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0)화 (30/130)

#30

“때렸다고?”

“그래! 나는 맞기만 했어.”

아리안의 기세가 다시 등등해졌다. 퍽 억울하다는 듯이 처연한 눈빛으로 대공을 올려다보면서 일왕자의 무도한 폭력에 대해 호소했다.

“어딜 때렸어? 상처는 없는 것 같던데.”

“여, 여기저기 다 때렸어.”

대공이 미심쩍다는 듯이 손을 아리안의 외투 안으로 비집어 넣어 다소 난폭하게 몸통을 여기저기 쓰다듬었다. 아리안이 그 손을 피하려고 몸을 비틀어 대자 아예 돌덩이 같은 허벅다리로 하체를 깔아 눌러 고정시키고서는 한참을 더듬어 댔다. 기어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리안이 씩씩거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만하고 들어 봐. 중요한 얘기란 말야.”

아리안이 필사적으로 대공의 팔을 밀어내며 끙끙댔다.

“내 생각엔 그 불면증이 당신의 그, 지, 지, 지루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이걸 가져왔는데….”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외투 안쪽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허름한 주머니였는데 그 안에서 손톱만 한 잎사귀가 줄줄이 붙어 있는 긴 풀줄기가 튀어나왔다. 그 잎사귀들은 어딘가에서 갓 따 온 것처럼 싱싱하고 푸르렀으며 물을 듬뿍 머금어 통통하기까지 했다.

“이건 달이 없는 밤에 싹을 틔운 달맞이 풀 잎사귄데, 이걸….”

대공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고서 아리안의 손에 들린 그 푸른 싹을 노려보았다.

‘저게 어디서 난 거지?’

지금은 겨울, 극야의 한중간이었다. 태양은 없고 호수는 얼어붙었으며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시드는 죽음의 계절. 파살리아 성에 국왕의 온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값비싼 과실수 또는 아름다운 화초들이었다. 그곳에 저런 볼품없는 잡초가 자랄 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왕의 온실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몰래 숨어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정원사의 목이 베이리라.

“이 잎을 거꾸로 겹쳐서 입에 넣고 자면 좋은 꿈을 꿔. 내가 알던 드루이드들은 이 풀을 기르기 위해 작은 온실을 만들곤 했는데, 뭐, 사실 이젠 낡은 지혜에 불과하지. 요즘에는 더 좋은 게 많으니까. 디아제팜이나 알프라졸람, 벤조디아제핀… 신경 안정제 말이야. 아무튼. 자, 이렇게 하면 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던 아리안이 자기 입을 벌려 시범을 보였다. 대공은 반들거리는 잎사귀를 얹은 그 혓바닥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조용히 경고했다.

“파살리아의 모든 것은 국왕의 것이다. 국왕의 땅에서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지. 함부로 훔쳤다가는 손목이 잘릴 테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 경고에 아리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쯤 뒤에 그가 당황한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건 훔친 게 아니야.”

“그럼 정원사가 네게 줬나?”

“아니야.”

아리안이 또다시 부정했다.

대공의 머릿속에 그가 무슨 수로 정원사를 꼬여 내 저것을 손에 넣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 순간, 아리안이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에 잎사귀를 욱여넣으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이곳이 침대 위가 아니었다면 그의 손목이 당장 잘렸을 것이고, 이곳이 도르센이었다면 그를 침대 밖으로 걷어차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은 그를 걷어차 침대에서 굴러 떨어트리거나, 또는 검을 뽑아 들어 발칙한 손목을 베어 버리는 대신 그의 손에서 그 싱그러운 잎을 재빨리 빼앗아 아리안의 입에 넣었다. 대공과 달리 아리안은 너무도 손쉽게 입술을 벌려 그것을 받아 물었다. 그리고 대공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의 아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건 내가 아니라 당신한테….”

아리안이 무어라고 웅얼거리다가 대공의 입술이 닿는 순간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추다 뿐인가. 양팔로 대공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을 벌려 가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반들거리던 잎사귀는 입과 입을 오가며 축축하게 젖어 흐물거리다 결국 어디론가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으으응….”

아리안이 낮게 신음하면서 양팔로 대공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입술을 대공의 입술에 문질러 가면서 입맞춤을 더 해 달라고 졸랐다.

침대로 들어오기 전까지 발버둥을 쳐 가면서 놔 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그 누구라도 키스만 해 준다면 대롱대롱 매달려 따라가지 않겠는가.

작은 의심이 그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들이 몸을 섞었던 지난 밤 그를 황홀한 듯 올려다보던 아리안의 애정 넘치는 눈빛을 떠올렸다. 그것은 필사적이었다. 이 어리숙한 소년이 누구에게나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공은 약간 입술을 띄우고 몽롱하게 넋이 나간 아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맞춤이 멈춘 것에 의아해하는 눈동자가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그 얼굴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정말 일왕자하고 키스하지 않았나?”

“정말 안 했어….”

아리안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제에 발끈하는 꼴이 우스워서 대공은 그를 와락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몇 바퀴 굴렀다. 아리안이 아악 하고 비명을 올렸다.

한참 얼싸안고 입술을 뒤섞은 끝에, 대공은 속는 셈 치고 그의 장난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어디 한번 해 봐.”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지고 옷이 절반쯤 벗겨진 아리안이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다가 그 말을 알아듣고는 재빨리 새 잎사귀를 꺼내 대공의 입에 넣었다. 대공이 눈을 감자 아리안이 발칙하게도 그 머리를 들어다가 자기 무릎에 얹었다. 따듯한 손가락이 대공의 미간을 살살 간지럽히듯 쓰다듬었다.

아주 우스운 짓거리였다. 아기를 재울 때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울려 주기로 했으니 잠시는 기다려야겠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감히 대공의 입에 풀 조각을 욱여넣은 죄를 추궁하고, 그 김에 겁도 없이 국왕의 온실로 숨어들어 가 도둑질을 하는 못된 버릇도 단단히 고쳐 주고….

*** 

대공의 아침 식사는 보통 닛사나 오스발과 함께이다. 혼자일 때도 있으나 파살리아로 온 이후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침 식사 시간을 일종의 원격 정무 회의처럼 사용했다. 도르센의 소식을 전해 듣고 몇 가지 가벼운 결정을 내리거나 또는 닛사나 오스발에게 의견을 묻는 식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으레 파발마가 도르센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약간 달랐다.

일단 대공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잠에서 깼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등 뒤에 달라붙은 뜨끈한 체온과 묵직한 무게였다.

소년이 양팔 양다리로 그의 몸통을 휘어 감아 매달린 채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숙하게 잠들어 있었다.

대공은 잠시 말문이 막혀 그대로 몇 분 정도 가만히 있었다.

아리안에게서는 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잠든 것일까. 그들은 심지어 잠옷 차림도 아니었다. 절반쯤 닫히다 만 침대 휘장 밖으로 불길이 거의 꺼져 가는 벽난로가 보였다. 입 안에는 씁쓰레한 약초의 맛이 남아 있었다.

대공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그를 나무뿌리처럼 휘어 감은 아리안의 팔다리를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리안은 대공이 떠나가자 체온이 남은 자리에 얼굴을 묻고 꿈틀대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공은 그를 냉정히 뒤로하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일단 구겨진 옷을 벗었다. 침대 밖 공기 중에는 약간의 냉기가 감돌았다.

그는 시간을 궁금해하면서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불렀다. 곧 하인이 씻을 물과 수건, 새 옷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때까지도 아리안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감히. 대공의 침대에서. 혼자 자빠져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하인이 대공의 눈치를 보았다.

“깨워 내보낼까요?”

대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응답에 하인은 고개를 재깍 숙이고 자기 일로 돌아갔다.

대공이 얼굴과 손발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도 아리안은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낮게 징징거리는 소리를 흘리긴 했지만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대공은 의자에 앉아 부츠를 신었다. 직접 고급스러운 가죽 부츠의 끈을 당겨 묶으며, 입을 열었다.

“씻을 물과 새 옷을 한 벌 더 가져와라.”

대공이 몸을 씻은 세숫대야와 수건을 정리하고 있던 하인이 약간 겁에 질린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다행히 하인이 두려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공의 침대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대공의 애인을 깨우는 일 말이다.

하인이 새로운 물과 옷을 가져왔을 때 아리안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는 대공의 침대로 들어올 위기에 처했던 하인만큼이나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가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절반쯤 열려 있는 침대 휘장 밖에 앉아 부츠 끈을 묶고 있는 대공의 옆얼굴이었다.

아리안은 시각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나 모든 창문은 닫혀 있었고 해가 없어 도통 알기 어려웠다.

아무튼 새벽녘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공이 옷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었으므로.

아리안이 자신이 대공을 쫓아내고 밤새도록 침대를 차지한 것이 아닌가 겁에 질려 있을 때, 하인이 침대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