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3> 희생제
“요즘 좋아 보이십니다.”
오스발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대공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는 최근 여태까지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뿐했고 머릿속은 명정했다. 칠 년간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녔던 고통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자취를 감췄다.
날카로운 끌로 뒤통수를 파 내리는 듯한 끔찍한 두통도 내장을 불태우는 열화와도 같은 통증도 없는 하루하루란 이전까지 그가 알아 왔던 어떤 삶과도 달랐다. 이것이 진정 살아 있는 것이라면 이전까지 그는 죽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대공은 말고삐를 느슨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말 옆구리에 거세게 박차를 가했다. 준마가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쏘아지듯 튀어 나갔다. 오스발이 질세라 말을 몰아 그를 따라왔다.
어둑한 안개에 잠긴 완만한 구릉을 두 필의 말이 난폭하게 달려 나갔다. 한참을 말을 달린 끝에 주종은 성으로 귀환했다.
영하를 넘나드는 기온에도 두 남자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으며 둘 다 가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구간에 당도해 말에서 뛰어 내렸다. 말구종이 달려 나와 그들에게서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노련한 말구종이 한 필에 성 한 채 가격은 족히 나갈 명마를 조심스레 다뤄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오스발이 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망토를 벗으며 앞서 걷는 대공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아니, 정말로요.”
그가 무심한 주군의 옆얼굴을 향해 지껄였다.
“전하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파살리아 물이 전하의 입맛에 퍽 맞나 봅니다?”
“하!”
대공이 짧고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오스발이 킬킬댔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지금이야 전하께서도 완전히 도르센 사람이 다 됐지만 칠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이런 말씀은 좀 그렇지만 뭐,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나 계신 적이 드무셨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수행하며 수발들었던 오스발이기에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대공은 화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
“뭐어. 제 의견을 말해 보자면 전 여전히 파살리아가 싫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 온 게 완전히 바보 같은 짓거리만은 아니었지요.”
그러면서 오스발이 고개를 들어 음침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오후, 한낮인데도 성벽과 탑에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해가 뜨지 않은 침침한 하늘에 검은 성탑이 우중충하게 버티어 서 있었다. 차갑고 습기 찬 바람이 불어 어둑한 중정을 쓸었다.
“맞아. 성과가 있었지.”
대공이 드디어 오스발의 주절거림에 대꾸했다.
“아주 큰 성과지요.”
오스발이 휘파람을 불었다.
음산한 성과 달리 그들의 목소리에는 활력이 넘쳤다. 넓은 어깨는 곧게 뻗어 있었고 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선명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젊은 남자들의 몸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 음울한 성채와 어울리지 않게 활기찼다.
건물 출입구를 지키고 선 경비병이 그들을 향해 묵례했다.
대공은 돌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이미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스발이 낄낄거리면서 “목욕 시중을 들까요? 옛날처럼요.” 하고 물었지만 정작 대공이 거절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갔다.
도르센은 일 년의 대다수 동안 전쟁 중이었고 대공은 그에 익숙한 탓에 혼자 모든 일을 스스로 하는 데에 더 편안함을 느꼈으며, 오스발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공이 자신의 망토를 떼어 내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몸에 걸친 것을 하나씩 차례대로 벗어 던지며 욕조를 향해 걸어갔다. 나무 욕조 안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으며 그 곁에 놓인 높고 좁은 탁자 위에 몇 가지 목욕용품이 램프와 함께 놓여 있었다.
나신이 된 대공은 피부가 익을 듯이 뜨거운 물속으로 단번에 들어갔다.
저주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일부러 괴로울 정도로 물을 뜨겁게 끓여 목욕을 하곤 했던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격렬한 승마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에서 열기가 솟았다. 유연하고 단단한 근육으로 덮인 나신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물이 식을 때까지 오랫동안 목욕을 즐겼다.
새 옷을 입고 나온 그를 닛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닛사는 응접실의 한가운데에 서서 자신의 손톱 거스러미를 조금씩 뜯고 있다가 대공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탁자 곁에 서 있었는데 탁상에는 은쟁반 위에 오목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대공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아편으로 조제한 진통제였다.
닛사는 수년간 그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여러 약을 지었다. 아편꽃으로 만든 이 강력한 진통제는 개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이었고, 대공은 그것을 주기적으로 복용했다.
그 약은 대공의 삶의 일부분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공이 젖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털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약은 필요 없어.”
“예?”
약을 준비하던 닛사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성큼성큼 응접실을 가로질러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의 얼굴로 불길이 다홍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아래에서 반듯하게 정돈된 얼굴은 어딘지 부드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였다.
“상태가 좋거든.”
그 말에 나이 든 마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그래.”
대공은 느긋이 대답했다.
“치료가… 정말 잘되고 있는가 보군요.”
닛사가 떨떠름히 중얼거렸고, 대공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닛사는 곧 표정을 정돈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대공이 손가락으로 검 자루를 어루만졌다. 그의 푸른 눈에 일렁거리는 불길이 드리워지며 알 수 없는 빛이 떠올랐다.
나이 든 마법사는 그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젊은 주군은 때때로 백여 년을 살아온 마법사인 그녀조차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닛사는 마치 미지의 어떤 기이한 생명체를 앞에 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스물세 살. 그것은 닛사에게는 그야말로 새파란 애송이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까마득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깨를 떨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전하. 치료가 잘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게 정말 정화술일까?”
대공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가만히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닛사가 그런 대공의 옆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현재로서는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화술이 아닌 그 어떤 치료 방법도 이렇게 빨리, 효과적으로 깊은 저주를 지워 내지는 못하니까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너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난 마법사이니.”
대공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저도 세상의 진리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세이두르에 오래된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과거 신전에서 수학한 적이 있지요.”
닛사의 목소리가 잠깐 끊어졌다.
“…오라스테스의 전쟁 전에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연락이 끊어졌습니다만… 한번 서신을 보내 보겠습니다.”
“답이 도착하는 대로 보고해라.”
“예.”
닛사는 그렇게 대답한 뒤, 고개를 들어 대공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긴 목욕 덕분에 약간 상기된 그의 뺨에는 생기와 윤기가 함께 감돌았다. 그녀의 입가에도 함께 미소가 떠올랐다.
“뜨거운 포도주를 올릴까요? 계피와 정향을 넣은 것이 있습니다.”
“음… 그래.”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닛사가 가져온 포도주를 천천히 마시면서 혼자만의 생각으로 잠겨 들었다.
오스발의 말이 맞았다. 파살리아의 그 무엇도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왕녀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결코 파살리아에는 걸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살리아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그의 진정한 고향이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유년 시절은 그저 꿈을 꾸듯 흐릿하기만 했다.
대공에게 있어 최초의 기억이라 할 만한 것은 도르센의 겨울이었다. 그 추위와 고통. 그것이야말로 그의 추억이었고, 그것은 모두 도르센에 있었다. 그의 입술에 대롱을 대고 약과 꿀을 함께 흘려 넣던 닛사의 석상 같은 얼굴, 그의 곁에 앉아 갑옷에 기름칠을 하던 오스발의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 깊은 해자에 고인 썩은 물 냄새, 지독한 시취, 마수들과 대치한 채 참호에 웅크려 지새던 밤, 얼어붙은 손끝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무작정 휘둘러 대던 칼날이 마수의 비늘을 베는 둔탁한 감각… 그런 것들이 바로 그의 요람에 함께 누워 있었다.
‘하지만….’
대공은 묵직한 놋쇠 잔을 손가락 사이로 굴리면서 생각했다.
‘수확이 있었지.’
그의 눈꺼풀이 절반쯤 밑으로 떨어지면서 긴 눈꼬리가 잘록해졌다. 흡족함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 파살리아에서의 가장 큰 성과.
그것은 둘째 왕녀와의 동맹도, 국왕의 세력을 견제할 기회도 아니었다.
그건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