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왜 그러지?”
“아니….”
아리안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대공이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아, 안 돼!”
아리안은 황급히 그 잔을 마주 움켜잡았다. 손가락 끝이 서로 닿았다.
그 순간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가 잔을 자기 쪽으로 당겨 단번에 들이켰다.
아리안의 숨이 멎었다.
대공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한쪽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가 냉소가 그 반듯한 얼굴 위에 떠올라 있었다.
탁,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뭘 넣었지?”
그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날 독살하려는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욘 없었겠지. 그럴 기회가 여태까지 적어도 한 번은 있었을 테니까.”
대공이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아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공은 태연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치료가 끝난 뒤에 얻게 될 거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그때였다.
그의 말이 멎었다. 미간에 주름이 가며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슨….”
그의 말이 느려졌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의자 한편에 놓인 검을 집었다. 그러나 검집에서 검을 뽑기 전, 그의 몸이 의자 밑으로 미끄러졌다.
쿵!
단단한 몸이 타일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은 숨도 못 쉬고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대공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잡은 채 바닥에 쓰러진 그대로였다.
“아….”
아리안은 대략 일 분가량이 지난 뒤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카, 칼릴….”
그가 휘청거리면서 대공에게로 달려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대공의 안색은 마치 잠든 것처럼 편안했다. 아리안은 손을 그의 코밑에 가져다 댔다. 규칙적인 호흡이 느껴졌다. 어깨를 조심스레 잡아 흔들었다. 점점 강하게 흔들었다. 나중에는 감히 뺨을 톡톡 두들겨 보기도 했다. 대공은 깨어나지 않았다.
아리안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내 실수야. 내가 잘못했어.’
대공에게 먹인 것은 아주 단순한 미약이었지만 지금 대공은 상처 입은 몸이었다. 그를 필멸의 몸으로 만든 아주 위중한 상처.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런 그에게 섣불리 약을 쓰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일단은 상처를 살펴야 했다.
아리안은 대공의 어깨를 안아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남자의 몸은 단단한 뼈와 질긴 근육으로 꽉 차 있어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대공의 상반신을 와락 끌어안고 그를 옆으로 돌려 눕히려 했다.
그 순간, 손이 올라와 아리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눈 깜빡할 틈도 없었다. 대공의 손이 아리안의 목을 움켜잡은 채 그대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일 초 뒤, 이제는 아리안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그 등 뒤를 대공이 찍어 누르고 있었다.
“잠까, 흐읍, 흐으…!”
대공의 손바닥이 아리안의 코와 입을 한꺼번에 틀어막았다. 아리안은 그 딱딱한 손바닥을 향해 훅훅 숨을 뿜어 대면서 팔다리를 퍼덕였다.
정수리 위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미약을 썼군.”
버둥대던 아리안의 몸이 굳었다. 동시에 아리안은 그가 명백하게 흥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뚜렷하게 발기한 것이 그의 등 언저리에 닿고 있었다.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들이댔다. 후우우, 하는 길고 미지근한 숨이 떨어졌다. 아리안의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고 온몸의 솜털이 거꾸로 곤두섰다.
“무슨 장난질을 치나 했더니….”
갈라진 목소리가 천천히 혼잣말했다.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고, 아리안은 대답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등 뒤에서 대공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갑작스레 대공이 그의 옷을 잡아 뜯었다. 튜닉과 셔츠의 소매 솔기가 지익 뜯어지며 어깨가 드러났다.
아리안이 놀란 새처럼 팔딱거렸다. 그 바람에 대공의 손이 입에서 떨어졌다.
“자, 잠깐, 잠깐마안…!”
대공은 당연히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양손으로 아리안의 몸통을 난폭하게 더듬었다. 몸이 돌려지며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대공의 눈은 가느스름했고 반질거리는 푸른 눈동자 속 동공은 흐릿했다. 거기에는 이미 이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리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그 시선에서 달아났다.
“미, 미안해. 미약을 먹인 건… 그러니까, 내가… 아니. 하지만 이상한 걸 꾸민 건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바랐던 건 그냥 당신이, 아니, 당신을….”
아리안이 횡설수설했다. 어느샌가 반말로 지껄이고 있었으나 둘 중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저 조그마한 것이었다. 짧은 입맞춤… 어쩌면 달콤한 포옹. 애초에 그 애정의 묘약은 이 정도로 강렬한 것조차 아니었다.
아리안은 다시 간신히 고개를 돌려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상처를 봐야 해… 어쩌면 약이 상처에 악영향을 미치는지도….”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밀착한 두 몸 사이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그의 아랫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리안이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대공이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자그마한 얼굴이 손안에 잡히며 뺨이 찌그러져 입술이 벌어졌다. 대공의 시선이 그 벌어진 틈으로 꽂혔다.
아리안의 뒷덜미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긴장감에 숨이 가빴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아리안은 애써 입술을 달싹였다.
“미… 안해….”
뺨을 잡힌 터라 어눌한 발음이 흘러나갔다.
위에 올라탄 대공이 어딘지 몽롱한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미안하지?”
“미, 약을 먹여서….”
“왜?”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그 이상한 문답은 대공이 그를 향해 몸을 숙이며 끝났다. 아리안의 눈에는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만 보였다. 약간 벌어진, 살짝 까슬한, 건조함이 남아 있는, 키스하기에 딱 알맞은 양감의 그 입술만.
그것이 아리안의 입술에 닿았다.
충격과도 같은 짜릿함이 아리안의 등을 내달렸다.
아리안은 거의 헐떡였다. 바윗덩어리 같은 몸에 짓눌린 채 강제로 키스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완벽한 촉감의 입술이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붙고,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입술이 마찰할 때마다 아리안의 어깨가 움찔움찔 움츠러들었고, 결국 버티지 못한 그가 먼저 입을 벌려 대공의 입술 끝을 혀로 눌렀다.
대공이 놀란 듯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일렁이는 푸른 눈이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공이 이번에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움켜잡고 키스했다. 더 길고 난폭한 입맞춤이었다.
“우음….”
아리안은 괴롭게 코로 신음했다.
그의 혀는 아리안의 혀 위에 겹쳐진 채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혀뿌리가 뻣뻣해지고 삼키지 못한 타액이 아랫입술에 고였다.
“으음, 우, 으으응….”
치덕거리면서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대공이 그의 혀를 세게 빨았다. 야릇한 기분이 아리안의 배 속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신체적인 교합은 지나치게 오랜만이어서 이성을 제대로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어느샌가 그는 양팔로 있는 힘껏 대공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대공이 입술을 떼고 그의 턱을 깨물었다. 아리안이 손끝으로 대공의 어깨를 약하게 긁자, 그가 다시 입술을 밀어 부딪쳤다.
‘산소 부족 때문이야.’
아리안은 몽롱한 머릿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 합리화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대담하게 손을 밑으로 뻗어 청동 기둥처럼 단단한 대공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이런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순서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했다. 손끝에 뚜렷하게 발기한 성기 윤곽이 얼핏 닿은 순간, 대공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떼어 놓았다.
“왜 말을 멈췄지? 계속해 봐. 나를 어쩌고 싶은 건데?”
“그, 그게… 읏!”
아리안은 그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나는, 나는,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도로 다물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대공 또한 아리안에게서 명확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했다.
대신 그는 이로 아리안의 옷을 물어뜯었다. 목깃을 여민 단추가 뜯어지며 앞섶이 벌어졌다. 단추가 어디론가 튀어 날아갔다. 그의 두 손이 아리안의 허리끈을 잡아 끊었다. 허리끈이 끊어지고 튜닉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거침없이 아리안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아리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딱딱한 손이 그의 사타구니를 쓰다듬었다. 숨이 불규칙적으로 길어지다가 짧아졌다. 야릇한 긴장으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