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정결성이라구요?”
“그래.”
“그, 그 정결성이라는 건….”
“하아. 성적 순결함 말이다.”
닛사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고 아리안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런 걸 확인하는 마법이 있다. 보통은 그냥 눈속임 마법에 불과하고. 네가 걱정할 건 없어.”
“하지만 만약에 그게 진짜 마법이고 내가 정결하다고 나오면요?”
아리안이 초조하게 캐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쯤 피식 웃기라도 했을 법도 한데 닛사는 전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매처럼 예리한 눈으로 아리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도르센에서 저 나이는 애가 하나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대공이 이 소년을 끌어안고 이틀 밤낮을 뒹군 것을 닛사뿐만이 아니라 오스발도, 그리고 하인들도 알았다.
닛사는 아리안의 무지함을 꾸짖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
닛사가 다시 한번 단언했다.
“그런 마법은 간단하지 않다. 일왕자는 마법보다는 더 간단한 방법을 사용할 거야.”
“더 간단한 방법이라니요?”
“증인.”
아리안의 얼굴이 맹하게 변했다. 닛사는 무표정으로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와 대공 전하의 관계를 증언할 증인 말이다.”
바로 다음 순간 아리안의 두 뺨이 달아올랐다. 그는 소매로 붉어진 뺨을 가리려 했다. 그건 제법 흥취를 돋우는 광경이었으나 닛사는 덤덤했다.
시선을 발부리를 향해 떨어트린 아리안이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대공… 전하는요?”
“바쁘시다. 당분간은 뵙기 힘들 거야.”
그녀가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아리안은 답을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닛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최대한 대비를 했고, 설령 만일의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네가….”
닛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희생 제물이 될 일은 없어. 대공 전하께는 네가 필요하니까.”
그녀는 아리안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은 네게 이 말을 하러 온 것이다. 쉬거라.”
닛사가 자리를 뜬 뒤 아리안은 넓지도 않은 방을 한참 동안 서성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닛사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일왕자. 그 변태가 아리안 하나를 손에 넣으려고 희생제라는 거창한 짓거리를 꾸몄다고? 게다가 궁정 마법사라니….
아리안은 궁정 마법사와 일왕자가 손을 잡았다던 닛사의 말을 돌이켰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치밀었다.
수정이, 아니 거울 한 조각이라도 있었다면 점을 쳐 볼 텐데, 불운히도 그에게는 유리 조각 하나 없었다.
아리안은 입술 각질을 뜯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빠르게 방 한가운데를 빙빙 맴돌았다.
수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대부분은 걱정스러운 쪽이었다.
희생제가 진짜일까?
설마!
아리안은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만일 그것이 진짜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제물이 인간이든 새끼 양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피 흘리는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모든 의식들, 마법들… 그런 것들이야말로 단순한 폭력과 달리 아리안의 몸을 효과적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닛사는 그가 희생 제물이 될 일은 없다고 했으나 희생제가 열리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리안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더 불안을 키웠다.
옛날에는 이단 재판에서 달아나기 위해 그를 대신할 진흙 인형을 만들곤 했었다. 진짜 사람 제물 대신 흙으로 빚은 인형 또는 속에 고기를 채워 넣은 주머니를 땅에 바치는 것은 오래되었고, 또 효과가 보장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리안에게는 그때처럼 정교한 진흙 인형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쪽 차원으로 넘어올 때 공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 권능의 대부분을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파살리아를 잠시 떠나 있는다면 이 희생제를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다 만일 파살리아 밖에서 일왕자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이어지는 온갖 끔찍한 상상에 아리안은 몸을 움츠리고는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일단 버섯에 마저 물을 주며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그것은 침대 아래의 타일 틈에서 자라난 것으로 흰색이었고 독성은 없는 종류였다. 이곳에서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식용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니 키우는 것을 발각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버섯에 물을 주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아리안은 침대 밖으로 다시 기어 나와 몸의 먼지를 털고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그의 머릿속의 이성적인 부분이 고개를 들었다.
이 차원의 문명 수준은 결코 높지 않으니 정교한 의식을 치를 정도조차 되지 못하리라. 그는 쇠락한 신전을 떠올려 냈다. 제대로 꽃피지조차 못하고 저물어 가는 문명. 그것이 이 행성의 역사였다.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희생제가 설령 진짜라 하여도 규모가 아주 크지 않는 이상 아리안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로 산 제물이 되어 목숨을 잃는 꼴만 피하면 된다. 또한 닛사가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단언했으니 위험해질 확률은 희박하겠지.
아리안은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들뛰던 심장이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칼릴을 믿어야 해.’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닛사가 말하는 걸 보건대 분명 수를 세워 뒀을 거야.’
휴우. 나지막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갔다.
아리안은 이제 완전히 원래의 속도를 되찾은 자신의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맡의 양초를 훅 불어 껐다. 불꽃이 사그라들며 어둠이 방을 덮었다.
아리안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밤에는 어차피 할 일이 없었다. 책은 정보와 지식의 저장 매체라기보다는 사치품이었고 그나마도 밤새 양초를 켜 놓는 것이 힘들어 저쪽에 있을 때처럼 밤새워 책을 읽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짧은 한 시간 동안 평소의 몇 배를 빠르게 뛰었던 심장 탓에 고단한 몸은 금방 수마로 빠져들었다.
절반쯤 잠에 빠져 아른거리는 정신으로 아리안은 닛사의 말을 돌이켰다.
희생제…. 정결함이라는 건 대체 무슨 기준일까.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손목에 앵무새 피를 떨어트려 삽입 성교 경험 여부를 판별해 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신체의 오염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여러 가지 의문들을 떠올리며 차츰 깊은 수면 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던 차였다.
무거운 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먼 복도에서 램프 불길이 일렁이며 방 안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미 거의 잠에 빠져 있던 아리안은 그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꽉 짓눌렀을 때에서야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비명을 지르려는 입이 커다란 손에 틀어 막혔다. 손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였고 돌덩어리처럼 딱딱하며 거칠었다. 아리안은 그 손의 주인을 알았다.
눈이 터질 듯이 커다랗게 뜨이고 심장이 팔딱거렸다. 아리안은 씩씩거리면서 코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눈알을 애써 굴려 몸 위에 올라탄 검은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칼릴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대공이 아리안을 올라타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리안은 입을 막은 그의 손을 밀치려고 버둥댔다. 이불 속에 깔린 탓에 팔을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대공이 곧 손을 치워 주었다. 그러자마자 아리안은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제 원망이 차올랐다.
조금 전에는 정말로 그대로 숨이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다. 문고리는 장식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노크를 하면 손목이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것에 대해 따져 물으려다 기억을 잃고 자신이 완전히 이곳 사람인 양 착각하고 있는 그를 생각해 참기로 했다.
아리안은 대공을 향해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속삭였다.
“바쁘다며?”
“맞아.”
“한동안은 얼굴 보기 힘들 거라던데?”
“닛사가 그러던가?”
대공이 그렇게 되물으며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닛사에게 얘기는 들었겠지? 별문제는 없나?”
“문제라고?”
아리안은 이불 속에서 부스럭거리면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당연히 많지. 희생제 말이야.”
한껏 숨죽인 목소리로 돌아온 그 대답에 대공의 입술이 얼핏 비뚤어졌다.
“닛사가 네게 말하지 않았나?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긴 했지. 근데… 그녀는 아는 게 별로 없잖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거 같은데, 걱정할 게 없지 않단 말이야.”
희생제는 아주 큰 문제야. 그렇게 아리안이 속삭였다.
“아는 게 별로 없다라. 닛사가 그 말을 듣는다면 기뻐하진 않겠군.”
그 말에 아리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닛사 경한텐 말하지 마. 그녀를 폄하하는 건 아니었어. 그냥… 그녀는 아직 한참 젊으니까 잘 모를 수도 있지, 뭐.”
그러면서 은근슬쩍 대공의 손등에 자기 손을 가져다 댔다. 대공은 그다지 기꺼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아리안의 손을 밀쳐 내지도 않았다. 그에 용기를 얻은 아리안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그걸 피할 방법은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