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3)화 (33/130)

#33

이전까지 팔짱을 끼고 한 발자국 뒤에 물러나 있던 나일이 갑작스레 앞으로 나섰다. 그가 옥좌 아래의 계단까지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 희생제에 대해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국왕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거미발 같은 손가락이 주름진 턱을 쓸었다.

“짐의 장남, 우리 왕국의 첫째 왕자가 희생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가?”

그 순간 나일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시선을 돌려 대공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것과 함께 그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아주 짧은 마주침이었다. 나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아우가 신관을 데리고 있답니다.”

국왕의 허옇게 센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가고 궁정 마법사가 고개를 돌려 나일을 내려다보았다.

“젊고 순결한 신관이지요. 안 그렇나, 아우?”

그러면서 나일이 대공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일의 입가에 히죽이는 웃음이 짧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가 다시 국왕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파살리아에는 신실한 신관이 몇 안 되지요. 진실로 정결한 신관이라면 그 누구보다 희생제에 걸맞은 제물이 아니겠습니까?”

국왕이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일왕자의 말이 사실인가?”

대공 대신 나일이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아주 젊은… 정말로 젊은 신관이더군요. 믿기지 않으신다면 신전의 사제 명부를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국왕의 시선이 이번에는 궁정 마법사를 향했다.

“마법사여….”

그가 손짓해서 마법사를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궁정 마법사가 옥좌의 팔걸이에 몸이 바짝 붙을 정도로 국왕 가까이로 다가왔다. 국왕이 쿨룩거리는 가래 기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하는 희생제에 정결한 신관이 의미가 있는가?”

그 순간 궁정 마법사가 고개를 돌려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두건 밑으로 길게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이 얼핏 드러났다. 그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공은 그것이 일왕자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렸다. 일순간의 시선 교환, 그리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마법사가 다시 고개를 돌려 국왕을 향했다.

“폐하.”

공손히 고개 숙인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 어떤 공양도 진실로 정결한 신관에 비교되겠습니까?”

마법사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시대에 정말로 신실한 신관은 드물지요. 더군다나 젊은 신관은 더더욱… 이곳에 계신 모두가 아시다시피 오라스테스의 전쟁에서 신관들이 대부분 죽은 뒤 신전의 명맥은 끊어지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렇지. 그러하지….”

“정말로 대공 전하께서 신실한 신관을 데리고 있다면 왕국의 왕자이자 국왕 폐하의 아들 된 도리를 다하고자 그자를 기꺼이 희생제에 바치지 않겠습니까?”

“오… 그래. 맞는 말이다. 네가 진정 옳구나, 마법사여.”

국왕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중얼댔다. 희뿌옇게 백태 낀 눈이 계단 아래를 더듬어 대공을 향했다. 탐욕이 실린 누리끼리한 눈이 희번덕거리며 대공의 젊고 아름다운 몸을 훑었다.

대공에게는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국왕이 흐뭇하다는 듯 떨리는 엄지로 왕홀에 박힌 보석을 쓰다듬었다.

“짐의 막내아들이 참으로 왕국의 충신이로다.”

“맞습니다. 폐하. 대공 전하께서 신관을 바치셨으니 희생제의 준비는 일왕자 전하께 맡기시지요. 폐하의 첫 번째 아드님이야말로 이런 막중한 의무를 맡으시기엔 적임이 아니겠습니까?”

“맞다, 맞아. 그 말이 맞도다….”

국왕이 부들부들 경련하는 손으로 왕홀을 들어 일왕자를 가리켰다.

“이런 일은 보통 짐의 둘째 딸이 도맡지만… 왕녀는 지금 파살리아에 없고, 궁정백은 조세 징수 일로 바쁠 터이니 첫째 왕자가 하는 것이 맞겠구나. 첫째 왕자가 희생제를 준비하고 막내 왕자는 그것을 돕도록 하라.”

대공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알현실의 모든 눈은 대공과 일왕자에게 꽂혀 있었다.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 그것을 깬 것은 국왕의 기침 소리였다. 옥좌에 앉은 국왕이 허리를 굽히며 격렬하게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궁정 마법사가 그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소매를 경련하는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륵 그륵 가래침 끓는 소리와 함께 국왕이 거기에 누런 침을 뱉었다.

“폐하. 희생제가 끝나면 왕국에 드리운 암운도 걷힐 것이고 그러면 폐하께서도 기력과 젊음을 되찾으실 것이옵니다.”

“그래… 그래야지….”

마법사의 속삭임에 국왕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들은 서둘러 희생제 준비를 하도록 해라. 어서… 빨리….”

그 중얼거림에는 광기마저 실려 있었다.

일왕자가 아주 기껍다는 듯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

알현실에서 나와 긴 회랑을 걷는 대공을 뒤에서 나일이 불렀다.

“우리 아우.”

그가 친근한 척 대공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보다 반 뼘 밑에 있는 나일의 눈을 곁눈질했다.

“안타깝게 됐군.”

나일이 뱀 같은 눈으로 대공을 살폈다.

“이래서 극야에는 파살리아에 안 있는 게 좋은데….”

그가 정말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더니 대공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나일의 목소리가 탐욕스럽게 낮아졌다.

“어때, 동생. 아직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 없나? 응?”

“에수스의 온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나일의 눈이 욕망으로 가늘어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 밤에라도 당장 출발할 수 있다구. 잘 생각해 봐, 동생. 이런….”

그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대공에게로 더욱 바싹 얼굴을 기울였다.

“…병신 놀음에 어디까지 놀아날 작정이야. 응? 희생제라고? 하하!”

그러면서 그가 뱀처럼 속삭였다.

“대역은 내가 준비해 둘 테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리고 언제까지 도르센 그 촌구석에 박혀 있을 생각이야? 응? 봄이 되면 다시 떠날 거라고? 누님께서 그러라고 시키던가? 널 경계해서? 하하, 누님은 그게 문제야… 같은 편에게도 너무 엄격하거든. 반면에 나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다시피 관대하지.”

그 말에 대공은 실소를 참지 못하고 낮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나일의 표정이 밝아졌다.

“에수스의 온천물은 아주 기가 막히지. 틀림없이 맘에 들 거야. 물론 내 저택도… 거긴 한겨울에도 불을 땔 필요가 없어. 사방이 뜨거운 온천으로 둘러싸여 있거든. 모드론의 쌍둥이들도 같이 데려갈 건데… 네게 양보해 주지. 이번에야말로 어느 쪽이 계집앤지 잘 맞혀 보라구.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을걸. 거기 도착하자마자 옷을 모조리 빼앗을 작정이거든. 하하! 물론 네 신관도….”

음탕한 속삭임이 이어지는 도중, 대공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그의 팔을 떼어 냈다.

“전장에서 자란 촌놈한테 에수스의 온천물이나 구정물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런 귀한 물은 형님께서 즐기시기에도 아까운 것을요. 굳이 제게 낭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나일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툭툭 쳤다. 마치 친한 동료나 부하들에게 할 법한 동작이었다. 나일이 당혹스럽게 어, 어, 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 순간, 대공이 몸을 돌렸다.

“후회할 거야!”

대공의 등 뒤로 이를 가는 나일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대공은 물론 무시했다.

그는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닛사와 오스발을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두 가신은 즉시 달려왔다.

“국왕이 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덥니까?”

오스발이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성급히 그렇게 물었다. 닛사가 그를 쏘아보며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오스발이 대공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희생제를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 질문에 대공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소문이 빠르기도 하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닛사 경의 눈이….”

오스발이 닛사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간 날카로워야지요.”

닛사가 낮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녀의 양 팔목에 걸린 금속 팔찌들이 절그럭거렸다.

대공이 의자에 길게 기대앉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 말이 맞다. 희생제가 있을 거다.”

“고대에 했던 것처럼 천 명을 한꺼번에 죽여 피로 강을 만들기라도 하겠다덥니까?”

닛사가 물었고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나빠. 신관을 내놓으라더군.”

“신관이라고요?”

오스발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래, 우리 신관.”

대공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빈정거리는 기색이 섞여 있었으며 얼굴에는 흐릿한 조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신관’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닛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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