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4)화 (34/130)

#34

“설마 그자의 능력을 알아차린 건….”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대공은 알현실에서 있었던 일왕자와 궁정 마법사 간의 찰나의 시선 교환을 떠올렸다. 그 순간 명백하게 있었던 그들 사이의 거래도.

그의 얼굴에 흐린 불쾌함이 스쳤다.

“일왕자와 궁정 마법사 사이가 우리 생각보다 돈독한 모양이야.”

아르바와 나일 사이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정치적 균형이 있었다. 그 균형은 둘의 공통의 적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노망난 국왕, 바로 그들의 부친이었다. 아르바의 힘은 그녀의 군대와 지방 영주들에서 왔고, 나일의 뒷배는 파살리아의 궁정귀족들을 위시한 부유한 외가였다. 국왕은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는 동안 왕녀와 왕자들의 외가를 모두 적으로 돌렸다. 그것이 왕의 자식들 간 힘의 평형을 가져왔다.

“일왕자는 친국왕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친국왕파가 아니라고 해서 궁정 마법사들과 손을 잡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렇다면 이것도 그 녀석의 하찮은 모략일까요?”

오스발이 약간은 얼떨떨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 멍청이가 대체 뭘 노리고 이런 짓을….”

거기서 그의 말이 뚝 멎었다. 모두의 생각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 호사스럽고 난잡하던 연회의 밤. 대공이 망토에 둘둘 싸인 헐벗은 소년을 일왕자의 거처에서 빼내 왔던 그 밤 말이다.

오스발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요! 말도 안 됩니다. 그자가 그렇게 멍청할까요? 고작… 그런….”

“미인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더한 멍청이들이 많지.”

닛사가 조용히 대답했다.

“문제는 그 소년이 단순히 조금 예쁜 얼굴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는 거고.”

“닛사의 말이 옳다.”

대공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은 그자를 뺏길 수 없다. 적어도 이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는.”

“대역을 세우는 건 어떨까요? 비슷한 나이의 소년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일왕자가 그의 얼굴을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짧은 정적. 그리고 닛사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전하. 하룻밤이면 군대를 성벽 바깥까지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들이 끌고 온 사병은 아직도 오백 명 가까이 남아 있었으며 하나하나가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정예병이었다. 그들은 파살리아 성에서 약 이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평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닛사의 마법이라면 그들 모두를 하룻밤 새에 파살리아 성문 코앞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 녀석을 데리고 파살리아를 떠나는 거죠.”

오스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닛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때때로 이상할 정도로 호전적으로 변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파살리아를 떠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아르바 누님과의 동맹은 끝이다. 코르키라의 전황이 얼핏 불리한 것처럼도 보이지만 새로운 요새가 완성되기만 하면 상황은 역전될 거고 누님은 코르키라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될 거야. 결국 언젠간 누님이 왕국의 주인이 될 것이고, 나는 그때 도르센의 등 뒤에 적을 두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면….”

“군대를 불러오는 것도 비슷하다. 파살리아 성벽 안에서 국왕과 대놓고 반목하는 것도 미친 짓이지.”

“제가 섣불렀습니다.”

닛사가 고개를 숙이자 오스발도 덩달아 따라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대공은 손끝으로 허리춤의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왕자가 신관을 탐내 이 짓을 벌였다면 신관을 빼낼 수를 미리 마련해 뒀다는 거겠지.”

그것이 무슨 수가 되었든 궁정 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어느 시점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때 닛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과연. 그치가 무슨 수를 쓰려는지 알 것 같군요.”

“뭐라구요?”

오스발이 초조하게 되물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불거리는 주둥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닛사 경. 이제 예언까지 합니까? 진짜 예언가는 여기 있었군요.”

닛사는 오스발을 무시하고 대공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일왕자가 정말로 궁정 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면 제물을 바꿔치거나 희생제를 멈추지 않고도 제물을 빼낼 방법이 있습니다.”

대공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까닥였다.

“엄격한 희생제에는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시간, 장소, 절차, 순서… 그리고 희생 제물에 대한 것도요. 코르모 두스의 희생제 비의는 산 제물의 조건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첫째 항은 이거죠.”

그녀가 불쾌하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제물은 순결할 것.”

오스발이 실소를 터트렸다가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고쳤다.

닛사는 웃지 않았다.

“산 제물에 어린아이들이 주로 쓰이던 이유입니다.”

“역겹군요.”

이번 오스발의 말에는 닛사도 긍정했다.

“그래. 더 고대에는 아예 희생 제물용으로 쓰기 위한 아이들을 기르던 기관도 있었다. 타락한 신전들이 그런 일을 주로 했지.”

역겨운 과거사는 대공의 관심은 아니었다. 대공이 손으로 턱을 고이며 물었다.

“네 말은, 그가 애초에 부적격이니 희생제의 제물이 되지도 않을 거라고?”

“예.”

“희생제를 망쳤는데 국왕이 제물을 살려 두려 할까?”

“살려 둘 겁니다. 그게 희생제의 규칙이니까요. 희생제에 부정한 피를 흘리는 건 금기죠. 규칙대로 그를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나면 그다음에 빼돌리는 일이야 뭐….”

닛사가 입술을 약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손쉬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정결하지 않다는 건 무슨 기준이지? 그런 걸 판별하는 마법이 있나?”

“그런 마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 같은 방식은 아닙니다. 보통은 더 쉬운 방법을 선호하죠.”

그녀의 입술이 더 비뚤어졌다.

“누군가의 고발, 증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아마 일왕자는 그런 증언을 할 만한 사람도 확보해 두었을 겁니다.”

대공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좁아졌다.

제물의 부적격함을 증언할 사람. 왜 없겠는가? 그가 아리안을 침실로 불러들였던 탓에 그것을 목격한 하인이 적어도 다섯 명은 되었다. 대공은 아랫사람들을 입단속시켜야 할 만한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주의였으나 이번만은 그가 안일했다.

그때 오스발이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만약 그런 거면 다른 게 더 큰일 아닙니까? 일왕자가 그걸 핑계로 대공 전하를 깎아내리려 들면 어떡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그 녀석이 신전의 사제 명부에 올라가 있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러니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녀석은 신관이 맞습니다. 그런 신관에게 대공 전하께서 사사로이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닛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희생제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합니다. 희생제가 성공하면, 물론 진실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성공했다고 국왕이 믿는다면, 차후에도 신관의 부정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누가 되었든 불쌍한 희생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스발이 억눌린 한숨을 토해냈다. 대공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팔걸이를 움켜쥔 손등에 힘줄이 돋아 있었다.

닛사가 약간 고개를 옆으로 숙이고 시선을 밑으로 떨어트렸다. 씁쓰레한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일왕자도 희생제를 망치고 싶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그 소년을 희생 제물로 추천했던 게 일왕자입니다. 부적격한 제물 때문에 희생제를 망친다면 그 또한 국왕의 진노를 피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그 자신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무튼 둘째 왕녀가 귀환할 때까지는 좋건 싫건 파살리아에 붙어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국왕의 눈을 속이는 건 일왕자에게 맡겨 두면 됩니다. 저희는 그저 지켜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그 소년을.”

닛사는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단어를 바꿔 말했다.

“…신관을 빼내면 됩니다.”

결론이 나왔다.

국왕이 사람들을 불러놓고 대놓고 희생제를 하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이제 파살리아의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말이 퍼지는 속도만큼 사람들의 입단속을 시키기도 어려워지리라. 그만큼 정보를 얻는 것은 쉬워지겠고.

오스발이 침착하게 말했다.

“궁정백의 하인 중에 얼마간의 돈을 준다면 매수할 만한 자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접촉해 보겠습니다.”

이 능청스러운 기사는 의외로 첩보 활동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도르센에서 가져온 돈을 풀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았고 그중에는 쓸모 있는 자들이 제법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파살리아 궁정 귀족들을 대표하는 궁정백은 일왕자와는 썩 성격이 맞는 편은 아니었으나 아르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일왕자 편으로 치우쳐 있는 인사였다. 그런 자의 하인을 매수한다면 희생제에 대한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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