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4층은 닛사와 오스발을 비롯해 대공의 몇몇 가신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그들은 나무 가벽으로 분리된 널찍한 개인 공간에서 생활했다. 3층에는 하급 기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층에는 넓은 연회장과 알현실, 화려하게 장식된 객실들이 있었다. 제법 합리적인 공간 분리였지만, 대공은 궁정 귀족이 아니었으므로 사실상 대부분의 공간은 비어 있었다.
이 거대한 탑에 상주하는 것은 대공, 닛사와 오스발, 도르센에서부터 대공을 수행해 온 몇몇 기사들, 그리고 하인 몇 명뿐이었다.
대공은 하인들이 자기 눈이 닿는 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까탈스러운 주인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오래도록 전장에서 지낸 탓에 섬세한 수발을 받는 것을 귀찮아했고, 가장 가까이서 그와 시간을 보낸 닛사나 오스발이 그의 수발을 드는 것을 제외하면 굳이 많은 하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인 없이는 신발 한 짝 벗지 않는 파살리아의 궁정 귀족들이 그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아리안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대공의 거처는 대부분 조용했고 사람이 적었으므로 눈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적었다.
아리안은 하인들이 쓰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축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흘만의 외출이었다.
다행히 축사 총관은 아리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리안이 잠시 고향에 다녀왔다고 믿고 있었는데, 사실 여부가 어떻든 간에 축사에 일손이 모자라 어린애들까지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돼지우리를 청소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으니 아리안은 내심 안도했다. 닛사가 축사로 일꾼 두어 명을 보내 돼지우리 일을 돕게 한 덕분이었다. 건장한 일꾼들의 손길 하에 돼지우리는 오히려 아리안이 있을 때보다 더 번쩍번쩍했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축사 총관은 길거리를 헤매며 구걸로 연명하던 아리안에게 일자리와 잠잘 곳을 제공해 주었으며 동시에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은인이었으므로 아리안은 그에게 말도 없이 돼지치기 일을 때려치운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 마법사가 의외로 주변을 챙기는 성격인 것 같아. 하인까지 잔뜩 보내 주다니 말이야. 고맙다고 해야겠어.’
아리안은 그런 대단한 오해와 함께 닛사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닛사의 방은 비어 있었다. 여러 번 문을 두드리고 제법 오래 기다렸지만 문 안쪽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복도 전체가 고요했다. 마치 탑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리안은 복도를 약간 기웃거리다가 결국 몸을 돌렸다.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살짝 열려 있는 반대편 문이 문득 그의 눈에 띄었다.
그 문은 대공의 거처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보통은 항시 굳게 닫혀 있었다.
호기심이 슬쩍 머리를 들었다.
아리안은 그 문 앞으로 슬금슬금 걸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반 뼘만큼 벌어져 있는 문틈을 들여다보았다.
어둑한 층계참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장갑처럼 보였으나 명확하지는 않았다.
아리안은 문틈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복도는 조용했다.
그는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문을 다시 아까 열려 있던 반 뼘만큼만 남기고 닫았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향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다가갔다. 몸을 구부려 그것을 주웠다. 장갑이었다. 그것은 고급스럽게 재단된 좋은 물건으로 보였으나 엄지 쪽이 뜯어져서 수선이 필요해 보였다. 이런 값비싼 가죽 장갑을 낄 만한 사람은 몇 없었다. 이건 대공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리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대공이 남몰래 이 문을 썼을지도 모른다. 망가진 장갑을 벗었으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흘리고 만 것이리라.
아리안은 어둑한 계단 위쪽을 힐끔거렸다. 좁은 계단이 이어지는 위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 위에 대공이 있을까?
탑에 머무는 열흘 동안 아리안은 그의 머리털 한 올 보지 못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그 변태의 방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밤이었다.
그때 아리안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가 일왕자의 거처에 그런 꼴로 있었던 건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고, 그래도 대공의 저주나 치료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아직도 아리안에게 화가 나 있을까?
아리안은 손에 들린 장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걸 핑계로 사과를, 변명을, 아니면 최소한 그를 그 변태의 손에서 구해준 데에 대한 감사 인사 한마디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대공이 많이 바쁘지 않다면 몸 상태는 어떤지 물어볼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치료가 미뤄지고 말았는데 고통은 없는지, 지난 치료는 어땠는지. 어쩌면 그 한 번의 치료가 예상외의 효력을 발휘해 기억이 약간 돌아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만일 아무도 없다면 이것을 위층에 살짝 내려놓고 오면 될 것이다. 대공이 있다면…. 아리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발견했다고 그의 물건인 것 같아 가져왔다고 하면 화를 내지는 않겠지. 어쩌면 장갑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리안은 혹시 주름이라도 질까 장갑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계단을 올랐다.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에 계단 끝에 도달했을 때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서늘한 복도의 공기 탓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리안은 거칠어진 숨을 억누르며 닫힌 문틈에 눈을 들이대고 안쪽의 동향을 살폈다. 문이 지나치게 딱 닫혀 있는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이 스르르 밀리면서 문틈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후끈한 열기가 쏟아져 나와 아리안의 상기된 뺨을 덥혔다.
벽난로에서 나무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조금 더 밀어 자신이 들어갈 만큼의 틈을 만들었다.
너른 응접실이 나왔다. 응접실 가운데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벽에 걸린 램프가 어둑한 응접실 중앙을 밝히고 있었다. 이 응접실은 벗고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따듯하게 덥혀져 있었다.
아리안은 발소리를 죽여 응접실로 들어왔다.
이곳에 올라온 것은 대공의 상처를 치료할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와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문득 아리안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긴 망토가 보였다. 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망토 옆에 가죽 부츠 한 짝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금 더 옆으로 가자 나머지 한 짝도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옆에는… 아리안의 눈이 이제는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졌다. 기다란 우단 의자 발치에 장갑 한쪽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리안의 손에 들려 있는 장갑의 반대편 한쪽이었다.
아리안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긴 우단 의자에 대공이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는 가죽 부츠를 벗어 던진 두 발을 의자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머리는 반대편 팔걸이에 기댄 채 한 팔을 바닥으로 늘어트린 자세였다.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눈을 감은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의자는 벽난로의 열기가 딱 적당할 정도로 닿는 위치에 놓여 있었고, 램프 불빛이 그의 반듯한 미간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대공은 어린아이처럼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든 채였다. 살짝 눌린 금빛 머리카락 끝이 벽난로 불길을 받아 불그스레한 광채를 뿜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대로 한 폭의 명화처럼 보였다.
아리안은 잠든 대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대공은 영원히 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가 누워 잠들어 있는 의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깥의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곳은 따스하고 온화했다. 어둑한 응접실에서는 가죽과 이름 모를 향료, 나무가 타는 냄새가 뒤섞인 향기가 풍겼다. 그것들이 아리안에게 현실 감각을 잊게 했다.
아리안은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공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듯한 빛으로 물든 고상한 뺨. 그리고 거기서 몇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의 입술이 있었다.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벌어져 있었고, 부드러워 보였으며, 아랫입술에 약간의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까지 포함해 완벽한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그 입술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 거인이 그의 심장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 대는 것만 같았다. 아플 정도였다. 여전히 대공의 입술은 그곳에 있었다. 그건 칼릴의 입술이기도 했다.
그 순간 아리안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마 끝부터 턱 끝까지 삽시간에 새빨개지며 목덜미가 울긋불긋해졌다.
아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급히 몸을 돌렸다.
어느샌가 꽉 움켜잡고 있던 장갑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조차 신경 쓰지 못하고 방에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