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4)화 (14/130)

#14

저녁나절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눈발이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부터는 그야말로 쏟아붓듯이 펄펄 흩날렸다.

올겨울의 첫눈이었다.

아리안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가을로 접어드는 무르익은 여름이었는데 어느덧 태양 세 개가 더 떨어져 하늘에는 단 하나의 태양만이 남았으며 계절은 두 번 바뀌었다.

아리안은 돼지우리의 갈라진 벽 틈에 널빤지를 대고 못질을 했다. 곁으로 바글바글 몰려든 돼지들이 꿀꿀대며 애교를 피웠다. 돼지들을 밀치고 분주히 우리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겨울밤에 간혹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양이나 돼지가 얼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곤 했으므로 월동 준비는 중요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주 따끔한 채찍 맛을 보여 주겠다는 축사 총관의 엄포가 있기도 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아리안은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외투를 뒤집어쓰고 축사를 빠져나왔다.

오늘 밤은 칼릴에게 약을 주러 가기로 정해진 날이었다.

이 회동은 아주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벽돌이 부스러져 무너져 내린 헛간 담벼락 한쪽에 장작을 실은 수레가 서 있었다. 마부는 노새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아리안이 수레에 올라타자 마부가 아리안의 위에 커다란 담요를 씌워 그를 감추고서 그 옆에 노새에게 먹이던 물통을 놓아 담요가 날아가지 않게 했다. 곧 수레가 출발했다.

모든 것은 사전에 정해진 그대로였다.

아직 통행금지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눈발이 거세 길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 팔에 아이를 안고 한 팔에 물동이를 짊어진 젊은 아버지가 눈이 쏟아지는 길거리를 다급한 걸음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무도 허름한 수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레는 성벽의 북서쪽 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문지기들이 짜증을 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추위와 눈에 있는 대로 짜증이 난 상태였다. 마부가 모자를 양손으로 붙잡고서 머리를 굽신거렸다.

“아이고, 눈이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요. 길이 여간 미끄러워야지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술이라도 한 병 가져올 테니… 네?”

“얼른 들어가, 얼른!”

“그 말 잊기만 해 봐!”

수레가 문지기들을 지나쳤다.

마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느릿느릿 중정 곁을 통과한 수레가 으슥한 창고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수레에서 뛰어내리고 들고 있던 채찍을 창고 기둥에 걸었다.

아리안은 그 틈을 타서 담요 한쪽을 들추고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이전과 동일했다.

이변은 다음 순간 발생했다.

그가 수레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창고 안에서 갑자기 덩치가 크고 검은 두건을 걸친 남자 셋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아리안을 둘러쌌다. 한 명은 아리안을 뒤에서 덮쳐 입을 막았고 다른 한 명은 아리안의 양다리를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마지막 한 명이 버둥거리는 아리안의 머리에 커다란 자루를 뒤집어씌웠다. 모든 일은 단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아리안은 그야말로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성의 구조를 아주 잘 아는 것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자루 속에서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통해 어떻게든 위치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여덟 번째로 그들이 방향을 꺾고 어디론가 올라가다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는 포기했다.

한참 짐짝처럼 옮겨진 끝에 그들이 아리안을 어딘가 딱딱하고 평평한 곳에 내려놓았다. 벽으로 둘러싸인 곳인 듯 바람은 없었다.

아리안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들이 아리안을 자루에서 꺼냈을 때는 구토를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정신력을 소모해 버린 뒤였다.

“이놈인가?”

“맞습니다, 나리.”

약간 술에 취한 것처럼 혀 꼬부라진 거만한 목소리와 그에 답하는 공손하다 못해 비굴한 목소리가 아리안의 핑핑 도는 반고리관으로 전해졌다.

“흐음. 어디 보올까.”

터벅, 터벅, 균형을 잡지 못하는 불규칙한 발소리가 아리안에게로 가까워졌다.

검은 두건을 쓴 덩치가 아리안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우악스레 들어 올렸다.

“으읏….”

아리안은 나직하게 신음하며 머리만 강제로 들려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공작새처럼 한껏 차려입은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소매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모피 가운을 걸치고 허리에 화려한 칼을 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검은 머리칼에서는 술과 음식 기름 냄새가 났다.

그가 허리를 구부려 아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부랑자 같아 보이는데… 흐으, 이 자식이 우리 막내의 거처를 드나든다고?”

“맞습니다, 전하… 아니 나리. 이 녀석이 뱀의 탑에서 빠져나오는 걸 본 자들이 있습죠.”

남자가 머리를 양쪽으로 기웃기웃하더니 손을 뻗어 아리안의 턱을 와락 움켜잡았다.

“아이쿠! 전하! 어찌 이런 더러운 부랑자를 직접….”

“아니, 손이야 씻으면 되지. 안 그런가?”

남자가 취한 것치고는 제법 뚜렷한 발음으로 지껄였다.

“너, 뭐 하는 놈이냐? 우리 귀여운 막내를 위해 일하는 놈인가? 응? 아니면 누님을 위해 일하나?”

아리안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혀를 애써 움직였다.

“아,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축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어허! 거짓말을 하는 게 요 못된 입이야?”

그러면서 남자가 난데없이 반대편 손가락을 아리안의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읍!”

그때 아리안은 정말 토할 뻔했으나 또다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남자의 손가락이 아리안의 미끈미끈한 혀를 집어 아프도록 잡아당겼다.

“응? 요 못된 혀가 감히 거짓말을 나불거리느냐?”

기어이 아리안의 눈가에 눈물이 부옇게 고였다. 구토를 참는 것도 고역이었고 남자가 잡아당기는 혀뿌리도 아팠고 이러다 정말 뽑힐까 봐 두렵기도 했다. 이자가 정말 아리안의 혀를 뽑고자 했다면 집게를 썼을 것이라는 마음의 위안도 소용없었다. 맨손으로 혀를 잡아 뽑는 미친놈에게 걸린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응?”

그때 남자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아리안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그 손으로 아리안의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녹색 눈이로군. 이런 건 드문데. 에머릭이 안다면 침을 흘리겠어!”

남자가 중얼중얼 지껄여 대다가 아리안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가 아리안의 턱을 움켜쥔 손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얼굴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뱀 같은 회색 눈초리가 아리안의 모난 데 없는 광대와 관자놀이, 이마에서 코끝까지 이어지는 완만하고도 부드러운 곡선, 헤벌어진 입술의 양감 같은 것을 살폈다.

“아니. 잠깐만.”

남자가 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 막내한테 이런 고상한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미인에게 누더기를 입혀서 남몰래 데리고 노는 게 도르센 유행인가? 응? 도르센 촌뜨기들이 이제 보니 아주 풍류를 아는 작자들이었어. 안 그런가?”

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고, 진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굽신거리던 나이 든 시종이 무작정 “예, 예! 무조건 나리 말씀이 옳구만요!” 하고 외쳤다.

“어디 보자. 이런. 제법 본격적인데?”

그가 자신의 모피 소매로 아리안의 얼굴 이곳저곳을 쓱쓱 문질러 닦고 새집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흐음. 우리 막내가 내 쌍둥이 아기 새들을 거절한 게 너 때문이냐?”

남자가 아리안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술과 고기, 과일과 향료 냄새가 한데 뒤섞인 향기라기에는 지독한 냄새가 훅 풍겼다. 그리고 아리안은 더 이상 구토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아리안은 허리를 구부린 채 남자의 긴 모피 소매에 대고 토했다.

“아아악 씨발!”

남자가 아리안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시종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그에게서 모피 가운을 벗기려고 했다.

“전하!”

“이 새끼가 내 얼굴을 보고 토했어! 날 보고 토했다고!”

남자가 길길이 날뛰면서 모피 가운을 벗어 던졌다. 시종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는 득달같이 달려와 아리안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었다.

“이 죽일 놈! 죽일 놈이! 네놈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아리안은 이번에는 시종의 발등에다가 토했다. 시종이 아아악 하고 비명을 올렸다.

값비싼 모피 가운을 벗어 던진 남자가 펄떡펄떡 날뛰면서 아리안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무엄한 놈을 깨끗이 씻겨서 내 방에 가져다 놓아라! 내가 친히 심문하겠다! 말채찍과 가죽끈도 가져다 놔! 도르센 놈은 도르센 식으로 다뤄 줘야겠지!”

“하, 하지만 전하….”

시종이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면서 머뭇거렸다.

“궁정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자에게는 돌아가라고 할까요?”

“내가 친히 심문하겠다잖아! 그 자식에게는 내가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 해! 이 내가 출신도 모를 천한 마법사 놈에게 하나하나 일을 보고해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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