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희생제가 치러질 장소만 알아내면 근처에 기사들을 숨겨 둘 만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뭐, 사람을 빼돌릴 만한 길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지요. 닛사 경의 정령들이나 마법 눈을 빌려도 좋구요.”
오스발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일왕자의 사병은 대부분이 용병들입니다. 진짜 기사들은 몇 되지도 않더군요.”
일왕자는 충성심이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파살리아 사람이었다. 충성심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도르센의 가치와는 정반대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수십 년간 함께 훈련받고 작위를 받은 정예 기사들과 돈을 받고 단시간 내에 모인 용병들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명백했다.
“그 자식이 어디까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궁정 깊숙한 데까지 자기 용병들을 불러들여 난장판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이 기회에 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숫자는 적을 거고 비밀스럽게 움직일 테죠.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대공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대답 없이 잠시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여러 가지 의문이 되어 그를 자꾸만 괴롭혔다.
이 희생제는 정말로 일왕자의 하찮은 계략에 불과할까? 국왕을 허수아비처럼 가지고 노는 궁정 마법사들이 정말 일왕자의 이런 허튼 욕망에 어울려 줬다고?
그는 자신에게 독약을 내리던 국왕과 그 곁의 궁정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때의 불쾌함이 되살아나 그를 덮었다.
대공의 미간이 지그시 찌푸려졌다. 그것을 눈치챈 닛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대공이 시선을 닛사에게 던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닛사, 희생제에 대해 말해 봐라.”
이 희생제가 진짜라면?
“희생제는….”
닛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제가 어릴 적에는 그런 것이 종종 행해지곤 했었지요. 그때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닛사 경이 어릴 때라면 도대체 언제 적 일입니까?”
오스발이 나불거렸고 닛사는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흔히 아는 마법과 주술에는 대가가 필요하지요. 보통은 마력입니다만 물질적인 무언가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정령들은 보석을 먹기도 하고, 어떤 마법에는 몇 가지의 정교한, 잘 손질된 재료가 필요합니다.”
마법사의 주름진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스쳤다.
“물론 그 대가가 살아 있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초의 희생제는 거대한 소환 의식이었습니다. 십만 명을 죽여 그 피를 대가로 수정 호수 반대편의 악신을 불러왔다고 하죠.”
그것은 여기 있는 대공도, 오스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최초의 그림자 마수를 불러낸 최초의 흑마술사 이야기. 왕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대륙의 번영과 쇠락, 멸망에 얽힌 전설.
“성공하는 희생제는 드뭅니다. 소환 의식이든, 아니면 어떤 타락한 주술이든 간에. 그리고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부당한 희생으로 불러낸 것이 선한 것일 리는 없죠.”
닛사가 한숨을 쉬었다.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악한 것을 부리는 흑마술이 횡행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거의 다 소실되었죠.”
천년 왕국의 역사에서 그림자 마수와의 전쟁이 항상 물리적 전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어떤 왕들은 그림자 마수를 길들이려고 했다. 어떤 왕들은 다른 강대한 것을 불러와 대적해 보고자 하기도 했다. 어떤 왕들은 이용하려 했고, 어떤 왕들은 달래려고 했으며, 어떤 왕들은 두려워 숭배했다.
희생제는 그 흔적이었다. 오라스테스의 전쟁은 그 미개함의 종식이었고.
“희생제가 진짜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닛사가 단언했다.
“보여 주기식 연극에 불과할 겁니다.”
원하는 결과만을 보여 주는 눈속임 마법들. 여태까지 궁정 마법사들이 그런 마법으로 국왕의 눈을 현혹시켜 왔으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계시라던 국왕의 꿈처럼.
“그래….”
대공은 나이 든 대마법사의 덤덤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닛사가 그를 찾아온 건 늦은 밤이었고 그때 아리안은 침대 밑에 자란 버섯에 물을 주고 있었다.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열자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의 닛사가 서 있었다.
아리안은 닛사가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경고하러 왔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지레 겁에 질려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두 번 다시 대공의 침대에서 잠들어서는 안 된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운운하는 냉혹한 경고 말이다.
그러나 닛사의 방문은 그런 연유가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그것은 아리안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한마디였다.
“희생제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였으나 그게 곧 뛰어난 선생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대뜸 던져진 말에 아리안이 눈을 멀뚱거렸다.
“희생제요?”
“그래.”
닛사가 한숨을 쉬었다.
“일왕자의 더러운 수작이지.”
아리안이 움찔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닛사는 혹시 그가 패닉에 빠지거나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할까 걱정되어서 빠르게 말했다.
“네가 걱정할 것은 없어. 어차피 그 자식 뜻대로는 안 될 테니까.”
물론 아리안은 패닉에 빠지지도 울음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가 움찔했던 이유는 단지 일왕자가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희생제라니요?”
아리안은 그녀가 말하는 희생제와 자신이 알고 있는 희생제의 개념이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고민하면서 되물었다.
닛사가 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희생제.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 제물을 바치는 희생제가 드물지 않게 있었지.”
“…인간 제물.”
“그래.”
닛사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네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녀가 잠시 시선을 흔들리는 촛불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아리안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연관된 일이니 숨기는 것도 우습겠지.”
아리안은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닛사는 그다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궁정 마법사들이 희생제를 주창했다. 그 당위성이야 당연히 논할 가치조차 없지만… 희생제에 신관을 바쳐야 한다는 일왕자의 주장은 제법 그럴듯해.”
닛사가 짧게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항상 반복되어 왔지.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것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무튼 아리안은 그 짧은 몇 마디만으로 상태를 파악했다.
대공을 찾아왔다던 일왕자. 그 변태 이상 성욕자가 아직도 아리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일왕자는 욕심 많은 사내다. 불쾌하고 천박한 놈이기도 하지. 그놈에게는 왕자의 옷보다 돼지치기의 옷이 어울려.”
닛사로서는 드물게도 심한 욕설이었다.
“하지만 그자가 궁정 마법사들과 손을 잡았을 것이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잘못이다. 정확히는, 내 잘못이지. 오스발 녀석의 잘못이기도 하고. 대공 전하를 모시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닛사가 그렇게 단언했다.
아리안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희생제. 일왕자의 변태 성욕은 그에게 문제가 안 되었다. 그러나 피를 동반하는 희생제는 다른 문제였다.
감정 없는 폭력은 그의 신체에 단지 삼차원적 상처뿐 그 이상을 남기지 못한다. 아리안은 그런 폭력을 감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았다. 로렌스 신부의 비약(<로미오의 줄리엣>에서 등장했던 것과 같은 종류로, 음용한 자를 일정 시간 동안 가사(假死) 상태로 만드는 약)은 그중 하나였다. 몇 가지 허브를 조합하면 그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만약 일왕자가 바라는 게 그냥 내….”
닛사는 아리안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늙은 마법사는 그가 할 말을 다 듣기도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형제가 애인을 나누어 갖는 것이 파살리아식 궁정 연애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르센에서는 아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그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실 이유가 없어.”
그녀는 일부러 파살리아식으로 정부라는 단어 대신 도르센식으로 애인이라는 단어를 썼다.
아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희생제는….”
“넌 희생 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리안이 이번에는 고개를 들었다. 닛사가 흐흥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일왕자가 정말로 널 탐내 이런 일을 꾸몄다면 희생제가 시작되기 전에 널 빼돌리려 할 것이다. 그 자에게 시간(屍姦)의 취미가 있다면 모를까.”
그건 몹시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정말 농담이었다면 말이다.
닛사는 아리안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널 다시 빼낼 것이다.”
“어, 어떻게요?”
“고대의 희생제는 제물의 정결성을 따지지.”
그때야말로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