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7)화 (37/130)

#37

대공은 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 목소리는 그다지 화가 나 있다거나 차갑지도 않았기 때문에 경고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아리안은 어딘지 억울해져서 뾰족한 눈으로 대공을 쏘아보다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대공은 아리안의 쑥 내밀어진 입술을 엄지로 어루만지면서 피식 웃었다.

“피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일왕자가 희생제의 준비를 맡지만 않았더라도 대타를 준비시켰겠지만 그가 노리는 것이 애초에 너이니 불가능한 일이지.”

아리안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일왕자가 희생제 준비를 맡았다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의 눈썹 사이가 한껏 좁아지면서 눈꼬리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럼 어떡해?”

“넌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

대공이 건조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떻게 걱정 안 해?”

아리안이 다시 물었다. 대공이 이번에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아리안의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눌렀다. 아리안의 입술이 뾰족해졌다.

“네가 제물로 바쳐질 일은 없어. 희생제는… 뭐. 희생제는 치러질 수도 있겠지. 국왕이 그 짓에 미쳐 있으니까.”

“그래. 그게 걱정돼. 이제 곧 다섯 번째 치료 의식을 해야 하는데… 자칫….”

아리안이 말을 삼켰다. 녹색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대공은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희생제도, 계시라던 국왕의 꿈도 모두 보여 주기식 연극에 불과할 뿐이니 안심하라며 아리안을 달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그 잎이 남았나?”

아리안이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달맞이 풀? 또 잠이 안 와?”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려 봐. 남은 게 좀 있어….”

아리안이 침대 밑으로 내려가더니 서랍을 열고 천으로 둘둘 싸맨 작은 주머니를 끄집어냈다. 그는 여전히 방금 막 딴 것처럼 푸르고 싱그러운 잎사귀 몇 장을 가지고 침대로 돌아왔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얹으며 대공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대공이 그 손에 들린 달맞이 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대공의 입술에 그 풀잎을 밀어붙였다. 저번과 달리, 대공은 서슴없이 입을 벌려 그 잎사귀를 받아 물었다.

“여기서 잘 거야? 좁을 텐데….”

아리안이 무구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그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을 뻗어 아리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여기서 잘 거야.”

그가 입에 잎사귀를 문 채로 속삭여 대답했다. 아리안의 시선이 그의 달싹이는 입술에 닿았다. 푸릇한 잎사귀를 문 아름다운 입술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시선을 눈치챈 대공의 입술이 더 둥글어졌다.

아리안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그의 입술만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저기….”

아리안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뗐다.

“아까 닛사 경이 그러던데 제물의 정결성을 판별하는 마법이 있다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만 그런 마법은 어차피 눈속임 마법에 불과하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하지만 만약 진짜면 어떡해?”

“진짜라면 더 상관없지.”

대공이 약간 머리를 기울이며 아리안에게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 아리안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가 정결하다고 나오면 어떡해?”

대공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잠시 말문을 잃고 아리안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다.”

닛사와 완벽하게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럴 리 없다니…. 만약 그게 눈속임 마법이 아니라 진짜라면 희생제도 진짜라는 거잖아.”

아리안이 투덜거렸다. 대공은 그 터무니없는 투덜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양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대공이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안의 허리를 더 끌어당겨 아예 그를 품으로 바싹 안았다.

그제야 아리안은 안심했다.

희생제에 대해 대공이 어떤 수를 감춰 놓았든 간에 아무튼 키스를 할 만큼의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아리안은 눈을 감고 대공을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대공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쨌든 인내심이 모두 닳아 없어지기 전에 입술이 와서 닿았으므로 아리안은 만족했다.

키스는 부드러웠다.

대공은 아주 느릿하게 입술을 붙여 가볍게 스치듯이 몇 번이고 비비다가 아리안이 안달이 나서 입을 벌리고 달라붙자 마치 아기 새에게 먹을 것을 넘기듯이 입 안에 물려 있던 잎사귀를 넘겨주었다.

입술 사이로 그 잎이 또다시 오고 갔다. 젖은 입술이 부딪칠 때마다 축축한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입 안으로 넘어온 대공의 혀를 달맞이 풀 잎사귀와 함께 빨았다. 반대로 자신의 혀가 빨릴 때에는 등허리에서 소름이 돋고 아랫배가 꿈틀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정신없이 키스에 몰두한 사이 대공의 손이 그의 옷 속으로 들어왔다. 긴 튜닉을 걷어 올려 바지 위로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에 아리안이 움찔했다.

“아, 안 돼.”

아리안이 한 손을 밑으로 내려 대공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것을 밀어내려고 끙끙거리면서도 열심히 대공의 입술을 빨았다.

한참을 또다시 입 맞춘 뒤에야 아리안이 아쉽게 고개를 뗐다. 그는 젖어서 반들거리는 대공의 입술을 흘끔거리다가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저번처럼 재워 줄게.”

아리안이 좁은 침대 한구석으로 엉덩이를 빼면서 자기 무릎을 탁탁 쳤다.

그것을 잠시 지켜보던 대공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잠드는 덴 그거보다 나은 게 있지.”

그가 그렇게 속삭이며 긴 가운을 천천히 벗었다. 아무 장식 없는 가운이 침대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연이어서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무거운 검집째로 그의 허리에서 빠져나간 벨트가 가운 위로 떨어졌다. 아리안의 입과 눈이 충격으로 모두 벌어졌다.

대공은 느릿한 동작으로 옷을 벗었다. 셔츠가 벗겨지고 그의 발달된 어깨와 벌어진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의 피부는 어슴푸레한 어둠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굴곡진 근육의 윤곽 아래로 진 그림자와의 대비가 뚜렷했다.

아리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숨이 가빠지면서 입 안이 바삭거렸다.

대공이 침도 못 삼키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리안을 향해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너는 거기서 가만히 있어. 내가 벗겨 줄 테니까….”

그 속삭임에는 성적인 유혹의 기색이 짙게 실려 있었다.

대공은 이제 완전한 나신이었다. 아리안의 얼굴은 폭발할 듯이 뜨거웠다.

대공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 속도로 아리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아리안은 석상처럼 딱딱했다. 대공이 짧게 웃으며 그의 몸을 뒤로 밀었다. 아리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대공이 자신이 옷을 벗은 것과 다르게 재빨리 아리안의 옷을 벗겼다.

이 방에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리안은 옷을 껴입고 있었다. 그러나 소매가 달린 긴 튜닉, 셔츠에 바지, 양말까지 모조리 대공의 손에 벗겨져 나가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공이 아리안의 희멀건 알몸 위로 천천히 자신의 몸을 겹쳤다. 그것과 함께 다시 입술이 붙었다.

침대가 좁았기 때문에 둘의 몸은 거의 완전히 겹쳐 있었다. 어둑한 그림자가 떨어져 대공의 등과 어깨만이 어렴풋이 번들거렸다. 그 밑에 깔린 아리안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굳은살투성이 손이 아리안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얄팍한 아랫배를 간지럽히듯이 느리게 더듬어 내려간 그 손끝이 다리 사이에 닿았다. 아리안의 페니스는 느슨하게 발기해 있었다. 살짝 머리를 든 끄트머리를 대공의 손가락이 교묘히 애무했다.

“으응….”

아리안이 발가락 끝을 구부리면서 희미하게 신음했다. 잠시 그를 애무하던 대공이 손으로 침대를 짚어 상체를 띄웠다.

“다리 벌려서 보여 줘.”

“으, 응?”

아리안이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면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이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좆이 보고 싶으니까 다리 벌려 봐.”

그 말에 다리가 아니라 입이 벌어졌다. 삽시간에 아리안은 가슴팍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 못….”

못 한다는 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어서.”

대공이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발등을 어루만졌다. 흰 발가락이 움찔 튀었다.

아리안은 어쩔 줄 몰라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다 대공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천박한 말로 아리안에게 다리를 벌리기를 강요한 남자의 얼굴은 이율배반적으로 단정했다. 그가 손끝을 아리안의 발가락 사이로 넣어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빨리.”

그가 다시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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