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7)화 (17/130)

#17

대공은 순순히 돌아갈 기세가 아니었다. 신관 어쩌고 하는 허풍까지 쳐 가면서 한밤중에 나일의 침실로 들이닥쳤을 때부터 그랬다. 만일 그가 정말 강제로라도 침대를 확인하려 든다면 불리한 것은 나일이었다.

신관 어쩌고 하는 대공의 개소리를 이 방의 모든 기사들이 들었다. 그가 칼을 뽑아 휘장을 찢기라도 해 침대 안에 묶여 있는 소년의 난잡한 모습이 드러난다면 기사들도 눈이 박혀 있는 이상 대공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그것은 엄청난 망신거리였다.

나일의 입꼬리가 짧게 경련을 일으켰다.

고민이 끝났다.

그는 간신히 위엄을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아우가 직접 휘장 안쪽으로 들어가 저것이 정말 네 신관이 맞는지 확인하도록 해라.”

대공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미소 같기도,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비록 형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어찌 아우가 형님의 침대를 함부로 열어젖히겠습니까? 기사들을 물려 주시면 그때 확인하도록 하지요.”

***

아리안은 대공의 망토에 둘둘 말려 변태의 방을 빠져나왔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아리안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대공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방 한가운데에 그를 던져 놓았을 때, 닛사와 오스발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건 누굽니까? 가셨던 일이 잘 안 되었습니까? 설마 일왕자의 애인을 대신 납치해 오기라도 한 건 아니겠죠?”

오스발이 맹한 얼굴로 지껄였다.

굳은 얼굴의 닛사가 오스발의 옆구리를 툭 쳤고, 그제야 오스발은 입을 다물었다.

대공이 말없이 탁자에 놓인 주석 잔을 집어 들었다. 닛사가 빠르게 다가가 그 잔에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랐다. 물을 마신 대공이 입을 열었다.

“우리 소중한 신관이지.”

그가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리안은 더욱 겁에 질려 쪼그라들다 못해 그대로 사라질 것처럼 망토 속으로 어깨를 파묻었다.

대공은 아리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닛사, 서둘러 움직여라. 일왕자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어. 밤이 지나기 전에 신전의 사제 명부에서 쓸 만한 걸 하나 찾아 놔라. 도르센 출신으로.”

그 뒤에 대공은 망토를 생명 줄처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얼굴 위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쭙잖은 외모는 화를 부를 뿐이지. 오스발, 저 얼뜨기에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줘.”

대공이 몸을 돌렸다.

“시간이 지났으니 오늘 치료는 글렀군.”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안쪽 내실로 사라졌다.

닛사가 한숨과 함께 아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거라. 오스발, 전하 말씀 들었지? 몸종을 불러 이 애가 입을 만한 옷을 가져와.”

“네? 아니. 잠깐만요. 이게 누군데요? 설마 전하께서 정말로 일왕자의 정부를 뺏어 왔단 말입니까?”

황소 같은 몸집의 기사가 멍청한 질문을 던져 댔다. 마법사의 주름진 미간에 더욱 깊게 주름이 패었다.

“이게 누구겠나? 우리가 여태까지 누굴 찾아다녔다고 생각해?”

“예? 하지만 우리가 찾던 건… 아니. 잠깐. 진짭니까?”

오스발이 히에엑 하는 기이한 비명을 올렸다. 닛사는 칠칠치 못하게 입을 벌린 그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아리안을 향해 한번 턱짓을 했다.

그녀가 아리안을 데려간 곳은 작고 조용한 방이었다. 몸종들이 쓰는 방처럼 보였다. 허름한 침대 세 개가 방구석에 놓여 있었고 작은 서랍장이 하나, 의자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비어 있는 방이니 일단은 이곳을 써라.”

닛사가 팔짱을 끼고는 아리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간이 깊게 패여 그녀는 더욱 성마르게 보였다.

“일왕자가 네 얼굴을 알고 네가 대공 전하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앞으로는 더 주의해야 한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며 대공 전하의 치료에 집중하도록 해라.”

그때 오스발이 반쯤 열린 문틈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아리안의 얼굴을 힐끔거리면서 들고 있던 옷가지를 가장 가까이 있는 침대에 내려놓았다.

닛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자.”

그녀가 몸을 돌렸다. 오스발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녀를 따라 방을 나갔다.

닫히는 문틈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니 참… 그 작자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망나니로 이름이 높다더니 명불허전이로군요. 그 돼지치기가 저런 미인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홀로 남은 아리안은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서 오스발이 내려놓은 옷가지를 들어 올렸다. 아무 무늬도 색깔도 없는 속옷과 양말, 바지와 셔츠, 발등까지 떨어지는 장의, 그리고 커다란 두건이 달린 회색 외투였다.

그것들은 조금전 대공의 서늘한 시선을 상기시켰다. 어쭙잖은 외모는 화를 부를 뿐이라던 딱딱한 목소리. 이 볼품없고 투박한 옷가지들은 화를 부를 일을 아예 드러내지조차 말라는 그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안은 시무룩하게 그 옷들을 입고 가장 안쪽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가죽끈에 억세게 묶였던 피부가 아프고 저렸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악몽 속에서는 변태가 나왔다.

변태는 아리안의 입에 고삐를 물리고 등에 안장을 얹어 올라타고는 엉덩이에 채찍질을 했다. 줄줄 울고 있는 아리안 앞에 대공이, 아니 칼릴이 나타났다. 악룡으로 이름 높은 차원 마수는 손가락 하나로 변태를 죽이고 아리안을 구했다. 아리안은 흐느끼면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다가 잠에서 깼다.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밑으로 떨어진 채였다.

***

성은 고요했다.

극야 전의 마지막 햇빛이 성벽 밑에 얇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리안은 커다란 미루나무에 가려진 성벽 모퉁이를 통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주랑(柱廊)으로 들어갔다. 아무 무늬 없는 석주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은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나뉘며 이 성을 난해한 미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리안은 단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헤매지 않고 회랑을 빠져나와 작은 뒷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곧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높이가 낮고 폭이 넓은 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이전, 대공의 방으로 숨어들기 위해 어찌나 쥐새끼처럼 성을 헤집고 다녔는지 앞마당처럼 지리가 훤했다.

파살리아의 궁전에는 여섯 개의 탑이 있었고 모든 탑은 중앙 중정을 중심으로 회랑과 건물로 이어져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성채를 이루고 있었다. 탑에는 각각의 출입구가 있었지만 각 탑을 잇는 건물을 통해 내부에서도 드나드는 것이 가능했다.

성채 내부의 구조는 바깥보다 더 복잡했고 특징 없는 복도와 목적 모를 수많은 방들로 이루어져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이들마저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천 년간 파살리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개축과 증축을 반복한 끝에 이제는 그 누구도 성의 모든 방과 길을 알지 못했다. 어딘가에는 비밀 문이 숨겨져 있었고 어떤 복도는 어디로 통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커다란 연회장이나 알현실, 회의실 따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방들은 몹시 흡사한 구조와 크기를 갖고 있었으며, 때때로 어떤 문은 한번 들어가 문을 닫으면 결코 다시 열리지 않거나, 막다른 복도 끝으로 통하는가 하면, 성벽 바깥의 낭떠러지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 거대한 성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악몽이었다. 굳이 어둑한 하늘 구석에 똬리를 튼 먹구름이 아니더라도.

아리안은 아무도 없는 좁고 컴컴한 복도를 통과하여 뱀의 탑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도달했다. 단차 탓에 가파른 계단을 다섯 개 내려가자 그는 이제 뱀의 탑에 들어와 있었다.

탑의 구조는 얼핏 단순했다.

외벽을 따라 빙글빙글 이어지는 계단이 탑 전체를 감싸며 지하층에서부터 꼭대기 층까지 연결하고 있었다. 층마다 이어지는 중앙의 넓은 공간은 여러 개로 분리된 방이거나, 연회장이거나, 또는 서재, 아니면 응접실이었다.

각 층에는 물건이나 사람을 빨리 올리거나 내릴 수 있도록 도르래가 설치된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어서 거기로 무거운 물건 또는 병자를 옮기기도 했다. 사랑의 도피를 하려던 어떤 왕녀가 그 깊은 구멍에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거나, 도르래가 끊어져 안에 타고 있던 어느 공작이 죽었다거나 하는 음침한 괴담이 덤으로 따라붙어 있기도 했다. 물론 그런 괴담이 아니더라도 아리안은 안전장치 없는 이 구식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공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에 전혀 수고로움을 느끼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므로 5층을 통째로 자기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그 위층은 꼭대기 층으로, 과거 그곳에는 방어용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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