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23)화 (23/130)

#23

다음 날부터 아리안은 필사적으로 대공을 피해 다녔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대공이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었고 아리안은 그것을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며칠 동안은 온몸이 욱신거려서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에게 물리고 빨린 전신의 말단이 모두 아팠다. 가슴도 따끔거리고 사타구니도 얼얼했고 페니스는 따갑다 못해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다.

다행히 며칠이 더 지나자 붓고 부르튼 곳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극야가 성큼성큼 다가오며 한낮에도 우중충하니 어둑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인들이 성 곳곳에 램프를 걸고 벽난로마다 장작을 그득 채워 넣었다.

아리안이 그토록 대공을 피해 다닌 것이 무색하게 한 번 미뤄졌던 치료 날이 다가왔다.

아리안은 바짝 긴장한 채로 대공의 방으로 갔다.

내실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대공은 편안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긴 의자에 한쪽 발을 올리고 앉아 있었는데 오스발이 칼자루에 손을 댄 채로 그 뒤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리안을 데려온 닛사가 허리를 숙여 대공에게 인사했다.

아리안은 힐끔힐끔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밤 이래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리안이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불길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반듯한 얼굴은 마치 그날 일이 없었던 양 태연하기만 했다.

아리안은 그를 힐끔대면서 납작한 사기그릇에 대고 손끝을 베어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핏방울이 떨어진 물이 곧 포도주처럼 농후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리안이 사기그릇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을 때, 대공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닛사, 오스발. 오늘은 바로 쉴 것이니 먼저 물러가라.”

그 말에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아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닛사와 오스발을 쳐다보았다. 도르센의 두 가신은 별다른 의문 없이 예, 하고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들이 내실을 떠나갔다. 문이 닫히고 곧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멀어지다가 끊어졌다.

대공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아리안에게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아리안의 호흡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그가 손을 뻗어 아리안이 움켜쥐고 있던 그릇을 마주 잡았을 때,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그것을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아리안의 손이 그릇에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대공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대공은 망설임 없이 그릇을 들어 올려 내용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가 그릇을 내던지고는 아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악!”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끊어졌다.

아리안이 꽥 비명을 내질렀다. 어째서? 왜? 하는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레 떠돌았다.

대공은 발버둥 치는 아리안을 어깨에 짊어지고 성큼성큼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침실 문을 걷어차 열고 들어가자 아리안의 눈에 커다란 침대가 들어왔다. 우산 모양의 천개(동방의 호화로운 직물로 만든 돔 형태의 덮개)가 펼쳐진 높은 침대. 그것을 보는 순간 그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대공이 아리안을 침대로 내던졌다. 양털을 채워 넣은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아리안의 몸이 나동그라졌다.

아리안은 허겁지겁 팔다리를 움직여서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두꺼운 양털 매트리스 밑으로 손발이 마치 모래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푹푹 빠져들 뿐이었다.

그사이에 대공은 여유롭게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검집째로 바닥에 내던지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가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아리안은 혼비백산하여 반대편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커다란 손이 그 발목을 낚아챘다. 그대로 몸이 주르르 끌려 내려갔고 등 뒤에서 대공이 그를 짓누르듯이 올라타 왔다.

두꺼운 휘장이 떨어지며 침대 안이 어둑해졌다.

어둠 속에서 묵직한 몸이 그를 눌렀다. 아리안은 헐떡임을 눌러 참으며 애써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 아니야. 약 안 썼어…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대는 목소리가 결백을 주장했다. 대공의 무심한 목소리가 아리안의 말을 끊었다.

“그동안 잘도 도망 다녔어.”

아리안이 흠칫 굳어졌다.

“감히 내게 미약을 먹여 겁탈하고.”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아리안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감히 도르센의 대공을.”

“미, 미안해.”

아리안이 간신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 내가….”

대공의 눈이 아리안을 살폈다. 그는 아리안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기색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네 치료는 진짜였다. 그날 먹인 미약도 정말 단순한 미약이었고. 내 적이 널 보냈을 리는 없으니….”

“나, 난 누가 보내서 온 게 아니야. 내가 여기 온 건… 당신을 도우려고….”

대공이 대뜸 그의 말을 잘랐다.

“널 보낸 게 아르바 누님인가?”

아르바는 그를 돕는 것과 동시에 약점을 잡아 두고 싶어 할 만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들은 동맹이었으나 권력을 사이에 둔 동맹은 결코 영원하지 못한 법이었다.

아리안은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떨어트렸다.

“아니야.”

“그럼?”

그가 한 손으로 아리안의 턱을 움켜잡아 똑바로 돌렸다. 축축하게 그렁그렁한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리안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곧이어 목덜미까지 완전히 벌겋게 물들었다.

대공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 약을 당신에게 먹였던 건….”

아리안의 눈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일렁였다.

“그저….”

목소리가 꺼질 듯이 흐릿해졌다.

대공은 더 이상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챈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미소는 금방 사라졌으나 그 달콤한 잔상은 오랫동안 아리안의 각막에 남았다.

그가 서서히 아리안을 향해 다가왔다.

“그럼 네가 바란 게 이런 거였나?”

그 입술이 속삭였다.

“날 겁탈하길 원했어?”

“아….”

아리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바란 것이 짧은 입맞춤이든 아니면 포옹이든 간에 미약을 먹인 순간부터 그것이 겁탈이 아닐 수는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아리안의 턱이 기어이 한 번 상하로 끄덕였다. 그는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이제 끝이었다. 대공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도르센의 대공으로서든 아니면 칼릴로서든.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뺨에 깃털 같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리안은 퍼뜩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가냘픈 비명이 흘러 나갔다.

“아…!”

대공의 입술이 그의 뺨에 닿아 있었다. 그 입술이 달아오른 볼 위에서 미끄러졌다. 곧 입술이 서로 닿았다. 아리안은 또다시 아, 하고 신음했다. 그 바람에 벌어진 입술 틈으로 대공의 입술이 겹쳐졌다.

아리안의 두 손이 매끄러운 비단 시트를 와락 움켜잡았다.

대공이 살짝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트릴 때마다 아리안의 몸이 꿈틀거렸다.

“이걸 원했던 건가?”

대공이 다시 물었다.

아리안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열렬한 대답에 대공이 자신의 머리를 기울여 조금 더 깊게 키스했다. 혀가 섞이며 점막이 마찰하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입술이 떨어진 순간, 아리안이 “아.” 하며 안타깝게 눈을 뜨고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떨어진 눈꺼풀 밑으로 긴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젖은 눈동자는 마치 입맞춤을 더 바라는 듯이 대공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키스는 저번과는 달랐다.

아리안은 대공의 가슴팍 밑에 깔린 몸을 꿈틀거려서 그를 똑바로 보려고 했다. 다행히 대공이 한쪽 팔꿈치를 시트에 짚어 몸을 살짝 띄워 주었다. 그 틈에 아리안이 몸을 돌렸고, 둘의 얼굴이 가까이 붙어 있었던 덕분에 아리안의 입술이 대공의 뺨을 스쳤다.

대공이 그대로 다시 아리안의 턱에 키스했다.

아리안은 참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발끝이 저절로 구부러들고 허리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역시 저번과는 달랐다.

어떻게 된 걸까? 대공은 아리안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공이 그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사랑의 묘약에 취하지도 않았고, 아리안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리고 대공은 옷을 벗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천천히 셔츠를 벗고 아리안의 눈앞에 아름다운 근육으로 뒤덮인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의 피부는 매끄러웠고 지저분한 주술 문신의 흔적이나 깊은 블랙홀 같은 상처조차 그 신체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모든 부위의 근육은 섬세하고 명확하게 쪼개져 있었으며 완벽한 양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침대 곁에 놓인 램프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그의 금빛 머리칼에 휘황한 광채를 드리웠다. 그는 마치 황금으로 된 관을 쓴 것 같았다.

아리안은 홀린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아리안을 향해 대공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걸 바란 게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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