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란히 선 두 남자는 형제라기에는 외형적으로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대공이 키가 더 컸고 금발이었다. 일왕자는 대공보다 반 뼘 정도 작았지만 그 자신도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그는 국왕의 젊은 시절을 닮은 검은 머리였다. 대공의 미간은 반듯했고 콧대는 날렵했으며 눈썹뼈가 높았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대칭적이었고 크기와 양감에 있어 더하거나 뺄 부분이 없었다. 그는 명장이 단호히 깎아 내린 대리석 조상을 닮았다.
그에 비해 일왕자는 조금 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것은 자칫 유약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애써 얼굴에 띄운 호방한 척하는 표정이 간신히 그를 지우고 있었다. 그 또한 제법 미남자였으나 대공 곁에서는 그 빛이 바래 아주 평범한 남자처럼 보였다.
“정 사죄하고 싶다면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하도록 해. 아주 재밌을 거야. 광대와 무희들도 잔뜩 있고.”
그리고서 나일은 말 위에서 몸을 기울여 대공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속삭였다.
“에머릭의 작부들을 불렀거든. 누님도 안 계시니… 흠. 알지?”
“형님께서 초대하시는데 아우 된 도리로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대공의 공손한 대답에 나일은 묘한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황급히 표정을 감추었다.
“파살리아의 궁정식 연회는 처음이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 뒤에 그는 재빨리 말을 몰아 사냥개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두 왕족에게서 잠시 멀어졌던 닛사와 오스발이 다시 가까워졌다. 두 남녀의 얼굴에는 비슷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어느 쪽도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공이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네 걱정은 이해한다, 닛사. 더 조사해 보도록 해. 그 주술 방법… 어디에든 비슷한 것이 기록되어 있겠지.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해서도.”
조금 전 일왕자의 대화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 버린 양, 대공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닛사와 오스발이 함께 고개를 숙이며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해 질 녘까지 이어진 사냥은 노을이 숲의 서쪽 선으로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광대가 뿔피리를 불어 사냥 종료를 알리고 몰이꾼들이 흥분해 날뛰는 사냥개들을 붙잡으러 뛰어다녔다. 연분홍색 비단 사냥복을 차려입은 젊은 남작 부인이 상기된 얼굴로 깃발을 들어 올리며 사냥감을 세고 있었다. 그녀가 사냥감을 호명할 때마다 사람들이 발을 구르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여기 모인 자들은 대부분 젊은 귀족들이었고 하나같이 공작새처럼 한껏 차려입고 있었다. 모두가 나일의 편은 아니고, 또 모두가 아르바의 적은 아니겠으나, 어느 쪽이든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
“파티광이라는군요.”
오스발이 목소리를 슬쩍 낮추며 말했다.
대공은 돌아보지 않은 채 음, 하고 듣고 있다는 표시만 했다. 오스발이 말을 이었다.
“비스키우스 대공작 말입니다. 파살리아의 유행을 선도한다고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다던데요.”
닛사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고 대공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꽉 다물었다.
오스발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여기 온 작자들 차림새가 심상치 않다 했어요. 한껏 차려입은 꼴들 좀 보십시오. 저라면 저런 비단옷을 한 벌 지을 돈으로 갑옷을 한 벌 더 마련하겠습니다.”
“여긴 파살리아다. 도르센과는 달라. 그리고 저들은 너나 나처럼 기사가 아니지.”
대공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치켜올린 채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꾸며 낸 것 같은 과장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이날의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나일이 장궁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보이며 기쁨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큰 수사슴을 한 마리, 작은 토끼를 네 마리, 꽁지가 유달리 아름다운 수꿩을 한 마리 잡았다. 대단한 성과였다.
곧 그들은 성으로 귀환해 나일이 준비한 연회장으로 안내되었다.
연회장은 분홍색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높은 천장에는 금으로 된 샹들리에에서 수백 개의 초가 타올랐다. 사방의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올라 실내는 후끈하리만치 더웠으며 곳곳에 걸린 램프에서 향료와 기름이 함께 타는 묘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흐느적거리는 비단옷을 느슨하게 걸친 무희들이 맨발로 춤을 추었고 커다란 공을 탄 난쟁이 광대들은 피리를 불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모든 음식은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것이었다. 버터와 후추를 아낌없이 쓴 토끼구이, 반질반질하게 기름칠을 한 자고새 튀김, 노란 거품이 뜬 굴 수프, 포도주를 넣은 멧비둘기 찜, 소 혀와 거위 간, 기포가 이는 달콤한 과실주에 장미꽃잎을 넣고 숙성시킨 포도주, 감미로운 오크나무 향기가 이는 브랜디.
오스발이 아직까지 기마용 가죽 장갑을 낀 양손을 맞비볐다.
“그래도 파살리아의 음식만은 마음에 듭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는 대공도 닛사도 부정하지 않았다.
“뭐. 도르센에는 순무와 감자뿐이니….”
닛사가 한 손으로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르센은 척박한 황무지에 왕국의 서쪽 방벽으로써 건설된 요새였다. 황량한 땅은 경작지로서 효용이 극히 낮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은 몇 없었다.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에도 얼거나 말라 죽지 않으며 기나긴 겨울 동안 썩지 않게 저장할 수 있는 작물은 순무와 감자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금밖에 안 들어간 순무튀김하고 감자 수프만 한 달 내내 먹은 적도 있었지.”
대공이 농담처럼 지껄였고 오스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빈말이 아니라 그땐 정말 온몸에서 순무튀김 냄새가 났다구요.”
“먹을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시기가 아니었느냐?”
닛사의 엄격한 목소리에 오스발이 킬킬거렸다.
“금욕적인 마법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죠. 그래도 파살리아의 궁정 요리는 우리 마법사님의 얼음 같은 위장도 녹여 내지 않았습니까?”
짐짓 재치 있는 양 지껄여 대는 개소리에 닛사도 팔짱을 끼며 피식 웃고 말았다.
얼마 뒤, 옷을 갈아입은 나일이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잠시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나일은 금실 자수로 빼곡하게 채워진 연푸른빛 튜닉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그의 발등까지 왔다. 허리띠는 보석이 수십 개나 박혀 있는 몹시 호화로운 것이었고 그에 장식처럼 달려 있는 검집 또한 보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명백히, 실전용은 아니었다. 턱밑까지 올라오는 긴 목깃은 새의 날개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였는데 거기에는 작은 진주가 줄지어 붙어 있었고 튜닉의 단추는 전부 사파이어였다. 그는 긴 모피 가운까지 걸치고 있었는데 소매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맙소사.”
오스발이 한탄했다.
“공작새가 따로 없군요.”
마치 미리 짜 둔 것처럼 그 순간 새빨간 제복을 차려입은 몸종이 통째로 구운 수컷 공작새구이를 들고 등장했다.
오스발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고 몸을 돌렸다.
그것은 꽁지깃을 활짝 편 채였다. 기름칠을 해서 껍질은 노릇하게 반질거렸지만 부리와 머리 깃은 손상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어딘지 괴이하게 보였다.
나일이 보무도 당당하게 가장 상석으로 걸어갔다. 진주관을 쓴 미녀가 그의 손에 술잔을 들려 주었다. 몇 마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자화자찬이 이어진 끝에 나일이 손에 든 금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영문 모를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곧 사람들이 멧새처럼 포르르 흩어져 재잘재잘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거나 또는 춤을 추거나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 사람들의 무리가 파도처럼 갈라졌다.
“내 동생!”
나일이 양팔을 번쩍 벌리고 대공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입은 모피 가운의 소매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가 대공에게 도착하기 전, 오스발과 닛사는 민첩하게 주군을 버리고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을 향해 달아났다.
“연회는 어떠냐?”
“아주 훌륭합니다.”
대공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일이 킬킬 웃으면서 한 팔로 대공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이리로 오게. 이쪽으로. 내 동생이 이런 구석에서 벽의 꽃 노릇이나 하고 있을 순 없지.”
그때 한 무리의 무희들이 메추리처럼 줄을 서서 졸졸졸 연회장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남녀로 번갈아 선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춤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박수를 쳐 대며 그들을 향해 모피 목도리나 비단 손수건을 던졌다.
“저런 거에 눈을 뺏기면 안 돼. 아직 진짜는 시작도 안 했으니까.”
나일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그가 대공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상석으로 데려왔다. 가장 높은 식탁에 아까의 구운 공작새가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모란 모양으로 깎아 낸 커다란 얼음 조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연회장의 열기에 벌써부터 번질번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래. 파살리아 생활은 좀 어떻고?”
기어이 대공을 자기 옆자리에 앉힌 나일이 여전히 한 팔로 그의 어깨를 안고 반대편 손으로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며 물었다.
대공은 별다른 불쾌감 없이 그가 권하는 술을 마셨다.
“오… 오. 그래. 잘 마시는구만.”
나일이 약간 떨떠름한 투로 단번에 빈 잔을 바라보다가 박수를 짝짝 쳤다.