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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29)화 (29/130)

#29

대공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누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괜찮으시겠지요. 아마 봄쯤에는 승전보가 날아올 겁니다. 초여름에는 승전 연회가 있겠고요. 동생으로서 누님이 하시는 일에는 걱정 안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왼쪽 팔걸이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나일을 바라보았다.

“정 걱정되시면 이번 전보에 형님께서 걱정하시더란 이야기를 적어 보내지요.”

“오, 그래. 꼭 부탁하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누님하고는….”

그가 양손을 깍지 껴 턱밑에 대며 웃었다.

“…그다지 친근한 사이가 아니잖나. 너하고는 다르게 말이야. 흠. 나는 너나 누님과 다르게 기사도 아니고. 전쟁은 내 특기도 아니지.”

일왕자는 뱀 같은 사내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왕녀보다 뒤떨어졌으나 그의 재능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잘 알았다. 교활한 눈빛이 대공을 훑었다. 대공은 그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나일이 시선을 벽난로 쪽으로 돌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최근 성 분위기는 너도 알지? 별로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떤 일이든 이 성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건 부왕께서 아실 일이지요.”

그러니 나한테 얘기할 필요는 없다는 완곡한 표현에 나일이 히죽 웃었다. 그가 마치 초조한 것처럼 다리를 약간 떨면서 상체를 앞으로 끌었다.

“에수스에 겨울 별장이 있어. 여기서 마차로 사흘밖에 안 걸리지. 곧 떠날까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나, 동생?”

이것은 과연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대공의 반듯한 미간에 보일 듯 말 듯 한 주름이 졌다.

“에수스 화산의 온천물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 파살리아 귀족이라면 개나 소나 거기에 별장을 갖고 있다니까? 우리 동생은 아직 파살리아의 유행을 잘 모르니, 이번 극야는 내 별장에서 함께 보내는 건 어때? 십 년 만에 재회한 형제가 우애도 다지고 회포도 풀고….”

나일의 얼굴에 드디어 가면이 벗겨져 떨어지고 안달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숨기지 못한 음탕한 기색, 거기에 더해 탐욕이 두 눈에 번득였다.

“그렇다고 놀고먹기만 하자는 건 아니야.”

그가 짐짓 차분한 척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가슴팍에 한 손을 얹었다.

“나한테 옛 경전이 한 권 있거든. 금박을 씌운 장정에 아주 화려하게 채색이 된 귀한 건데… 네 신관에게 그걸 낭송하라고 하면 되겠군. 너도 알다시피 파살리아에는 이제 신관이 없으니까.”

대공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당겨 올라갔다. 동시에 푸른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 서늘한 눈이 나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이 호색한 왕자가 아직 아리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냉소적인 미소가 대공의 반듯한 입가에 떠올랐다.

“글쎄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둘째 형님께서도 자리를 비우셨고 누님도 안 계시는데 저희마저 파살리아를 비우면 누가 폐하를 보필합니까?”

“아….”

나일이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렸다.

“동생은 파살리아에 온 지 얼마 안 돼 여기 분위기를 잘 모르겠군.”

“무슨 의미신지 이 동생은 아둔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이보게, 동생.”

나일의 목소리가 지긋이 낮아졌다.

“형님 된 도리로서 말해 주는 건데 극야에는 파살리아에 있지 않는 편이 나아. 우리가 없는 편이 부왕께서도 더 편안하실 거고….”

그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했으며 표정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을 숨기듯이 의문스러웠다.

대공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그 얼굴에 서린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나일이 한 번 씩 웃었다. 그가 양팔을 벌려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무래도 나이도 있으시고. 우중충한 겨울에 우리가 괜히 왔다 갔다 해서 부왕의 심기를 거스르느니 그냥 피해 있는 편이 서로 좋다는 거지. 그리고 보필은 걱정 안 해도 돼. 충성스러운 궁정 마법사들이 어찌나 극진히 폐하를 보살피는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먹먹해졌다가 곧 원래의 톤을 되찾았다.

“…아들로서 부끄러울 지경이라니까.”

그러니, 응, 어때?

나일이 닦달하듯 되풀이해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석상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대공은 곧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 전하께서는 저와 달리 올바른 관계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신 분이 아니십니까? 굳이 신관의 기도가 필요하시진 않을 텐데요. 물론 초대는 감사합니다.”

그 완곡한 거절에 나일의 미간에 주름이 지며 입술이 비뚤어졌다. 그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하, 하, 하… 그래. 뭐어.”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우 생각이 그렇다면야 뭐. 생각 바뀌면 연락해.”

“그러겠습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대공은 눈과 입으로 각각 상반되는 말을 하면서 그를 따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왕자 전하께서 돌아가신다. 모셔다드려라.”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세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나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일이 태연한 척 그들을 따라 응접실을 떠난 뒤, 대공은 다시 의자에 털썩 몸을 던져 주저앉았다. 아무렇게나 펼친 팔다리가 그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닛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주군의 심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린 그녀가 도로 뒷걸음질 쳐 방을 떠나려다, 대공의 손짓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 들어와.”

대공이 그녀를 향해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닛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응접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일왕자가 남긴 향수의 향기가 진득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이 대공의 불쾌감을 부추겼다.

나이든 마법사가 대공의 지긋이 찌푸려진 눈썹 사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뭘 노리는 걸까요?”

대공은 그 답을 알았지만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야트막한 비웃음을 흘렸다.

“뭘 노리든 상관 없어. 어차피 누님께서 돌아오시면 뒤편으로 물러날 인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대로였다.

일왕자가 이제 와서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 누이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튼튼한 사슬을 스스로 놓아 버리고 썩은 동아줄로 옮겨 타겠는가?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충고를 하는 척 신관 얘기를 꺼내는 꼴이라니….

대공은 습관적으로 검 자루를 쓰다듬었다.

“닛사.”

“예.”

“신전의 사제 명부는 어떻게 됐지?”

“전에 명령하신 대로 명부에 그 이름을 끼워 두었습니다.”

닛사가 즉시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였다.

“빈틈없이 처리하였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성직에 자리가 많이 비어 끼워 넣는 것이 어렵지도 않더군요.”

대공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닛사가 물러가려고 뒷걸음질 친 순간, 대공이 마치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으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이름이 뭐라던가?”

“예?”

“이름 말이야. 우리 새로운 신관.”

“아, 그자 말씀이시군요….”

닛사가 대답했다.

“아리안이라고 하더군요.”

***

아리안. 아리안이라.

들은 바 없는 이름이었다.

대공은 그 이름을 입 속으로 굴려 보았다. 여전히. 낯익은 데라고는 없었다.

“놔줘! 놔줘!”

그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린 아리안이 발버둥 쳤다. 대공이 그 부탁을 받아들여 침대 안쪽으로 몸부림치는 몸뚱이를 내던지고서 그 위로 올라탔을 때는 숫제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자, 잠깐.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 봐.”

어느샌가 아리안은 반말로 지껄이고 있었으나 대공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기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는 아리안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내 침대에 누르고 머리를 푹 덮은 두건을 벗겼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녹색 눈. 살짝 벌어져 안쪽을 드러내고 있는 부드러운 입술. 그 입술은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으나 대공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 봐. 닛사 경이 그러는데 당신이 불면증이 심하다면서….”

“일왕자가 네게 키스했나?”

“뭐?”

난데없는 질문에 아리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그가 간신히 질문을 알아듣고는 발끈했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면서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안 했어!”

“그럼 뭘 했지?”

“그, 그게….”

아리안이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니라며 팔짝 뛰던 것이 무색하게 수그러든 기세에 대공의 상상력이 이리저리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일왕자의 침대 안에 가죽끈으로 묶여 매달려 있던 아리안의 난잡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 상상은 이제 일왕자가 헐벗은 아리안을 짓뭉갠 채로 헐떡거리는 데까지 뻗었다.

“별거 안 했어….”

아리안이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대공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아리안이 얼굴을 퍼뜩 들고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지, 진짜야. 진짜 별거 안 했어. 나, 날 때렸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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