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대공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잔을 들어 올려 계피와 정향을 듬뿍 넣은 포도주를 천천히 삼켰다. 그 강렬한 알코올과 향신료의 향기조차 그의 갈증을 완전히 지워 없애지는 못했다.
대공은 어딘지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불길이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대공은 흐린 환영을 보았다. 석상처럼 굳건하게 버티어 선 열두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단단하고 굳건한 얼굴들이 천장까지 높게 솟구쳐 올랐다. 벼락이 그 사이를 갈랐다. 그것이 대공을 쫓았다. 그것은 대공이 칠 년간 겪어 왔던 저주의 고통을 닮았으며, 끝없이 지속될 것만 같던 불면의 밤 내내 눈꺼풀 안쪽으로 떠오르던 꿈을 닮았다.
대공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환영들은 사라지고 텅 빈 벽만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미친 듯한 갈증이 아랫배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섹스를 갈구하는 적나라한 욕망이었다.
이러한 충동은 대공에게 낯설었다.
그는 딱 스물세 살의 대공이 할 만큼만 성에 탐닉했다. 그것은 성욕보다 의무감에 더 가까웠다. 지나치게 금욕적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이 충동은 의무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갈망이 그의 푸른 눈을 덮었다.
그 섹스.
그것은 여태까지 그가 겪어 왔던 그 어떤 섹스와도 달랐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모든 경험을 가짜처럼 만들었다. 믿기지 않으리만치 생생했고, 그것만이 ‘진짜’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극야의 끝나지 않는 밤 내내 끌어안고 침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치료의 효과일까?
이런 것이 진짜 섹스라면,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전까지 그의 삶은 전부 가짜나 다름없었다.
대공은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을 잡는 손.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한 익숙한 손. 베여도, 부러져도, 불에 타고 얼어붙어도, 검 자루를 쥐어도 부드러운 비단을 쥐어도 아무런 감흥 없는 손. 그는 그것을 아주 생경한 것을 바라보듯 바라보다가, 마치 무언가를 쥐듯이 한 번 꾹 주먹 쥐었다가 다시 펼쳤다.
그는 그 손 가득 희고 부드러운 살을 움켜잡았던 밤을 생각했다.
뱃속에 똬리 튼 욕망이 그의 강철 같은 인내심을 집어삼키려고 으르렁거렸다.
안타깝게도 그 어리숙한 멍청이는 대공이 잠든 사이에 어디론가 도망쳐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대공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독 안의 쥐였다. 말 그대로.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밤이 되면 마치 굴로 돌아오는 생쥐처럼 그 낡고 허름한 방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가지 않던가?
단지 잠자리에서 아리안이 불렀던 그 이름만은 약간 신경이 쓰였는데….
검지가 검 자루 끝을 초조히 툭, 툭, 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닛사에게 그 이름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대공이 그렇게 생각했다.
‘칼릴. 칼릴이었지.’
어딘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은 이름이기라도 한 것일까.
검 자루 끝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멎었다.
‘오늘 밤엔 불러야겠다.’
그는 아리안의 타오르는 것처럼 붉고 선명한 머리카락, 녹색 눈, 손안에 잡혀 으스러질 듯한 부드러운 사지 따위를 떠올렸다.
‘아니. 아니지. 내가 찾아가는 편이 낫다.’
하인들이 쓰는 계단으로 남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내려가는 것이다. 저번처럼 문 뒤의 어둠 속에 숨어, 새앙쥐처럼 숨을 죽인 소년이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가오는 순간 단번에 낚아챌 것이다.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어깨에 짊어져서 아무도 없는 그 비좁은 계단으로, 그의 가장 가까운 두 수족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침실로 끌고 돌아오는 것이다. 터질 듯이 발랑거리는 가슴팍에 몸을 맞대고 침대에 짓누른 채 그 축축하고 뜨거운 입 안을 원 없이 빨아 댈 것이다.
대공이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순간, 문 바깥에서 쿵,쿵,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접니다.”
오스발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떨떠름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반가운 소식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공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리고 있던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들어와, 오스발.”
그 명령에 문이 열리고 오스발이 들어왔다. 강직한 기사의 얼굴도 목소리처럼 떨떠름했다.
“무슨 일이지?”
대공의 질문에 오스발이 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손님이 오셨는데….”
“손님?”
대공의 한쪽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치켜 올라갔다. 얼핏 무심한 그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예민하게 읽어 낸 오스발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왕자가 왔습니다.”
대공의 얼굴에 이번에는 명백한 불쾌함이 떠올랐다.
일왕자의 방문은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반가운 방문도 아니었고.
일왕자 나일은 여느 때처럼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은 차림으로 등장했다. 금으로 된 단추가 달린 남색 튜닉에 소매가 넓은 은색 벨벳 외투를 입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힌 두꺼운 허리띠를 찼다.
그는 백 미터 밖에서도 번쩍거렸다. 대공은 그와 자신 사이에 차양막을 쳐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평한 발걸음으로 나타난 나일은 대공의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가 흐음 하면서 수염을 밀어 미끈한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이게 도르센식 유행인가?”
그가 자신이 앉을 의자의 투박한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대단히 무례한 태도였으나 대공은 화내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이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대단한 무례였다. 나일의 입꼬리가 꿈틀 흔들렸다.
“방이 살벌하기 짝이 없군. 어때? 이 형님이 아우를 위해 가구 몇 점 보내 줄까? 마침 루구스의 장인이 만든 가구가 나한테 조금 있는데… 자작나무를 깎아 만든 훌륭한 거거든. 이 살벌한 방에 몇 점 들여다 놓으면 방 분위기도 확 살고 좋을 거야. 흠. 내 생각에 이 방엔 흰색이 약간 필요해.”
그러면서 나일이 마치 품평하는 듯한 태도로 의자에 앉은 대공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공은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무늬 없는 투박한 튜닉에 튼튼하게 엮은 질긴 가죽 허리띠를 차고 있었으며 검집에도 도르센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장식이 없었다. 그는 보석 하나 달고 있지 않았다. 그의 짧게 자른 금발만이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너한테도 마찬가지고. 그 칙칙한 옷차림 말이다. 그게 도르센식 유행인지는 몰라도 파살리아에 왔으니 파살리아 법을 따라야지. 안 그래? 최근 세고의 비단이 몇 필 들어왔는데 말이야. 열 명의 장인들이 달라붙어서 금실로 사자를 수놓은 거지. 그걸로 튜닉이나 가운을 지어 입으면 너도 아주 근사해 보일 거다.”
“감사합니다만, 형님.”
대공이 표정 없이 대꾸했다.
“저는 기사라서 그런 화려한 옷은 불편합니다. 그리고 이 방도요.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니니 형님께서 굳이 신경 써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 그래….”
나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투박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의 긴 벨벳 소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무릎 반대편으로 펼쳐 넘기면서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댔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벌린 거만한 자세였다.
대공의 뒤편 양쪽에 선 닛사와 오스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몸종도 거느리지 않으시고요.”
대공이 한 손을 들어 올려 닛사와 오스발을 내보내며 물었다.
그와 일왕자는 단둘이 만날 사이가 결코 아니었다. 둘째 왕녀와 도르센 대공의 동맹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듯이, 둘째 왕녀와 이 일왕자 간의 우애가 그다지 퍽 도탑지 않다는 것 또한 유명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파살리아에는 십일 년 만에 귀환한 막내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운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와 일왕자의 만남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또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인가?
“어쩐 일이라니? 형이 아우도 방문 못 하나?”
나일은 마치 그 모든 사실을 모르는 양 뻔뻔스레 대꾸했다.
“저번 사냥 연회가 끝나고 제대로 얘기도 못 하지 않았나? 그땐 퍽 즐거웠는데 말이야… 안 그래?”
대공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입가에 반사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네, 몹시 인상적인 연회였죠.”
“조만간 연회를 한 번 더 열 예정이야. 그때도 물론 참석해 주겠지, 내 동생?”
“물론입니다.”
대공이 흔쾌히 대답했다. 나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그는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시답잖은 근황이 이어졌다. 약간의 음탕한 화제도 입에 올랐다. 죄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뿐인 이야기였고 둘 모두 그걸 알았다.
“코르키라는 어떠하다던가?”
“코르키라요?”
대공은 마치 새삼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전황이 영 좋지만은 않다던데 우리 둘째 누님께서 괜찮으신지 아우로서 여간 걱정이 되어야 말이지.”
우스운 말이었다.
나일은 코르키라 전쟁에 돈 한 푼, 병사 한 명 보태지 않았다. 물론 아르바도 요청하지 않았고.
애초에 이 공작새 같은 왕자는 대공이나 둘째 왕녀와는 다른 종자였다. 그는 기사도 아니었고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