사가 품에 손을 넣어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단도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국왕의 손에 건넸다. 그 얄팍한 단도조차 노인에게는 무거웠던 모양인지 국왕의 팔이 휘청 흔들렸다. 그러나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국왕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제단 위에 고요히 누워 있는 어린 소녀의 알몸으로 다가갔다.
소녀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으며 피부에는 반드르르한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털이 모두 뽑힌 그 몸은 마치 조리되기 직전 도마 위에 놓인 흰 닭 같았다. 국왕에게 칼을 건넸던 마법사가 능숙한 요리사와도 같은 손길로 소녀의 왼쪽 젖가슴 위에 깨끗한 흰 천을 얹었다.
국왕이 그 천 위에 칼을 가져다 댔다. 양옆으로 놓인 램프의 불빛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안 돼!”
더 이상 이것은 단순히 조잡한 이쪽 차원의 주술이 아니었다. 이 희생제는 더 거대한 것이었다. 더 추악하고 기괴한 어떤 것. 아리안의 몸에 치명적인 오염을 남길 수 있는 강력한 의식.
희생제를 멈춰야 했다.
국왕을 향해 달려가려던 아리안의 양팔을 두 마법사가 양옆에서 움켜잡았다.
“이거 놔!”
아리안이 몸부림칠수록 그들의 손이 올가미처럼 조여 왔다. 그 손은 축축한 양서류의 피부를 닮았다. 그것들이 마치 빨판처럼 아리안에게 들러붙었다.
국왕의 제물의 가슴 위로 칼날을 내리꽂았다.
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국왕의 팔에 힘이 없어 칼날은 단번에 살을 가르지 못했다. 마법사의 능숙한 손길과 달리 국왕은 형편없는 조리사였다. 칼날을 찔러 넣는 위치가 잘못되어 날 끝이 갈비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퍽 퍽 하고 몇 번이나 들렸다.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피가 쿨럭쿨럭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안은 과거 몇 번의 희생제를 본 적이 있다.
켈트인들은 대지에 수사슴을 바쳤다. 유대인들은 장자를 번제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테노치치틀란의 치치멕인들은 꽃 전쟁 포로들의 심장을 갈라 공양하곤 했으며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아내들, 신하와 병사들이 자신의 사후 함께 산채로 파묻히길 원했다.
글쎄. 그들이 무엇을 바랐든 간에 그런 참혹한 인신 공양이 그것을 이루어 주진 못했을 것이다.
피를 동반하는 모든 번제는 재앙으로 이어질 뿐,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하는 법이니까.
아리안은 기어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국왕은 죄 없는 불쌍한 소녀의 몸을 칼로 짓이기는 데에 열중해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칼날 끝이 갈비뼈 사이로 들어가 심장의 표면을 살짝 찔렀다.
소녀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비명은 없었지만.
국왕의 주름진 이마에 땀이 번들거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죽어 가는 소녀와 정반대로 국왕의 얼굴에 활력이 돌아왔다.
제단 아래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황금 잔을 들어 피가 흘러내리는 아래에 가져다 댔다. 타일 사이의 홈으로 잔에 미처 담기지 못한 피가 흘러 아리안의 발치까지 닿았다. 아리안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발을 치웠다.
쨍그렁. 칼이 돌 타일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쨍쨍하게 울렸다.
역겨운 냄새가 났다. 지독한 숙취 같은 두통과 오한이 아리안을 덮쳤다.
“신관이여.”
국왕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아리안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국왕의 시선은 잡아먹기라도 하고 싶다는 양 번들번들했다. 피에 젖은 단도가 국왕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으며 왼손에는 황금 잔이 들려 있었다. 잔의 표면에 벌건 핏방울이 맺혀 아래로 느리게 흘러내렸다.
국왕이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