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 물론 아니옵니다! 저, 제가 당장 달려가서 마법사 놈에게 전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종이 아리안의 머리채를 탁 놓고는 검은 두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봐! 전하 말씀 못 들었나? 어서 이 천한 놈을 데려가서 씻기고 심문 준비를 해 놔!”
검은 두건들이 머뭇댔다.
“씻길까요? 아니면 심문 준비를 할까요?”
한 놈이 그렇게 물었고, 시종이 자기 주군 못지않게 길길이 날뛰었다.
“귀가 멀었어? 귀가 멀었냐고! 씻기고 심문 준비를 하라고! 깨끗한 옷을 입혀서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
검은 두건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그들의 우악스러운 손이 바닥에 엎어진 아리안을 움켜잡았다.
그들이 다시 아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리안은 또다시 자루 속에 내던져졌고, 자루째 짐짝처럼 어디론가 옮겨졌다.
천장이 몹시 높고 어둑한 곳이었다. 검은 두건들은 아리안을 자루에서 끄집어내고 옷을 모조리 빼앗아 간 뒤에 두레박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뒤집어씌웠다. 삽시간에 옷을 빼앗기고 얼음물까지 뒤집어쓴 아리안은 넋을 잃었다. 검은 두건 한 놈이 바닥에 엎어져 몸을 움츠리고 부들부들 떠는 아리안의 양팔을 억지로 잡아 일으켜서 벅벅 몸을 씻겼다. 목욕이라기보다는 무나 배추를 씻는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희멀건 알몸을 드러낸 아리안을 짊어지고 다시 이동했다.
아까의 시종이 초조하게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검은 두건들이 아리안을 바닥에 내려놓자 시종이 마치 말이나 소를 품평하듯 아리안의 온몸을 이곳저곳 주물렀다.
그가 연신 허어, 허어, 하고 감탄을 터트렸다.
“아까의 거지 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구나. 우리 주인 나리께서도 참… 도대체 어찌 알아보신 거람?”
시종이 중얼거리다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램프가 놓인 탁상에 옷가지가 개켜져 있었다. 시종이 그것을 가져와 아리안에게 입혔다.
그것은 긴 가운이었는데 솔직히 옷이라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이 나풀거리는 비단 가운은 속이 고스란히 비쳤으며 너무 미끌미끌한 나머지 제대로 허리끈을 묶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알몸보다는 나으리라. 아리안은 파랗게 질린 손으로 가운 앞자락을 생명 끈처럼 움켜쥐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어떤 긍정적인 상상을 하려고 해도 부정적인 예측만이 아리안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그 부정적 예감이 맞았다.
“얼른 일어나. 얼른! 이리로 와라.”
시종이 손바닥으로 아리안의 어깨를 철썩철썩 매질하고 반대편 손으로 아리안을 끌어당겼다.
아리안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다른 방으로 끌려갔다.
그 방은 어둑하게 밝혀져 있었고 뺨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더웠다. 거의 아리안의 키만 한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휘장이 절반 드리워진 커다란 침대가 불길하게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리안의 불안을 증식시켰다.
“늦어!”
침대 반대편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아까의 거만한 목소리였다. 아리안은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공작새처럼 꾸미고 있었던 남자가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군청색 비단 가운을 입고 한 손에는 황금 잔을 들고 있었다. 비단 가운의 무늬 탓에 아까보다 더 공작새 같았다. 그가 아리안을 보더니 손에 든 황금 잔을 냅다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리안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가 아리안의 턱을 움켜잡고는 휙 들어 올렸다. 음탕한 시선이 아리안의 녹색 눈, 무거워 보일 정도로 촘촘히 자란 속눈썹, 깎아 낸 것처럼 동그란 이마, 아직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붉은 머리카락,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곧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아니. 우리 막내가 대단한 건가? 응? 도르센 대공이 금욕적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던데 뒤로는 이런 미인을 숨겨 놓고 혼자서 재미를 봤단 말이지?”
그제야 아리안은 이 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도르센 대공을 막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는 왕국에 단 두 명뿐이었다. 국왕의 아들들. 그리고 그중 하나인 둘째 왕자 아덴은 지금 파살리아를 떠나고 없으니 남은 것은 하나, 첫째 왕자 나일이었다.
파살리아의 일왕자가 자신을 첩자라고, 또는 대공의 정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정말로 아리안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오, 오, 오, 오해입니다. 저는 그냥 돼지치기일 뿐이라….”
아리안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리안의 목소리가 잉꼬의 노랫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예쁘구나. 이런 것이 파살리아에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과연 우리 막내가 도르센에서 여기까지 끼고 올 만해.”
그 손가락이 아리안의 매끄러운 턱선을 징그럽게 쓰다듬으며 목덜미로 내려갔다. 아리안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하, 하지 마! 이 변태!”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적으로 몸을 돌렸다. 콧수염 시종이 펄떡 뛰어올랐다.
“무엄한 놈! 이리 오지 못해!”
그가 아리안을 쫓아가려고 할 때, 나일이 그를 저지했다. 나일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콧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재미가 있지.”
그가 시종 대신 아리안을 쫓아 달려 나갔다. 충성스러운 시종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뒷걸음질 쳐서 침실을 떠나갔다.
“아, 안 돼!”
아리안은 닫히는 문을 향해 절망적으로 외쳤으나 곧 쾅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닫히고, 아리안은 밀실에 변태와 단둘이 남았다.
변태가 아리안을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들었다. 아리안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그의 손을 피해 반대편으로 뛰었다. 몇 분 정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변태는 아리안보다 적어도 10센티미터는 더 크고 10킬로그램은 더 무거웠다. 그 10센티미터만큼 다리도 더 길었으며 10킬로그램만큼 힘도 더 셌다.
그가 아리안을 붙잡아 번쩍 어깨에 짊어졌다. 아리안은 발버둥 쳤지만 침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침대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변태는 버둥대는 아리안을 침대 한쪽에 놓여 있던 가죽끈으로 묶어 천개(天蓋)에 매달았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아리안은 엉덩이가 머리보다 더 높게 올라간 처참한 자세로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처지가 되었다. 한쪽 다리는 무릎이 가슴팍까지 닿도록 번쩍 들려 몸통에 묶여 고정되었으며 반대편 발끝만이 아슬아슬하게 시트에 닿아 몸을 흔들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양팔은 등 뒤에서 묶였고 굵은 가죽끈이 가슴팍을 거세게 조여 댔다.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씩 웃었다. 그의 고간은 이미 묵직하게 부풀어 가운 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아리안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몸을 옥죄는 가죽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하하! 아주 팔팔하구나!”
변태의 성기가 더 가파른 각도로 발기했다. 아리안은 또 토할 것 같아졌으나 이미 토할 만큼 토해 더는 토할 것도 없었다.
변태가 짧은 마편으로 아리안의 드러난 어깨를 더듬었다. 딱딱한 가죽 채찍이 흠집 하나 없이 미끄러운 피부 위를 천천히 쓸었다. 아리안의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슴푸레한 램프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광택이 흐르는 보얀 피부가 반짝거렸다. 그것은 대리석 조상이나 매끄러운 비단에 흐르는 윤기를 닮았다. 탐욕스러운 시선이 그 빛나는 피부 위를 훑어 내려가다 벌어진 가운 틈으로 드러난 가슴팍에서 멈췄다. 변태의 회색 눈이 길쭉하게 찢어지고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흐음.”
그가 마편으로 아리안의 가슴 끄트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아리안의 녹색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으리만치 커졌다. 창백한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히고 입술이 경악으로 달싹거렸다.
“하, 하지 마….”
아리안이 간신히 그렇게 애원한 순간 채찍 끝이 그 가슴 끝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아리안은 비명도 못 지르고 입술을 벙긋댔다. 가죽끈에 옭아 매인 희멀건 몸뚱이가 발버둥 쳤다.
“젖꼭지를 숨기고 있다니 깜찍도 하지. 응?”
그러면서 변태가 흥분한 콧김을 훅훅 뿜어냈다. 마편 끝이 아리안의 희미하게 솟구친 유륜을 쿡쿡 찔렀다.
“발칙한 젖통에 채찍질을 해 줘야겠구나.”
“그만… 악!”
찰싹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서운 채찍질이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아리안이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옷자락이 뒤집히고 가죽끈이 흉곽과 허벅지를 더 꽉 조이며 괴로워질 뿐이었다.
호된 채찍질 끝에 유륜이 퉁퉁하게 부풀어 접힌 살 틈으로 기어이 유두가 튀어나왔다. 변태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리안의 몸을 훑었다. 진땀이 배어 매끄럽게 윤기가 흐르는 흰 몸통이 가죽끈에 처참할 정도로 우악스레 조여져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에 그의 성기는 더욱 터질 듯이 발기했다.
그가 채찍을 내던지고 아리안을 향해 다가왔다.
“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아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