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9)화 (19/130)

#19

아리안은 조심스럽게 샘물을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샘물 표면에 회색 외투를 뒤집어쓴 소년이 비쳤다. 그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외투에 달린 두건을 벗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나고 그 사이로 낯익은 자신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리안은 몸을 조금 더 구부려 샘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창백한 흰 얼굴에는 우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고 눈꼬리가 밑으로 떨어져 기운 없는 안색이었다. 녹색 눈동자…. 그것은 아리안이 자신의 외모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모난 데 없는 이마, 콧날, 눈가, 입술, 턱…. 모든 것은 정갈하게 제자리에 붙어 있었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아리안은 짧은 상념에 잠겼다.

이렇게 샘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옛날에는 수정 거울이나 맑은 샘물, 또는 떠다 놓은 우물물을 들여다보며 점을 치곤 했었지만, 신화와 마법의 시대가 저문 뒤에는 사실 거울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잠자코 샘물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수면 위 그의 얼굴이 느릿하게 흔들리더니 안쪽에서 뿌옇게 안개 같은 것이 일었다. 그 안개 사이에서 흐린 실루엣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넓은 응접실, 불길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 칼릴이 어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뚝 선 그의 검은 등. 그의 발에 붙은 그림자가 옆으로 기울어져 흰 벽에 드리워져 있었다. 아리안의 시선이 그 그림자를 따라갔다. 화염과 강철로 이루어진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생물의 그림자를.

어느 순간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흔들려 그림자를 함께 흔들었다.

칼릴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안은 퍼뜩 놀라 수면 위를 한 손으로 내리쳤다. 사방으로 물이 튀며 파문이 퍼지고 수면이 흐릿해졌다. 환영이 사라지고 대신 아리안의 얼굴이 돌아왔다. 충격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린 얼굴.

“하아아….”

아리안은 긴 숨을 몰아쉬면서 샘물에서 엉금엉금 물러나 뒤로 주저앉았다.

그는 어느덧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자란 탓에 부스스했고 오랫동안 제대로 빗질을 하지 않아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뺨을 더듬었다. 대리석 같은 피부에는 창백한 광택이 감돌았다. 모든 것은 손끝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생각한 것은 그야말로 오랜 옛날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스러워하던 적도 있었다. 싫어했던 적도 있었다. 수 세기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양가감정을 반복한 끝에, 그저 뼈를 근육과 피하 지방, 가죽으로 덮어 놓은 것에 불과할 뿐인 겉모습에 더는 아무 가치도 두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다.

아리안은 얼굴을 더듬던 손을 떨어트렸다.

그의 시선이 야트막한 샘물가를 향했다. 무더기로 뭉쳐서 시든 야생 박하와 쐐기풀 더미가 보였다. 그 위를 서리가 살짝 덮고 있었다.

아리안은 엉금엉금 그쪽으로 기어가서 맨손으로 누렇게 시든 쐐기풀 줄기 사이를 파헤쳤다. 드러난 흙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흙 밑에 파묻힌 박하 씨앗의 냄새가 났다. 아리안은 그 냄새를 맡으며 먼 옛날을 생각했다.

무정한 차원 마수가 그를 구했던 과거의 그 날을.

기억이 몽롱하게 뒤섞이며 그날 칼릴의 얼굴 위에 깊게 잠든 대공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평온하게 잠든 얼굴, 그 부드러운 입술.

추위가 무색하게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아니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그를 보며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한 적은… 그러나 잠든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에 기억이 미치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리안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어 쐐기풀 더미에서 얼굴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어이 검지를 입가로 가져가 힘껏 깨물었다. 손톱 밑으로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것이 서리 위로 떨어졌다. 핏방울이 떨어진 자리에 서리가 녹으며 흙 밑에서 새순이 움터 머리를 들었다. 그것이 삽시간에 길게 자라나 향기로운 박하 냄새를 풍기면서 커다랗게 잎사귀를 펼쳤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달아 불쑥불쑥 새싹이 솟구쳤다. 박하 잎사귀 사이로 백합 새순이 솟아오르더니 꽃망울이 터졌다. 향기로운 흙과 풀 냄새가 퍼졌다. 아리안은 황급히 상처 난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았다. 피가 멈추며 갑작스레 찾아온 봄도 멈췄다.

아리안은 무성하게 돋아난 박하 덤불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와락 양손을 뻗어 박하 잎을 한 움큼 뜯어 냈다. 상처 난 손가락 끝에 맺혀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이 박하 잎 위로 떨어졌다. 그윽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리안은 그 향기를 감추듯이 서둘러 박하 잎을 소매에 넣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

피와 박하 진액, 새벽이슬 몇 방울을 섞자 감미로운 향기를 가진 한 모금의 액체가 완성되었다.

주술로 감정을 움직이는 건 금기였으나 육신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정도라면 금지되지 않은 간단하고도 수많은 방법들이 있었다. 이 사랑의 묘약 또한 그중 하나였다.

아리안이 바라는 것은 결코 크지 않았다.

이 단순한 묘약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작은 바람.

아리안은 이전 닛사가 가져왔던 치료의 대가를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황금이 아니라… 거기서 생각이 멎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주제에. 자기 자신의 모순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수치심은 칼릴을 떠올리자 금세 잊혀졌다. 머릿속이 마치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몽롱해지고 뺨이 뜨거워졌다.

칼릴은 기억이 없고, 이건 하룻밤이 지나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단순한 약이고, 게다가 아리안이 바라는 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니….

그러니까 이건 한때의 일탈에 불과하다.

아리안은 약을 작은 놋쇠 병에 담고 뚜껑을 닫아 소중히 품에 넣었다.

대공을 만나고 싶다는 아리안의 부탁에 닛사는 의아한 표정을 했으나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대공이 그를 보겠다고 알려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더 지난 뒤였다.

그동안 아리안의 마음은 긴장감에 한껏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부풀었다가 산산이 터져 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던 탓에, 정작 대공의 방으로 불려 가자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대공은 항상 앉는 장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지에 셔츠, 그리고 단추를 잠그지 않아 앞이 벌어진 튜닉을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리안에게 닿은 순간 아리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를 보자고 했다면서?”

대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무슨 일이지?”

“어, 저, 그게….”

그에 비해 아리안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리안은 소맷자락을 쥐어 비틀면서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감사하다고 얘기하려고 왔어요.”

아리안은 하마터면 또다시 반말로 지껄일 뻔한 자신의 혀끝을 꽉 깨물었다.

대공이 아리안을 힐긋 보았다.

“고작 그걸 얘기하려고?”

고작이라니! 아리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대공의 눈은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대공을 만나고자 했는지 떠올려 냈다.

“고작이 아니에요. 그날 대공 전하께서 오지 않았다면… 일왕자에게….”

그 밤을 생각하자 아리안의 목덜미로 오한이 타고 올랐다. 아리안은 다시금 소맷자락을 쥐어짜면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아니, 말씀드리려고….”

아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황급히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떻게 해야 이 묘약을 대공에게 먹일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아리안의 눈에 대공이 앉은 의자 곁의 탁자가 보였다. 탁자는 대공이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마시다 만 놋쇠 잔이 보였다. 그는 닛사나 오스발이 대공의 잔이 비었을 때 그 잔을 채워 주던 것을 떠올려 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의자에서 약간 떨어진 둥근 식탁 위에 식사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치즈와 빵이 담긴 접시, 포도주를 흘린 흔적, 잘라 내고 남은 훈제 햄 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주둥이가 긴 주석 주전자도 있었다.

아리안은 황급히 식탁으로 다가갔다.

양손으로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꽤 묵직했다.

대공이 아리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말리지는 않았다. 아리안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서툰 손놀림으로 약병 뚜껑을 벗겨 내고 그것을 주전자 안에 부으려고 했다. 서투른 손가락 아래에서 자그마한 놋쇠 병이 미끄러져 주전자 안으로 퐁당 떨어졌다. 주전자 내부에서 그것이 표면에 부딪히며 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숨을 헐떡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은 한쪽 눈썹을 약간 들어 올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아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꽉 부여잡고 대공에게로 걸어갔다.

대공의 컵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주전자 안에서 약병이 구르는 소리가 또다시 났다.

아리안의 마음이 흔들렸다.

대공은 변태의 마수에서 아리안을 구했는데 아리안은 지금 뚫린 입이라고 감사하다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그의 술에 미약을 넣고 있다.

이성이 돌아오며 얼굴이 불시에 뜨거워졌다.

아리안은 주전자를 황급히 당겨 안았다. 포도주가 튀어서 그의 소맷자락을 적셨다. 대공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