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6)화 (16/130)

#16

이런 상황은 그의 어떤 예상에도 없었다. 가죽끈으로 묶여 천장에 매달린 채 가슴에 채찍질을 당하리라는 것은 아리안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변태가 땀에 젖은 옷자락 안쪽으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피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리안이 더욱 펄떡거렸다. 그나마 묶이지 않은 한쪽 발로 어떻게든 놈을 걷어차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짚은 발끝이 떨어지는 순간 균형을 잃은 몸뚱이가 휘청이며 가죽끈이 살집이 튀어나올 정도로 거세게 온몸을 조였다. 변태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리안의 몸을 양팔로 와락 끌어안으며 지껄여 댔다.

“아하하하! 도르센 미인들은 처녀처럼 조신하게 교육받는다더니 진짠가 보구나. 아주 야생마처럼 날뛰는군!”

그의 양팔에 끌어안기는 순간 아리안의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쳐 올랐다. 히익 하는 숨 가쁜 비명이 입술 사이로 튀어 나갔다. 남자가 끈으로 팽팽하게 조여진 아리안의 허벅지 살집을 더듬었다. 아리안의 몸이 움찔움찔 경련할 때마다 그가 흥분한 숨을 훅훅 뿜어냈다.

“우리 막내는 너를 어떻게 귀여워해 주느냐? 요 발칙한 젖통을 어루만져 주더냐? 도르센 사내들이 너 같은 미인을 어떻게 다루는지 내게 알려 다오.”

“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

“말 안 듣는 못된 망아지의 엉덩이에 채찍질을 해 줄까? 응? 밤새도록 채찍질을 당하면 얌전해질 테냐?”

변태가 지껄였고 아리안의 온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 왔다. 엉덩이에 채찍질을 하겠다는 둥, 남은 한쪽 다리도 묶어서 거꾸로 천장에 매달겠다는 둥,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채워 밤새도록 타고 놀아야겠다는 둥 하는 끔찍한 발언이 튀어나올 때마다 아리안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내저어 댔다.

아리안의 녹색 눈동자는 이제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금빛에 가까운 발그스름한 속눈썹도 축축하게 젖어 아래쪽으로 떨어질 것처럼 묵직하게 내리깔려 있었고 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진땀으로 젖어 반질거리는 대리석 덩어리 같은 전신에 흐느적거리는 실크 가운이 달라붙어 안 입으니만 못한 난잡한 꼴이었다. 가슴팍에 붙도록 억지로 접혀 올라간 무릎 밑으로 살집 오른 가랑이 틈이 얼핏얼핏 보였다. 기력 없는 성기의 윤곽이 옷자락 안쪽으로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남자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아리안의 가슴을 덥석 움켜잡았다.

“아악!”

아리안이 비명과 함께 버둥거렸다.

징그러운 손이 얄팍한 가슴살을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억지로 끌어 잡힌 가슴팍에 금세 핏기가 몰려 유륜이 부풀었다.

“음탕한 것… 귀여워해 주마.”

변태가 헐떡거리면서 아리안의 귀를 핥았다. 큼지막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아리안의 허벅다리를 찔러 댔다.

아리안이 더 이상 이 상황을 피할 길은 없으며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쿵쿵쿵 하고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겨 댔다.

“누구냐!”

즐거운 순간을 방해받은 변태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저, 전하! 전하!”

그러나 방해꾼은 멈추지 않았다.

“제기라알….”

변태가 숨을 커다랗게 들이쉬면서 아리안의 가슴을 아프도록 우악스레 주무른 끝에 떨어져 나갔다. 그가 흐트러진 자신의 가운을 끌어 올리면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별것 아닌 일이면 당장 네놈의 머리를 몸에서….”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어졌다. 활짝 열린 문 바깥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빠르게 쇄도해 침실을 가로질렀다. 램프 안쪽의 불길이 흔들리며 벽에 비친 그림자가 커다랗게 너울댔다.

문 바깥쪽에서 기마용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뻗어 나와 마치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나일의 어깨에 부드럽게 얹혔다. 그 손이 조금 전의 부드러움은 거짓말인 양 강하게 그를 밀었다. 흥분으로 씩씩대던 나일이 얼결에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형님.”

그가 밀려난 만큼, 문 바깥에 서 있던 손의 임자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복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흥분과 열기로 달아올라 있던 방 안의 공기를 식혔다. 그리고 그 냉기를 몰고 온 사내가 서늘한 얼굴로 속삭였다.

“제 신관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얼떨떨하던 나일의 얼굴에 서서히 비웃음이 떠올랐다.

“뭐? 신관? 그런 걸 왜 여기서 찾느냐?”

그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대공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밀쳐 냈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 바람이 닿아 희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그것을 벅벅 긁어 대며 몸을 돌렸다.

“여기엔 그런 거 없다. 여긴 내 침실이야. 여기에 있는 거라곤 귀여운 암말뿐이지.”

그러면서 나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리안은 그때서야 다른 사람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이 커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지금이 아니면 이 침실에서 빠져나갈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사, 살려 줘요! 사람 살려요!”

나일과 대공이 동시에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휘장이 절반 정도 내려진 침대 안쪽에서 어렴풋한 그림자가 버둥대는 것이 보였다.

일왕자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혀가 입술을 핥았다.

“암말이 또 날뛰는구나. 어서 가서 채찍질을 해 줘야겠어.”

“형님.”

그때 대공이 다시 그를 가로막았다. 나일의 얼굴에 신경질적인 기색이 서렸다.

“아우야, 지금은 새벽이고 이 형님은 몹시 피곤하구나. 파살리아와 도르센의 예의가 다르니 네게 잘못을 묻진 않겠다만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암말이 제 신관인 것 같아서요.”

대공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체 얌전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나일이 폭소를 터트렸다.

“저것이 네 신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는 대공이 자신의 정부를 돌려받기 위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고많은 변명 중에 신관이라니! 변명치고는 아주 구질구질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사실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아리안을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그는 어서 빨리 이 불청객을 쫓아내고 싶어졌다.

“아우가 돌아간다는군! 배웅해 드려라!”

그가 문밖을 향해 소리치자 몇 명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이 문 안으로 들어와 대공을 향해 정중한 척, 그러나 몹시 강압적인 어투로 “나가시지요.” 하고 말했을 때, 대공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 신관은 저를 위해 매일 밤 기도하지요. 아주 신실하답니다.”

어둠 속에서 유달리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눈이 나일을 응시했다.

“아시다시피 제 태생이 태생인지라 그런 것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는 검을 차고 있었지만 양팔을 모두 느슨하게 늘어트려 검에 손이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느슨한 태도에는 빈틈이 없었다. 삽시간에 일왕자의 기사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대공은 그런 첨예한 긴장감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형님, 만약 형님의 저 암말이 제 신관이라면 오늘 밤 이후로 정결함을 잃게 될 텐데 그에 대한 보상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네, 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당연히 똑같은 신관으로 보상해 주시겠지요?”

대공이 들은 척도 않고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녹색 눈, 대리석을 주물러 빚어낸 듯한 몸에, 입은 작되 입술은 살이 올라 있어야 할 것이고 이마는 동그랗고 코는 작아야 합니다. 새끼 양처럼 통통하되 목은 백조의 목 같고 팔다리는 사슴의 것 같아야 하지요. 당연히 몸 어디에도 흠집이 없어야 하고요.”

“나, 나는 그런 신관 모른다!”

나일이 말을 더듬자 대공은 더 말하는 대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열한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일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고 나일이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린 순간, 균열 없이 완벽하게 침착한 얼굴이 그에게 다가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 기사들 앞에서 형님의 침대를 억지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피차 아는 것인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십니까? 이 아우가 먼저 한발 물러나 드릴 터이니 형님 전하께서도 이쯤에서 양보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것과 동시에 대공은 차분한 얼굴 그대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가 공손한 동작으로 한 손을 가슴팍에 올려 예의 바른 자세를 취했다.

“제 신관은 아직 파살리아 성의 지리를 몰라 종종 길을 잃곤 하지요. 궁정 예의도 알지 못해 몸가짐이 정숙지 못하니 형님께서 착각하신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고요. 설령 형님의 침대로 뛰어든 암말이 정말 제 신관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제 잘못이지 어찌 아우가 형님을 탓하겠습니까?”

나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의 바른 협박.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휘장이 내려온 침대 너머로 버둥거리는 팔팔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놓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나일의 구미에 딱 맞았다. 어디서 또 저런 것을 구할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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